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나무/ 최점순
아침부터 전기톱 소리가 요란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낯선 아저씨가 나무를 베고 있다. 순간 잘려나가는 나뭇가지들의 아픔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어느새 23년 전, 아파트가 준공되어 입주할 때 심어진 벚나무와 소나무가 숲처럼 우거졌다. 사시사철 주민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새들과 매미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내게도 코로나19로 비롯된 답답한 가슴에 울증을 달래주곤 했다. 하지만 저층에 사는 주민들은 울창한 나뭇잎들이 햇볕을 가린다고 해마다 민원을 넣어 뭉텅뭉텅 가지치기를 했다. 입주민의 한 사람으로써 말하고 싶어도 이웃 간에 마음 상할까 봐 속으로만 삭였다. 문득 벚나무들처럼 내 옆에서 비바람을 막아주었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야말로 저층 주민의 원망처럼 남편을 나의 틀에 맞추려고만 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군대에서 다친 상처가 수시로 재발되면 그때마다 내 얼굴에는 그늘이 서렸다.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한가. 축 처진 어깨를 일으켜 세우고 무거운 걸음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출근을 하였다. 회사에 가면 상사들이 짓누르고, 유능한 후배들에게 밀려날까 전전긍긍하였다. 퇴근해 오면 홀로 거실에 앉아 독한 소주와 벗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을 것이다.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남편을 기다리는 것은 궂은일뿐이었다. 몸으로 마음으로 또 얼마나 고단했을까. 가끔 술김에 “당신은 내가 놀고먹는 줄 알아?” 잘리는 나뭇가지처럼 굉음을 냈다. 진액이 다 빠진 몰골을 보고도 다독여 주지는 못 할망정 외면하곤 했다. 돌아보면 그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자식들을 건강하게 키워서 출가를 시킬 수 있었다. 곤고한 ‘현실’의 무게로 등이 굽고 처진 어깨와 관절 마디마디가 뒤틀려 옹이진 남편 나무의 깊은 마음을 나는 얼마나 이해했을까.
남편은 늘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운 후배들이 찾아와 하소연을 하면 밤이 늦도록 술친구가 되어주었다. 아침마다 속이 쓰리다며 해장국을 찾으면 남들처럼 일찌감치 퇴근해서 아이들과 놀아주지는 않으면서 허구한 날 밤을 새운다고 잔소리를 했다. 그랬던 날들이 언제인가. 인생의 계절은 빠르게 가을을 향하고 있다. 정원의 벚나무들이 신선한 공기를 선물하듯 남편은 늘 나를 감싸주는 따뜻한 후원자였다. 검은 머리가 은발이 되도록 내 옆에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그이가 아닌가. 하지만 가족보다 남들만 챙기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이 맞느냐고, 생일이나 기념일이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고개 숙인 그에게 톱질하듯 상처를 냈다. 그럴 때면 속도 없는지 싱겁게 웃으며, “조금만 참아봐, 이번 복권만 당첨되면 고생 끝이야.” 한다. 또 임기응변이나 둘러대며 요행을 바란다며 면박을 주었다.
부부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라고 신께서 짝지어 주지 않았을까. 매일 이마를 맞대고 살다 보니 좋은 점보다 단점이 더 잘 보였다. 자식들 출가시키고, 손주들까지 키워주고 나서 칠순 무렵에야 내 시간이 생겼다. 수필을 쓰면서 남편과 나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결혼을 했는데 상대방 탓만 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정한 잣대로 틀에 맞추라고 강요하기보다 상대방에게 맞춰 주려고 노력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생은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꽃 같은 시절은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수십 년 같은 공간에서 한솥밥을 먹고살다 보니 서로 너무 닮아 있다. 정원의 나무가 해마다 주민들에게 오감의 기쁨을 주던 때를 회상을 한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푸른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듯 신선한 맑은 산소를 공급해 주었다. 가을에는 알록달록 색동옷을 갈아입고, 나뭇가지마다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하얀 겨울이 되면 내 마음은 동심으로 출렁거렸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비탈 밭 몇 마지기를 지었지만 5남매의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형편이었다. 오빠와 남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자라면서 교육의 혜택이 돌아오지 않았다. 상급학교에 다니는 또래 친구들을 무척이나 부러웠다. 성장하면서 공부에 대한 열망은 컸고 결혼 후에도 용암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그런 나를 이해해 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딸과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방송 통신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때마침 동생이 모시고 살던 친정엄마가 구순에 치매에 걸렸다. 땅과 소를 팔아 공부시킨 아들들은 하나같이 사정이 있었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나를 낳아 키워준 엄마인데,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서울로 모시고 올라와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성당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영세를 시켜드렸다.
아침마다 중, 고등학생 자식들의 도시락을 몇 개씩 쌌다.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엄마가 드실 점심 밥상을 차려놓고 나도 시험공부를 하려고 도서실로 갔다. 그날따라 늦어서 허겁지겁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방에서 엄마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지친 몸으로 퇴근한 사위를 향한 외침이었다. “자네는, 자식들이나 공부시킬 일이지, 무엇 때문에 애 엄마까지 뒤늦게 학교를 보냈나?” 그 순간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응어리가 불쑥 올라와 온몸이 덜덜 떨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끌어 올라 한 바탕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 손을 모으고 기도로 간신히 눌렀다. 그때 남편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장모님, 노여워 마세요. 저는, 딸 하나를 더 키우는 셈 칩니다.”라며 껄껄 웃었다.
아, 그렇게 나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그이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내 곁을 지켜준 남편 나무 덕분에 공부를 마치고 글쓰기 공부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자식들에게 좋은 엄마로 자리매김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민원을 넣은 아랫집 주민처럼, 나도 남편에 대해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더 부각시키곤 했다. 늘 푸른 나무처럼 나를 사랑해 준 남편에게 불평하며 짜증냈던 지난 일들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족은 잘리고 몸통만 남은 나무가 하늘을 찌르듯 우뚝 서 있다. 잘린 가지의 상처 부위에서 진물을 줄줄 흘리며 신음을 한다. 무심한 아저씨들은 흩어진 가지들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노을빛 내린 나의 옆에서 비바람을 막아줄 사람은 그이뿐이었다. 오늘은 남편 나무에게 황홀한 고백을 해야겠다. “여보, 고마워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무가 사라진 자리에 작은 화단이라도 꾸며서 벌, 나비, 새들이 찾아오게 만들자. 남편과 둘이서 함께 가꾸는 우리들만의 마음의 정원도 서로가 푸른 나무가 되어 튼튼하게 가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