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개성지
신앙의 보양식/ 최 점순
아침신문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리나라도 휴전 중이라지만 언제 전쟁이 터질지 아무도 모르는 긴장 상태다. 그동안 방역당국이 방역을 잘해왔지만 밀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의사, 간호사들도 지칠 것 같다. 반복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자영업자들이 위기에 내몰렸다는 소식에 안타깝기만 하다. 국민 70%가 예방접종 2, 3차를 맞았지만 아직도 학생들은 줌 수업을 받고, 종교인들은 비대면 방송 미사나 예배를 드린다. 직장인들은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명절에도 가족끼리 밥 한 끼를 못 먹는다.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니 신앙생활도 자유롭지 못했다. 나의 물러진 마음을 새롭게 바로 세우기 위해 영적보양식을 찾아 나섰다.
서소문 밖 네거리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과 유학이 사회질서를 잡고 있었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회는 충, 효도 모르는 사학죄인들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신자들을 잡아다가 능지처참을 하거나 머리를 베어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 전시를 했다. 이곳에는 신유박해 때 한국순교 성인 44위의 현양 탑이 세워져 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가족이 순교한 장소이기도 했다. 부친 정약종과 형 정철상, 모친인 유소사, 누이 정정해 등, 이곳에서 순교를 당했을 때 아들인 정하상은 6살이었다고 한다. 한 집안에 다섯 명의 식구가 38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를 두고 순교로 목숨을 잃었다. 현양 탑 밑에서 가슴이 먹먹했다. 나의 믿음의 씨앗은 가시넝쿨에 떨어졌을까. 성경책을 옆에 끼고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나태해진 마음을 들여다보며 성찰을 한 후 가까운 성지로 발길을 돌렸다.
당고개 순교성지. 1839년 기해박해 때, 12월 28, 29일 이틀 동안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한 현장이다. 아홉 분은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한 번의 배교로 이성례 마리아는 교황청의 심사 결과 성인 반열에서 탈락되었다. 남편 최경환(프란치스코), 아들은 최양업 토마 신부이다. 그녀는 기해년에 체포되어, 옥에서 죽어가는 자식 때문에 흔들려 배교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맏아들 최양업 토마를 외국으로 유학을 보낸 일이 들통이 나서 다시 체포되었을 때는 용감하게 순교를 했다. 자식을 위해 배교하고, 자식을 위해 순교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자식들이 동냥한 돈을 휘광이를 주고 어머니를 아프지 않게 단칼에 잘라 하늘나라로 가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청탁했다고 한다. 순교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을 수 있는 신앙의 보양식을 수혈 받고 돌아간다.
새남터 성지, 을묘 박해로 1795년 6월경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 한국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외방전교회 프랑스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사스 땡 신부 외, 많은 성직자들이 이곳 백사장에서 군무 효수형을 받고 순교를 했다. 특히 김대건 신부의 목을 자르기 위해 무딘 칼로 내리쳤고 여덟 번 만에 목이 잘려 모래 위에 뒹굴며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선조들을 생각하니 살아온 날들이 부끄럽다.
절두산 성지로 갔다. 묵주를 들고 14처를 돌며 기도를 바쳤다. 15처 예수님 부활 흉상 손바닥에는 둥글고 깊은 상흔이 푹 파졌다. 그곳에 양손 붙이고 “예수님의 사랑의 손으로 가족과 내 주위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며 올린 나의 간절한 기도가 전달되기를 바랐다.
영성적으로 건조하던 내면이 촉촉해진다. 신앙의 보양식 덕분에 시멘트벽처럼 단단하게 굳어있던 마음의 밭을 다시 갈아엎었다. 좋은 토양이 되도록 물과 거름을 주고 다시 키워야 될 것 같다. 그래야 맑은 샘물이 샘솟지 않을까. 오늘 받은 은총의 비가 몸과 마음에 속속들이 스며들기를 바란다. 코로나로 칩거하느라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마음의 공간이 넓어진 듯하다. 순례를 통해 성찰을 하고 회개로 흘린 눈물이 내면을 씻어낸 것일까. 이곳에 방문하기까지 시들었던 온몸에 순교성인의 수혈을 받고 보니 생기가 솟는다.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들을 존중하며 살아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