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햇볕이 분수처럼 꽂힌다. 서제에 있는 책 표지를 휙 훑어 어보다가 그만두었다. 이참에 버스를 타고 남산 도서관으로 가기로 마음을 돌렸다 창문으로 남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무들이 우거진 풍경이 푸르게 넘실거린다. 일찍 와서 책상이 군데군데 비어 있다. 청년들 옆에 비집고 자리를 잡았다. 책장을 몇 장 펼쳤다. 그런데 저기 한쪽 모서리에서 누가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일까, 고개를 갸우뚱 하며 귀를 열어 놓았다.
내 신경이 자꾸만 그쪽으로 쓰여서 상황을 주시했다. 머리가 치렁치렁 어깨까지 덮인 30대 아기씨였다. 한순간 도서관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딸자식을 키워 본 엄마 마음이 쿵쾅거린다. 가까이 가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녀의 옆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무슨 말부터 걸어야 할지 난감했다. 후주 머니에 있던 사탕 두 개를 꺼내서 책상 위에 놓았다. “아가씨 사탕 하나 먹어 볼래요.” 무안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예쁜 얼굴에 수심이 가득히 찼다. 울긋불긋한 포ㅡ정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고 부끄러운지 숙였다. 손수건을 꺼내 주니 받아서 눈물을 닦는다.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하게 두 줄로 나있었다. 조심스럽게 빨간 사탕 포장을 벗기고 “자, 사탕 드세요.” 그녀는 수줍게 두 손으로 받아 입에 넣었다. 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왜, 울었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무슨 사연인지 말해 보세요.”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엄마하고 대판 싸우고 집 나왔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집이 어디예요. 논현동에 살고 있는데 속이 답답해서 버스를 타고 마음이 가는 데로 왔다는 말을 했다. 처음 본 나한테 집안 사정과 가족들 이야기며 굳게 닿여 있던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2남 2녀 막내딸로 태어났어 났으며. 그녀의 오빠들은 중, 고등학교에 올라가도 공부를 못했단다. 아버지보다 엄마가 자식들에 대한 기대가 높아 학원을 몇 군대씩 보냈으나 번번이 실망을 시켰다고 한다. 다행히 그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영어 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후로 엄마는 똑똑한 딸 하나가 열 아들 부럽지 않다며 동네방네 자랑했다고 한다.
80년대 우리나라는 조기유학 바람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녀가 3학년 때 엄마가 주선해 주는 대로 학원 친구들과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어린 마음에 부푼 꿈을 안고 호주에 도착했다. 막상 외국생활에 기본인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배운 영어 실력은 첫 번째로 언어 장벽에 부딪혔다.
그나마 문법은 조금 알지만 스피치가 되지 않았다. 얼마 못가 학교 성적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린 자신이 미래를 판단할 능력은 없었다. 눈만 뜨면 말을 못 해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외국 선생님을 만나면 두려움에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아 불통의 무게감으로 짓눌렸다. 조기 유학을 보내준 엄마를 실망을 시키고 싶지 않아 꾹 참고 견뎠단다. 친구들은 일 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혼자만 남았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적응할 수 없다고 말을 해도 야단만 맞았다. 전화기 구멍 속에서 화난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얘, 너는 실력 있고 똑똑하잖아. 박사의 꿈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한숨을 길게 쉰 후, 엄마에 대한 분노로 감정 조절이 안 되는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꼈다. 오랜 세월 쌓였던 설음을 나에게 봇물처럼 쏟아냈다. 무슨 말로 그녀를 위로해 주어야 할지 몰랗다. 다만 고개만 끄떡, 끄떡해 줄 뿐 딱히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독서하든 학생들이 우리 쪽으로 힐긋 돌아보았다. 슬픔이 전염되었는지 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괜찮아. 힘내세요.
벌써 2시간이 넘었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 배꼽시계가 울렸다. 그녀를 혼자 두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실핏줄이 팽창한 눈을 손등으로 쓱, 닦으며 황당한 말을 했다. “지금 죽고 싶어요.” 어머, 깜짝이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캄캄한 바다에서 배가 풍령을 만나 쾅, 침몰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도 삶과 죽음이 넘실거렸다. 아가 씨 “무슨 소리요.” 속으로 큰일 났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거렸다. 그녀는 자기가 외국에서 살아 낸 이야기를 처절한 심정으로 말을 했다. 자기 반에서 뒤 처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고 ,. 그런 노력 덕분에 호주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고 펄쩍펄쩍 뛰었다고 한다.
드디어, 20년 만에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불빛이 환하게 타오르는 듯 설레었다. 부모님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동네 방내 떠들며 우리 딸이 박사가 되었다. 우리 집에도 좋은 사위를 들일 경사가 겹쳤다고 들떠 있었다. 유명 대학교수로 취직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엄마 친구들에게 소문을 냈다. 그녀는 이튿날부터 이력서를 수 십 통씩 써서 대학마다 넣고 또 넣었지만, 불러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현실의 높은 벽에 탁 부딪히고 말았다. 한국사회는 인맥, 지연, 학연이 받혀 주어야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3학년 때 한국을 떠났다가 서른 살이 넘어 돌아오니 마음을 나눌 또래 친구 한 명도 없는 서울의 거리는 찬바람만 불었다, 이게 어쩌지 된 일인지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던 오빠와 자매는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영재라고, 똑똑한 딸이 가문의 영광이라며 자랑할 때는 언제고 상황이 반전되고 말았다고 했다.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혼자만 불행하다고 느껴진 고고 볼맨 소리를 했다.
영어 강사로 취직을 했지만 유명 학원일수록 원어민 영어 강사를 선호했고, 학생들도 핸드폰으로 강의를 녹음해서 선생님을 바꿔 달라는 항의가 빗발치면 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상가상으로 친구가 방 값을 뽑아 도망을 가버렸다. 할 수 없이 엄마 집에 얹혀살고 있으니 돈을 쳐들려 집안 말아먹었다고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했다. 강사 십 년 만에 성대결절로 취직도 어렵다는 말을 나직하게 했다. 괜찮아. 힘내세요.
우리나라가 굶주리던 시대는 지났다. 그런데도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제일 낮은 이유와, 자살률 1위는 불명예스럽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이 세상은 서로서로 연대하며 함께 행복하게 살라고 신이 준 축복이다. 요즘 신문을 보면 얼굴이 뜨겁다. 사회 지식인들이 철면피를 쓰고 문어발처럼 학연, 지연을 끌어당겨 허위 스펙을 쌓아 자기 자식만 출세하면 된다는 것일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의 병폐였던 무분별한 조기유학의 및 낯을 보는 듯 씁쓸했다. 그녀가 간신이 미소를 지으며 배도 많이 고프고 속도 후련하다고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오랜 친구처럼 손을 잡고 구내식당으로 갔다.
남들이 보면 사이좋은 모녀로 착각할 듯했다. 그녀는 오므라이스, 나는 돈가스를 먹고 차도 마셨다. 하느님께 내가 열심히 기도 할게. 앞으로 긍정적으로 살라고 가슴을 맞대고 꼭, 안아 주었다. 남산 정거장에 402번 버스에 울라 탔다.. 창밖으로 내민 그녀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하게 빛났다. 나는 친정에 왔다가 돌아가는 딸을 보내는 측은한 심정으로 양팔을 높이 올려 예쁜 하트를 만들어 보여주고떠나보냈다. 괜찮아. 힘내세요.
그리고 몇 칠 후 반가운 소식이 왔다. 회사에 취업이 되어 기쁘다며..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라며 울 먹이던 말이 잊히지 않고 귓가를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