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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은 사랑이었다

by 최점순

봄이 오는 길목이다. 동장군이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뒷걸음을 친다. 혼자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결혼 50년 만에 캐리어를 끌고 버스를 탔다. 한적한 시골에서 며칠 동안 혼 밥을 해 먹고. 산책길을 걷다가 강가에 멈추었다. 혹한에 강에서 백로 부부가 흰 목을 길게 빼고 어름 위를 어슬렁거린다. 찬바람이 불면 둘이서 서로의 보온 막이 되어주기 위해 다정하게 몸을 의지하고 있다. 한쪽 발은 들고 다른 쪽은 살얼음판을 딛고 섰다. 나는 강 이쪽과 저쪽으로 연결해 놓은 돌 징검다리에 오독하니 앉아서 지켜보았다. 말 못 하는 짐승들도 혼자보다는 둘이 같이 있으니 보기가 좋다.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몰아쳤다.

자연은 태풍으로 강물이 불어나면 수위 조절하는데, 사람은 젊은 혈기에 서로 잘 난 척하느라 상대방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분노조절을 못하고 부딪쳤다. 그때마다 보따리 싸들고 집을 나서면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친정으로 가자니 부모님이 걱정할 것 같고 거리를 배회하다가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렸다. 내 마음에도 변화의 바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흘러간 50년을 돌아보니 아찔한 순간들이 수 없이 지나갔고 캄캄한 긴 터널을 지나왔다. 희망이라는 작은 불씨를 가슴에 품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일어섰던 일들이 스친다. 혼자서 책도 보고 명상도 즐겼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멋진 시도를 해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날씨가 추워요. 식사 꼭 챙겨 드시고, 외출하실 때는 따뜻한 목도리 두르세요. 일상적인 말을 한마디 해놓고 멋쩍은지 혼자서 픽 웃었다. 이렇게 쉬운 말을 자주 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왔을까. 황혼의 길목에서 철이 들어가는 것일까. 인생의 계급장처럼 얼굴에는 주름이 덮였고, 관절마다 나사가 풀려 마디마디가 제 멋대로 삐꺽거린다. 야속한 세월에 떠밀려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부모의 기대 이상으로 자식들은 잘 자라서 출가를 했다. 빈 둥지를 지키며 우리는 짝사랑을 한다.

첫날은 자유롭고 홀가분했다. 혼자서 여행 오기를 참 잘했다 싶었다. 스스로의 결단에 만족해하며 즐거운 시골길을 탐색에 들어갔다. 벼를 수확하고 난 빈 논에는 밑 둥만 삐죽하게 남아 있다. 지난여름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등에 업고, 짙푸르게 자라나서 낱알이 영글면 고개를 숙이고 태풍을 견뎌냈고, 감나무 꼭대기에는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빨간 홍시가 바람에 몸을 싣고 방울처럼 달랑거렸다. 나는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탐이 났다. 입에서는 연신 군침이 목젖을 통해 내래 가고 출출한 배에서 자갈 구르는 신호를 보내온다. 벼룩의 간을 빼먹으면 추운 겨울에 까치와 새들이 굶주리게 될 것인데, 감나무 가지로 길게 뻗었던 손을 내렸다. 논둑을 걸으며 생각하니 내 엽서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남편이 있으니 축복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본다. 어젯밤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 객지에서 문단속 잘하고 방을 따뜻해야 잠을 푹 잘 수 있어 몸도 풀리지.” 나는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까르르 웃었다. “아유, 닭살 돋네요.” “언제 올 거야?” “그 세 보고 싶나요?” 부드러운 한 마디에 훈훈한 봄바람이 불었다. “내 걱정하지 말고 푹 쉬다가 천천히 올라오시게. 라며 말끝이 흐렸다. 전화를 끊고 그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봄볕에 녹듯이 사르르 풀렸다. 평소 같으면 무슨 말만 하면 버럭 했던 남편이 늙어 가는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척박한 자갈밭에서 자식들과 가난을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둘이서 뒹굴다가 울퉁불퉁한 모서리가 다 깎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관심은 또 다른 사랑이라는 보물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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