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같은 사랑

by 최점순

맷돌 같은 사랑

최 점 순


시골집 정원에 맷돌 한 쌍이 다정한 친구처럼 놓여 있다. 집주인의 고매한 인품을 느끼는 순간이다. 곡물을 갈았던 윗돌과 아랫돌의 사이에 파란 이끼가 퍼져 있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아래짝이 위짝을 품고 있다. 사랑과 인생도 맷돌처럼 돌고 도는 건가.

움푹한 윗구멍에 곡물을 넣고 돌리던 암맷돌. 그 아래에서 묵묵히 받쳐주던 숫맷돌. 어처구니는 언제 빠졌는지 곡물을 넣던 구멍과 위아래 면에 빛바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맨살을 맞대고 얼마나 돌고 돌았기에 거친 부분이 모두 깎여나가고 거울처럼 매끈할까. 돌 두 개가 한 쌍이 되려고 부딪히며 견뎌낸 시간 속에서 곡물을 갈아 가족의 허기를 채워주었으리라. 어쩌면 인생의 질곡을 함께 건너온 노부부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부부의 삶도 맷돌을 돌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서로의 모난 부분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데 때로는 티격태격하고 서로 부딪힌다. 젊은 시절에는 서로 다른 세계관으로 밀고 당기지만, 상대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평화로울 수도 까칠하게 살 수도 있다. 사랑에 눈이 멀었던 신혼 시절엔 상대방이 백마를 탄 가장 멋진 왕자, 아름다운 공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보니 드러나는 겉모습보다 성적인 어울림과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맷돌은 어떤 세월을 품고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화산이 폭발할 때 화강암 조각이 굴러다니다가 우연히 짝이 되었나. 옛날 어느 석공이 뾰족하던 돌을 깎고 다듬었을 거다. 그 후 거친 곡물을 갈면서 둘은 조화를 이루며 돌고 돌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 식구가 많았던 집 부엌에서 쉼 없이 돌아가며 서로의 몸을 달구고 깎여나가는 고통을 견뎠으리라. 맷돌이 제 살 깎아내는 고통처럼 인생의 온갖 풍파를 함께 극복하면서 살아왔던 부부도 비슷하지 않을까.

맷돌의 울퉁불퉁한 표면에서 곡물이 갈린다. 윗돌 구멍 귀퉁이에 끼운 어처구니를 잡고 돌려야 하는데 곡물을 잘 갈려면 물을 조금씩 부어야 부드럽게 돌아간다. 부뚜막에서 혼자 돌릴 수 있지만, 두 사람이 어처구니를 잡고 물에 불린 콩이나 녹두, 쌀가루를 갈 때 호흡이 맞아야 튀지 않고 둥근 홈을 따라 통에 고인다. 부부의 삶도 호흡을 맞춰야 평화가 깃든다. 그러나 허물을 서로 감싸주지 않으면, 한쪽으로 힘이 쏠려 자식들이 엇나갈 수도 있다.

시골에서 어머니에게 두부 만드는 비법을 전수하였다. 하룻밤 물에 불린 콩을 갈아 자루에 붓고 콩물을 짜냈다. 가마솥에 콩물을 붓고 장작불을 지펴 끓였다. 몽글몽글 거품이 끓어오르면 간수를 한 바가지 둘러 가라앉혔다. 삼베 자루에 뜨거운 콩물을 퍼 담아 네모난 나무틀에 넣고 맷돌로 눌러놓으면 단단한 두부가 되었다. 구수한 냄새는 바람을 타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웃과 함께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 둘러앉아 두부를 나누어 먹으며 두부처럼 부드러운 인정을 쌓았다.

콩 농사를 많이 한 집에서는 두부를 자주 만들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나누며 완성된 두부에 양념간장을 뿌려 한 조각씩 나눠 먹는 동안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무엇보다 떠돌이 새우젓 장사나,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걸인도 그날만큼은 허기진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그 모든 과정에는 두부처럼 말랑말랑한 어머니들의 정성이 스며들었다. 비록 전통방식은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는 돌고 돌았던 인정이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위아래 돌이 한 쌍의 맷돌이 되기까지 세월이 흘렀다. 이산 저산 구르던 돌도 유구한 시간 속에 같은 땅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은 기적에 가깝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참고 견디는 과정이 필요했을 거다. 하물며 세계관이 다른 남녀가 인연을 맺고 백년해로하기란 빗방울이 바위를 깎아낼 만큼 긴 세월이 흘러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와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짝의 손을 놓으면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다.

오랜 세월 주인을 위해 돌고 달았던 맷돌, 하지만 위짝의 어처구니가 썩어서 빠져버리면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러면 둥근 나무에 헝겊을 두르거나 나무를 납작하게 깎아 끼운 다음 사용했다. 그렇게 어처구니를 돌렸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끝에서 곡물을 갈아 가족의 허기를 달래며 삶을 일구었다.

우연히 시골집 정원에 놓인 맷돌을 만나자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이 설렌다. 세월의 결이 켜켜이 쌓여 있고 표면이 거울처럼 반들 해서 내 모습이 비칠 것 같다.

이 집 맷돌의 새로운 변신인가. 곡물을 갈던 오목한 면에 꽃씨가 날아들어 향기로 사람과 소통한다. 주인의 정서가 깃든 맷돌을 보다가 우리 부부도 서로의 모난 부분을 깎아내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살아오면서 서로를 믿어주며 닳아왔기에 연 두부처럼 말랑한 사이가 되었다. 이제 돌고 돌았던 삶의 맷돌에 사랑의 향기를 가득 실으련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더 멀리 달려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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