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만발한 4월이다. 남편의 칠순을 맞이하여 여행계획을 세웠다. 남편은 내가 부산을 떨자 속으로는 좋으면서 표정은 시큰둥했다. 여행은 무슨, 공연한 짓을 한다며 핀잔을 주었다. 핸드폰 메모지에 여행지를 찾아 적어가며 계획을 세웠다.
“당신이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을 말해 주세요.”
남편은 묵묵부답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빠듯한 형편에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루 벌어 자식들을 키우느라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여보, 둘만의 여행을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남편은 반복되는 내 말에도 먼 산만 바라보았다. 다리연골수술을 한 후 그이는 장시간 앉아 있기가 힘들어 외국여행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가까운 국내로 결정하였다. 여행지에서만은 그늘진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밖에서 아옹다옹하면 남들 보기에 볼썽사나운 일이니까. 밑바닥에 가라앉은 앙금을 걸러내고 부드럽게 소통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밤에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초등학교 때 경주불국사에 갔던 시간이 스르르 달려왔다.
신경주행 KTX 표 두 장을 예매했다. 머리에 은발이 내렸지만, 초등학생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배낭 두 개에 각자 소지품을 넣고 집에서 일찍 출발했다. 서울역에는 벚꽃 철이라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우리는 그 틈에 경주행 기차를 탔다. 창밖에는 누렇게 변한 목련 잎이 바람에 날렸다. 벚나무들이 꽃잎 가지를 흔들며 꽃비를 뿌려주었다. 신혼여행 가는 길 같아 속으로는 은근히 설렘을 꾹 눌러 삼켰다.
기차를 타면 군것질 생각이 났다. 그때처럼 “오징어 땅콩 사세요.”라는 소리는 기차에서 사라졌다. 남편과 나는 어린이처럼 마음이 들떴다. 챙겨간 간식과 과일을 남편에게 내밀었다. 그는 좋으면서도 그렇다고 표현을 할 줄 몰랐다. 우리는 이럴 때 보면 영락 없는 닭살 부부가 맞다. 평생 불통인 줄 알았는데 눈빛만 보아도 의사소통이 잘 되었다. 서로의 생각이 현미경처럼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창밖으로 스치는 들녘에는 파란 보리 싹이 쏙쏙 내밀었다. 둘이서 손을 잡고 잠시 눈을 붙였는데 신경주역에 도착했다.
불국사로 가는 700번 좌석버스를 탔다. 보문사를 지나자 가로수 벚꽃이 만발했다.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봄에는 경주 전체가 벚꽃세상이 되었다. 주차장에는 관광차들이 빽빽하게 진을 쳤다. 신라의 찬란했던 천년, 불국사와 석굴암은 누구나 한 번쯤 가보았을 것이다. 유적지로 향하는 길목에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70대 할머니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꽃단장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점심으로 맛있는 떡갈비를 먹었다.
벚꽃에 안긴 불국사였다. 천 년 동안 묵묵히 만인의 염원을 품고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숙소를 정하지 못해 조용한 곳을 찾아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 경주시 황오동 모텔로 들어갔다. 열쇠를 받아 3층으로 올라갔다. 근간에 모텔 문을 열어본 적이 없어 불도 켜지 못했다. “저기요. 3층에 전깃불이 안 들어와요. 불 좀 켜주세요.” 아래층에서 킥킥 소리가 들리더니 굵은 남자 목소리로 “전깃불을 켜시려면 열쇠를 방 옆에 끼우세요.”라고 했다. 어두운 현관에서 웃음을 꾹 참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시장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경주의 별미는 어떤 음식이 있을까. 그러다가 불고기와 소주를 시켰다. 나는 술 주량이 약해 소주 한 잔을 마시니 아리하게 올랐다. 젊은 시절 참 많이도 아웅다웅했고, 어두운 터널도 지났고, 배가 태풍을 만나 표류했던 생각도 났다. 주신酒神이 우리의 마음을 봄 눈 녹듯이 사르르 녹여주었다. 내가 먼저 상냥하게 말을 붙였다. “여보, 당신, 고생 많이 했어요. 여기까지 참 잘 왔잖아요. 모두 당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불국사의 밤은 차갑지만 밀쳐두었던 따뜻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하얀 벚꽃 꽃잎처럼 불국사의 밤을 환하게 밝혔다. 나는 잠자리가 바뀌어 뒤척거리는데 남편은 금방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잠이 들었다.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다. 잠이 오지 않아 가방에 준비해간 메모지에 편지를 썼다.
여보, 당신의 칠순을 축하드려요. 평생 융통성 없는 저랑 살면서 많이 힘드셨죠? 지금도 생각나요. 신혼 때 한복 저고리 동정을 못 달아서 안절부절못하면, 당신이 찡긋, 애꾸눈을 하며 세탁소로 총알같이 달려가 동정을 달아 왔지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상장을 타왔을 때 함께 기뻐했던 일도 생각나요. 큰딸 졸업식에서 양복에 넥타이도 매지 않고 ‘김치’ 하며 어설프게 웃었고, 아들이 신부님이 되어 신품성사 받고 출가할 땐 종합운동장에서 눈물을 흘렸잖아요. 또 지방에 출장 갔다 오면서 연분홍 장미꽃 백 송이를 선물로 주었지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 참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때가 그립습니다.
당신이 아프리카 야생마처럼 날뛸 적에 시아버지께서 실낱 같은 명줄을 붙잡고 “넷째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라고 하셨지요. 며칠 후 시아버지의 초상을 치렀고, 새로운 결심으로 당신은 머리를 박박 깎았지요. 저는 그 용기와 결단에 박수를 보냈어요. 방송대학교 스터디그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