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점순 Oct 30. 2023

흑백 조약돌


시끄러운 속도 달래고 무더위도 식힐 겸 친정에 내려갔다. 이럴 때는 한 바퀴 휙 돌아오면 속이 가라앉는다. 친정 부모님이라도 계시면 좋으련만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베란다에 꽃 한 포기 심는 것도 남편과 의견이 달라 얼굴을 붉힌다. 강물 속의 돌들도 구르며 부딪히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얼마나 더할까. 바다처럼 넓다가도 이럴 때 보면 바늘구멍보다 더 비좁다. 팔꿈치가 닫는 거리일수록 갈등이 심하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동생은 우직하게 농사를 짓는 고향 지킴이가 되었다. 모처럼 친정 나들이에 저만치 동생 내외가 손을 흔들었다. 밤늦도록 막걸리를 앞에 놓고 회포를 풀었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잤다.

아침식사는 논 고동 된장찌개였다. 유기농 재배로 논에 우렁이를 풀어놓았다. 누나를 먹이겠다고 애쓰는 모습에 마음이 풀렸다. 밥을 먹고 꼬리 흔드는 검둥이를 데리고 시냇가로 갔다. 어릴 적 생각이 떠올라 돌 하나를 주워 던졌다. 강물 위로 물수제비가 통통 파장을 일으켰다. 둑까지 물 주름이 쫙 펴졌다. 그때는 검정 무명 팬티 하나만 걸치고 개울에 풍덩 뛰어들던 생각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멱을 감던 곳, 요람처럼 마음이 포근해진다. 강둑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하얀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나를 감싸주었다.

태초에 이 강줄기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그리고 수많은 정거장을 거쳐서 모였다가 또 다른 곳으로 흘러나간다.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니 주름을 덮어쓴 낯선 이가 보인다. 곱디곱던 얼굴이 쭈그렁 방탱이가 되어 돌아왔으니 민망하였다. 민물새우들이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랐다가 물속으로 자맥질을 한다. 퐁당퐁당, 약속이나 한 듯이 단체로 널을 뛴다. 둥글납작한 검은 돌과 흰 돌이 물속에서 햇볕을 받아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린다. 바지를 올리고 강물에 발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시원한 촉감이 발끝에서 핏줄을 타고 스멀스멀 오르내린다. 피라미들이 발에 붙은 각질을 뜯느라 간지럼을 태운다. 그 새 흙탕물 같았던 마음이 씻은 듯이 맑아졌다. 거울처럼 환히 보이는 물속으로 양떼구름이 두둥실 떠내려간다.

남편과 나는 흑백 조약돌처럼 살았다. 결혼식장 레드 카펫 위를 한발씩 옮기는 순간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개성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남편은 사계절 내내 회색과 검은 정장을 선호하였고, 베란다 문, 창문, 방문, 부엌문까지 꼭꼭 닫았고, 인테리어는 여백을 주는 공간을 좋아했다. 나는 꽃을 심고 가꾸며 자연을 동경하는 취미가 제일 즐겁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활짝 열면 남편은 얼른 닫아버린다. 그때부터 눈에 부싯돌처럼 불꽃이 튀었다. 조약돌이 물살을 가르며 협곡을 만나 부서지듯이 까칠한 모도 많이 깎였다.

고향 산천은 변함이 없다. 푸른 들판은 엄마 품처럼 아늑했다. 비릿한 강물 냄새가 옷에 흠뻑 젖었다. 남편의 번호가 떴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전화기를 열었다. 대뜸, “집 걱정하지 말고 푹 쉬다가 올라와.” 하고는 끊었다. 겨우 하룻밤을 비웠는데 성인군자가 되었나. 서로 표정을 볼 수는 없어도 감정이 풀렸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철썩철썩 쉼 없이 흐르는 물속에서 돌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이 돌들도 처음에는 거칠고 모가 많았겠지. 얼마나 부딪히고 깨어지며 상대방에게 맞추느라 둥글납작하게 닳았을까.’ 돌에도 이력서가 붙는지 표면에 줄띠와 작은 숨구멍이 송송 뚫렸다. 조약돌 두 개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굴렸다. 빠드득빠드득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지금까지 다독이며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친정엄마가 그리워진다. 나이가 들어도 엄마는 엄마였다. 엄마는 새벽부터 밥해놓고 들에 나가 호미질로 손가락이 갈퀴가 되도록 밭일을 했다. 학교에 갔다 와서 엄마가 일하는 들로 갔다.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낙비가 쏟아졌다. 토란대를 꺾어 우산으로 쓰고 토끼처럼 뛰었다. 흙탕물이 콸콸 굽이치면서 위협적인 돌들의 노래가 들렸다. 세월이 흘러도 유년의 푸른 들판은 생생하게 다가왔다. 친구들과 앞치마에 돌을 주워 누가 멀리까지 던지는지 내기를 했다. 이 돌들은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지 손에 차가운 촉감이 피부에 와 닿는다. 조약돌 두 개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행복이 영원할 것 같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 남편을 보는 순간 흑백 돌처럼 그는 내 이상형 같아 보였다. 막상 결혼을 하고 살아보니 신혼부터 불협화음이 생겼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출발했는데 그 반대로 향했다.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로 내 주장만 내세우다 보니 신뢰가 서서히 무너졌다. 천성은 바뀌지 않았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강물처럼 수위 조절을 해 보았지만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서울에서 부딪혔던 갈등을 곱씹으며 둑을 서성거렸다. 아까처럼 애꿎은 돌을 손에 쥐고 또 강물에 던졌다. 손에서 벗어난 돌은 물 위를 통통 튀다가 꼬르륵 물속으로 빠졌다. 산으로 들로 한 바퀴 돌았다. 동생의 목소리가 둑길을 타고 건너왔다.

“누나, 빨리 점심 먹어!”

과수원 만 평을 동생 내외가 경작한다. 슬하에 아들만 둘을 낳아 공부시키고 장가도 보냈다. 흑백 돌처럼 찰그랑거리며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살아간다. 친정 부모님이 안 계시니 동생네로 가물에 콩 나듯 다녀간다.

돌 두 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이 돌들이 어디에서 굴러왔는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세상에는 돌과 물이 넘쳐난다. 돌은 거친 발걸음으로 수만 년 거대한 산을 넘어왔다. 모양도 사람의 얼굴처럼 천차만별이었다. 최초의 인간은 돌로 타제 석기, 마제 석기, 뗀석기, 간석기 같은 도구를 만들어 문명의 초석을 놓아주었다. 그 덕에 인간은 위대한 문화를 남기며 발전해왔다. 돌칼을 사용하고, 일상생활용 도구와 무기를 만들었다. 두뇌가 발달하여 돌로 성을 쌓고, 돌다리, 돌가루와 모래를 섞어 집을 짓고 살았다. 큰 돌, 작은 돌, 둥근 돌, 뾰족한 돌 모두 개성이 다르다.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약돌을 갈고 닦아 색깔을 입혀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기도 한다. 산, 들에 널린 돌들은 거칠고 뾰족하지만 물을 만난 돌들은 모서리가 깎여 동글납작 부드러웠다. 조약돌이 되기까지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치며 물속에서 얼마나 부서지고 굴렀을까. 인간사도 이 조약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둘이서 한 몸이 되어 거친 세파를 구르며 달려왔다.

사람의 마음은 참 신비롭다. 그새 툴툴거렸던 일을 다 잊었다. 서울에 두고 온 내 반쪽의 조약돌이 그립다. 친정에 와 있어도 남편 걱정이 앞선다. 동생 내외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내 집만은 못했다. 밤새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짐을 싸서 내일 당장 서울로 올라가리. 조약돌로 살아가는 비법을 배웠다. 남은 인생을 남편과 찰그랑찰그랑 노래를 부르며 굴러보리라.


작가의 이전글 할아버지의 군고구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