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지은 죄
아빠는 새엄마와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금세 여동생과 남동생이 생겼다. 할머니와 이모할아버지가 ‘엄마가 왔다’고 말했지만, 나는 솔직히 엄마 같지 않았다. 날 낳아준 엄마가 아니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무언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도 있었고, 잘해주시지만 뭔가 한끝이 불편했다. 그리고 억양이 심한 경상도 말씨는 해석이 불가능했다.
‘왜 잘못하지 않았는데, 계속 화를 내는 거지? 쌀밥은 알겠는데 살~밥은 뭐야?’ 새엄마의 말투와 목소리가 낯설었다.
어른들과 나는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진짜 엄마가 아닌 것을 알지만 말할 수 없는.. 침묵의 게임.. 이 게임판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알지만 모르는 척. 모르지만 아는 척. 나의 정체성에 대해 이때부터 고민한 것 같다.
방학 때는 내가 살고 있는 여주 대신에서, 아빠와 새엄마 동생들이 있는 마산으로 놀러 갔다. 여동생이라는 존재는 너무 소중했다. 나와 반쯤 닮은 외모에 귀여운 눈망울. 말도 어찌 그리 잘하는지. 이 아이와 내가 가족이라는 게 행복했다.
‘엄마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랑 50%는 닮은 거잖아.’
이때 나는 새로운 음식의 향연을 맛보게 된다. 새엄마는 종갓집의 장녀로, 현재까지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을 통틀어 음식을 두 번째로 잘한다. 첫 번째는 우리 이봉례 여사! 정갈하고 예쁘게 그리고 깔끔하게. 할머니와 내가 놀러 갈 때면 한정식 만찬처럼 차려 주셨다.
특히 내가 인상적이었던 건 할머니는 김치전에 오징어를 넣어주지 않았는데, 새엄마는 오징어를 넣어주었다. 거의 숨도 안 쉬고 먹어댔는데, 할머니가 나를 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할머니가 새엄마 음식에 질투를 한 것 같다.
나는 본의 아니게 고부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뭘 알고 말하는 건 아니었는데, 새엄마 말로는 내가 그렇게 할머니 흉내를 잘 냈다고 한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할머니 말투를 그대로 재현해서 할머니가 본 새엄마 흉을 그대로 전달했다고..
“니네 아빠가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차린 건 많은데 젓가락 한 군데 갈 데가 없데요.”
“지네 집은 대궐같이 꾸며놓고 산다고 하면서 엄마 없을 때 장롱 문 열어봤어요.”
아직 눈치라는 것이 생성되기 전 시점이다. ㅎㅎㅎ
아빠는 나의 존재를 새엄마에게 정확하게 말하고 결혼하지 않았다. 여행 갔다가 실수해서 낳은 아이로 말했다. 새엄마가 우리 집에서 아빠의 결혼사진을 보고 많이 슬펐을 것 같다. 내가 조금 아빠를 이해하자면, 가정의 정이 간절한 아빠에게 새엄마는 너무나도 함께하고 싶은 여자였을 것 같다. 그 마음 때문에 나를 실수로 태어난 아이로 명명하는 것엔 아직도 기분이 나쁘지만....
나는 내가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마음대로 낳아놓고 왜 이런 시련을 주나. 어른들 때문에 친엄마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내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야 하나.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태어나서 내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걸까. ’
마음이 아플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은 채 몸에 살이 하나도 없는 할머니의 품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할머니와 아빠가 없이 동생들과 엄마랑 있으면 마음이 참 불편했다. 불편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척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맛있는 밥상을 받아서 먹지만, 이상하게 체하는 날이 많았다. 새엄마 앞에 서면 이상하게 잘못하는 일이 많아지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마음이 불편하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가끔,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년을 키우느라 이렇게도 고될까. 오메"
할머니의 말대로라면, 나야말로 전생에 엄청나게 큰 죄를 짓고 태어난 것 같았다.
글을 쓰다 보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라 행복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무겁네요. 분량도 생각처럼 나오지 않고요. 이번 에피소드는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독자님들 이해 부탁드려요~
요즘은 왜 이리 주말에만 비가 오는 걸까요? 주중은 화창한데 말이죠. 바쁘고 더웠던 주중 대신 시원하게 쉬어가라는 하늘의 작은 배려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