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졌다. 남편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온 세상 축복이 내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칠 남매가 살아가는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반복되는 일상뿐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 찾아올 신혼을 꿈꾸었다. 사랑의 결실로 자식남매가 태어났다. 아이들 장래를 위해 서울로 이사를 했다. 금이 쩍쩍 갈라진 벽 틈으로 별빛이 굴곡지게 들어왔다. 겨울밤 30촉 불빛으로 시린 가슴을 데우며 연탄재 위에 쌓인 함박눈이 쌀밥처럼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이런 시간을 뒤로하고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은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몇 년이 지나자 아늑한 판잣집이 점점 비좁아졌다. 은행 대출을 받아 방 하나 부엌 딸린 열 평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생에 첫 내 집 장만은 생각만 해도 설레었다. 새로 이사를 왔다고 시루떡을 접시에 담아 이웃들에게 돌렸다. 작은 나눔을 통해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거렸다. 가구와 앉은뱅이책상, 알록달록한 꽃무늬 접이식 비닐 장롱도 샀다. 부엌살림 1호는 전기밥솥이었다. 베란다 화분에 꽃씨를 뿌렸다. 수만 평의 땅을 산 기분으로 봄을 맞이했다. 온 집안이 환하게 빛났다. 아이들과 어깨를 맞대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행복한 단잠으로 이어졌다. 훗날 큰 아파트로 이사하면 공부방 하나씩 준다는 엄마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밥을 먹고 등교를 했다.
20년이 흘렀다. 아이들은 긴 세월을 공부방 하나에 희망을 두었다. 그러나 각자 방에서 한번 살아 보지도 못하고 둥지를 떠나갔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있어도 자식들이 떠난 자리는 적적했다. 오히려 판자촌이 그리웠다. 느닷없이 찾아온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느라 외출을 삼가니 남편과 나는 이마를 맞대고 바라보고 있다. 출가한 자식들이 가끔 와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는다. 나도 움직임 없어 살이 찌니 체중이 늘어가서 관절염이 오고 발뒤꿈치가 갈라졌다. 집도 오래되니 문틈이 입을 벌리고 나를 교체해 달라는 한숨이 꽂혔다. 허물어지는 집과 시들어가는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젊은 시절에 한 번 입고 장롱에 잠자던 분홍빛 원피스를 입으니 치맛단이 투둑 터진다. 거울에 비친 몸은 나잇살이 붙어 옷 주인도 몰라보았다. 언젠가 뿌려 놓은 꽃씨가 봄바람에 날아왔다.
창밖에는 봄이 왔다. 자연은 고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따뜻한 햇살에 벚나무가 꽃망울을 화사하게 부풀린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여기저기서 쑤시고 삐꺽거리며 신호를 보내왔다. 남들보다 특별하게 이루어 놓은 것도 없는데 얼굴은 부석하고 머리에는 은빛이 내려앉았다. 언제부터 빈 둥지를 지키는 늙은이가 되어 봄볕에 까무룩 졸음이 쏟아진다. 이 허탈한 아쉬움을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 몸이 사위어 가는 과정으로 늙으니 분비물에서 냄새가 나듯이 집안 냄새도 퀴퀴하였다. 누가 인생은 소금보다 짜다고 했던가. 한창때는 대충 간을 맞추어도 음식이 다 맛이 있었다. 요즘은 후각 미각이 둔해서 좋은 재료로 반찬을 해도 제맛을 내지 못하고 짜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집이 고물상 같다. 온갖 잡동사니가 방마다 가득하고, 책장에는 책이 넘쳐나고, 부엌에는 쓰지 않는 그릇들이 쌓였다. 어느 결혼식에서 받은 그릇과 냄비에 붙은 상표가 웃는다. 손에 움켜쥐고 있던 것을 비우고 새로운 주인을 만나도록 현관 밖에 내어놓았다. 남편과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방과 거실의 창틀에 쌓인 먼지를 물걸레로 깨끗하게 닦아내었다. 헌 집은 노력한 만큼 빛이 나지 않았다. 나는 구시렁거리며 남편에게 입말을 달았다.
“이참에 황혼의 신혼집을 꾸미면 어떨까요?”
남편이 손에 쥐고 있던 걸레를 툭, 던져버렸다.
“내일모레 저승 갈 밥상을 받아놓고서 무슨 신혼 타령이야.”
“둘이 살면 신혼이지, 신혼이 별건가요.”
그날부터 소파에서, 밥을 먹으며 주억거렸다.
“방과 거실은 도배, 바닥은 대리석, 베란다 페인트칠….”
남편은 못 들은 척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옆으로 가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의 소원을 못 풀어 줄 게 뭐 있소.”
평생 벽창호 같던 마음이 열리려나.
“당신 말대로 신혼집을 꾸며 봐.”
그 말이 대답이었다. 비용을 계산해보다가 우리 형편에 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남편 표정이 밝았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당신 명의로 대출받으면 어떨까요? 몇 년 걸려 값을 수 있는 걸로요.” 남편이 무릎을 ‘탁’ 쳤다. “그럼 그렇지. 내 주머니를 털겠다는 거군.” 전자계산기를 휙 가로챘다. 톡톡 두드리며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남편의 얼굴에 사계절이 휙휙 지나갔다. 잰걸음으로 아파트 상가 김 사장님에게 집수리를 부탁했더니 줄자를 들고 왔다. 기초 임금, 재룟값을 뽑다가 천장을 쳐다보며 입맛만 다셨다. 또, 한번 히든카드를 썼다.
“둘이 사는 집인데 노년에 보너스 주는 셈 칩시다.”
남편이 히죽히죽 웃으며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이튿날 아침, 기술자 7명이 사다리와 헬멧을 쓰고 왔다. 나는 일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쫓겨났다가 밤에 들어왔다. 집이 전설의 고향처럼 어수선했다. 모든 가구에 비닐을 씌우고 소품들은 신문지로 싸서 한쪽으로 옮겨 놓았다. 베란다에는 인부들 작업복이 걸렸고 페인트통과 긴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어둡고 칙칙하던 집안 분위기가 화사하게 변해갔다. 보름이 지나자 밝은 미색으로 갈아입은 티가 났다. 베란다 블라인드를 교체하니 거실이 환했다. 거실 유리창에 처음 보는 낯선 백발 부부가 비치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당신, 눈을 감아 봐. 조금 후에 눈 떠.”
“짜잔!”
탁자 위에는 45년 전, 총각·처녀가 사진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천둥·번개가 치지 않았는데, 눈에서 주루룩 소나기가 내렸다. 젊은 시절 서로 잘 났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시계는 서산 붉은 노을에 걸려 있다. 집에 벌어진 틈은 석고로 메우고, 울퉁불퉁한 모서리는 대패로 매끈하게 밀었다. 서로 불신의 먼지는 털어내고 퍼런 곰팡이는 페인트로 덧칠을 했다. 얼굴에 가득한 빗금의 발자국, 눈도 코도 닮은 남매 같았다. 코로나로 더 추운 겨울을 맞이한 이웃들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어느 육십 대의 사랑 노래가 참 듣기가 좋았다. 육십 대 노부부는 명함도 못 내민다. 이제는 칠십이 되어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었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막걸리 한 병을 양손에 들고 찰랑찰랑 흔들었다.
“신랑이 황혼의 신혼집에 불을 켰도다!”
저만치 기억 속의 차가운 밤하늘이 떠오른다. 그때는 별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잠이 들곤 하였다. 오두막집에서 30촉 불빛에 시린 가슴을 데웠던 그날이 되살아났다. 딸과 아들이 밥상을 펴놓고 공부를 할 때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공부방 하나씩 마련해 준다고 했었다. 그 희망의 별 하나를 바라보며 밥을 먹고 학교에 다녔던 자식들에게 오늘 밤은 왠지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