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동안 차를 타고 다녔는데 5월에 도서관 주차장 공사를 해서 차를 놓을 수 없게 된 뒤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길로 해서 갔지만 샛길을 이용하면 오 분가량 단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샛길로 두어 번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동안 봐뒀던 하천 옆으로 가볼 참이다. 집에서 20분가량 쭉 걸어와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면 길게 흐르는 전주천이 나온다. 네비가 ‘천연기념물 출현지역입니다’라는 멘트를 하는 곳이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사람은 좀체 찾아볼 수 없고 자전거만 두어 대 빠르게 달려간다. 넓은 길 양옆으로는 갈대와 풀들이 지난 비에 한껏 키 자랑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길 따라 걷다가는 평화동까지 갈 기세다. 나의 목적지 삼천동에 가기 위해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돌다리가 놓여있네. 서둘러 돌 징검다리를 건너기 위해 아래로 내려와 도도히 흐르는 천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물살에 세어 선뜻 발을 떼어놓기가 쉽지 않았다. 반대편을 보니 양산을 쓴 여자가 이미 돌다리를 건너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돌다리 가운데서 만나지 않으려고 그녀가 건너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중간쯤 온 여자가 뭉그적거리고 서 있다. 기다리는 사람 생각을 해야지. 올라오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살펴보니 여자가 신발과 양말을 벗어든 채 돌다리를 조심조심 건너는 게 아닌가. 웬 시추에이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돌다리를 두 개쯤 건너가 보니 지난 주말 내내 쏟아진 폭우로 불어버린 물들이 요동치고 있는 게 보였다. 포효하듯 물소리도 요란하였다.
물에 신발이 빠질 것 같아 맨발로 다리를 건너고 있었구나. 이해가 되었다. 순간 어떡하지? 망설이며 둘러보니 이 지름길을 통하지 않으면 위쪽으로 난 길로 올라가서 위에 놓여있는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한참 멀다. 차려입은 하얀 바지며 아끼는 단화, 양말까지 벗고 물결을 헤치며 돌다리를 건너야 할지, 그냥 포기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서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예의 그 여자가 어느새 신발을 멀쩡히 신고 내 앞까지 도달했다.
“신발 신고는 못 건너요.”
숱이 적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 듯한 여자는 나보다 조금 연배로 보였다. 고단한 삶의 풍파에 맞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의 냄새가 난다.
“그냥 돌아서 갈까 고민 중이에요.”
여자가 나의 신발을 건너다보며 ‘그 신발로는 더더욱 힘들죠.’ 한다.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손수건을 안 가져왔으니 물에 젖은 발을 닦을 수 없어서요.”
갈등하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핑계를 댔지만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휴지로 닦으면 되죠.”
나는 꾸지람 듣는 아이처럼 거듭 변명을 하였다.
“휴지도 마침 없네요.”
들고 있는 양산에 힘을 주며 서 있는데 가만있어 봐요. 가방을 뒤적이더니 갈색 휴지를 건네준다. 부드러운 티슈도 아니고 두루마리 화장지 자른 것도 아닌, 음식점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는 네모난 갈색 휴지 서너 개를 쑥 내 앞으로 내민다.
여자와 나는 그렇게 서로 다른 돌을 딛고 만났다가 반대 방향으로 지나쳤다. 물살이 거친 돌멩이에 다다르니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많은 물이 돌 위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양말 넣은 신발을 왼손 손가락에 끼우고 어깨에 가방을 둘러맨 채로 오른손으로는 양산을 높이 쳐들고 조심스레 물속의 돌을 찾아 맨발을 내디뎠다. 생각보다 미끄럽지 않았다, 불쑥 들어온 발도 괘념치 않고 물길은 제 갈 길을 가느라 바쁘다. 간지러운 발에 어릴 적 추억이 올라온다.
시골 동네에서 신작로를 지나 한참을 가면 둑방 길이 나오고 그 밑에 냇물이 흐르는 모래사장이 있었다. 우리는 이곳을 대부라 불렀는데 그곳에서 노는 것이 어린 우리들의 로망이었다. 길도 멀고 물도 무서워서 절대로 혼자는 못 가지만 매년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이 함께 그 대부에서 음식을 해 먹는 기회가 절호의 찬스다. 어른들 눈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우리는 물놀이도 하고 모래 장난도 하며 놀았다. 냇가 가운데 부분은 움푹 파여 아이들의 키를 훌쩍 넘기 때문에 큰일 난다는 말씀에 따라 모래 주변 물가에서만 노는 데도 참 좋았다. 변변한 휴가나 여행 같은 것도 없던 때여서 집을 떠나 물과 모래가 주는 낯섦이 좋았던 듯하다. 햇빛을 받은 물살이 반짝이며 보석처럼 빛나던 여름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다리를 모두 건넌 여자가 그 자리에 서 있다. 용감하게 물살을 헤치고 간 사람치고는 의외다. 그녀도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겨 있는 것인가? 뜻밖의 상황에 놀라 망설이는 나와는 달리 씩씩하게 양말까지 벗고 도전하는 그녀는 어쩌면 거친 세상의 파도에 힘겨운 삶을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음식점에서 남은 휴지 하나도 잘 챙겨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지혜와 알뜰함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고달프고 힘겨운 삶을 헤쳐나가며 자식들을 위해 몸이 아픈 날도 두꺼운 눈꺼풀을 애써 뜨고 일을 하지 않았을까. 생면부지의 사람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 보면 오지랖도 넓은 것 같다.
정확한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다시 만난다 해도 알아보지도 못할 한 여인이 내게 지난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삶을 성찰할 기회도 덤으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