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싶으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갔다. 올봄에는 화단에 심어 놓은 벚나무, 목련나무, 소나무, 개나리가 탐스럽게 꽃을 피웠다. 저층에 사는 덤이라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맘때면 밖을 나돌아 다녔다. 코로나19는 나의 취미도 바꾸어 놓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자를 치고 영감을 불러내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일상을 잃어버렸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언제 끝날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 일상이 되었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집안에서 뱅뱅 돌며 살아간다. 오라는 사람도 갈 곳도 없어 컴퓨터 자판 위에 양손을 올려놓았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머리를 굴려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옥동자를 키우기 위해 탁탁탁탁. 한 단어를 써 놓고 들여다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커서를 뒤로 스멀스멀 밀어냈다. 창밖에는 여름 태풍이 드럼을 치듯 두드렸다. 경쾌한 워드 장단에 맞추어 누리, 바비, 하이 선과 태풍 이삭이 전국을 휩쓸고 갔다. 핸드폰 화면에 뜨는 뉴스는 불청객이 할퀴고 간 자리에 농민들의 고통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처음 몇 달은 집에 있기가 답답했다. 이제 적응이 되는 것일까. 삼시 세끼 밥만 먹기가 식상해서 메뉴도 바꿨다. 아침은 샌드위치, 점심은 야채 비빔밥, 저녁은 국수나 만두를 먹었다. 오늘 저녁은 떡국을 끓이기로 했다. 거실과 부엌을 오가며 서산으로 미끄러지는 노을을 보았다. 그도 나를 보고 발그레 웃었다.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소녀처럼 탄성을 질렀다. 가스 불에 올려놓은 떡국 물이 펄펄 넘치는 것도 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여유로움을 통해 들소 떼처럼 질주했던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훅훅 찌는 더위에도 그 자리에 앉아 글을 썼다. 평소에는 사계절이 언제 지나갔는지 느끼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올봄에 꽃이 피는 것을 보았고, 여름의 지긋한 장맛비에 이글거리던 무더위도 시원하게 식혔다. 나무들이 변해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잎들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소리도 들었다. 이게 웬일일까. 한여름에 벚나무에 벌레가 새까맣게 들끓었다. 뽕잎을 갉아 먹는 누에처럼 잎을 다 먹었다. 경비 아저씨한테 벌레 죽이는 약을 빨리 쳐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한 달 장마가 오락가락하는 동안 약을 치러 왔다가 돌아갔다는 대답뿐이었다. 내가 약을 사 와서 쳐 볼까 하다가 나무에 올라갈 수 없어서 마음을 돌렸다. 어쩔 수 없이 체념을 한 사이에 잎들은 벌레들의 배를 빵빵하게 불려주고 사라졌다.
매미가 떠난 자리에는 귀뚜라미가 노래를 불렀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벚나무 가지에 하얀 꽃잎이 날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빈 가지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생전 처음 본 풍경처럼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니 답답한 울증이 확 사라졌다. 사방이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아름드리 벚나무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매달아 놓은 듯 거실을 환하게 비추었다. 카메라로 동서남북 각도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다. 혼자 보기가 아까워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보내주었지만, 봄에 찍어 놓은 것이 아니냐며 아무도 믿지 않았다. 달빛을 받은 꽃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동심으로 돌아가는 마법에 걸렸다. 살아온 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다. 서 말의 구슬을 꿰듯, 흩어진 조각들을 그러모아 옥동자를 키워가는 시도를 하였다. 머리와 눈, 손이 한 팀이 되어 자판기를 두드렸다. 깊은 산중 옹달샘에서 맑은 물을 퍼 올리는 심정이었다.
좋은 문장을 발견하는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진솔하고 간결하게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나만의 고유한 문체로 글을 쓰고 다듬어 가는 일은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곰삭아 발효되어 구수한 향기를 풍겨야 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 텐데…. 가끔 번개처럼 한 문장씩 떠올랐다가 사라져 버리기를 반복하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 삭제시켰던 과거의 시간을 다시 복원시키는 일은 또 다른 나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내 몸을 발가벗기는 심정이었다. 글을 쓰면서 힘들고 받아드리지 못했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재해석을 하였다. 인생에 풀리지 않고 얼기설기 맺힌 매듭들이 모두 풀렸고 마음의 치유도 일어나는 일석이조였다고나 할까. 현재와 과거로 시공을 넘나드는 동안 머리와 손이 따로 놀았다. 한 달, 두 달, 석 달, 넉 달, 다섯 달…. 마비된 온몸이 아우성쳤고 눈도 콕콕 쑤셨다. 그런 사투를 벌이는 동안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찬바람에 무릎이 시리고 나목가지들도 흔들거렸다. 벚꽃이 진 자리에 파란 옥동자가 열렸다. 가을인데 봄으로 착각이라도 한 걸까. 새들이 열매를 따 먹으러 떼 지어 몰려들었다. 생물들의 주고받는 조화로움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거리를 두고 지낸다. 하지만 무심한 자연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며 계절을 바꾸고 있다.
칠십이다. 내 인생의 발자취도 이쯤 하나의 열매로 맺어 놓을 수 있다면 살아 온 보람이 되지 않을까. 눈과 손끝이 아리도록 탁탁 두드리며 키워 온 나의 옥동자를 낳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