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먹는 떡볶이
재수학원에서의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새엄마가 나에게 당부한 두 가지의 명령,
1. 내가 지금 절벽 끝에 서 있고 밑에는 칼날이 있어서 발 한번 내딛거나 잘못 쳐다보면 바로 죽는다는 심정으로 공부해라
2. 학원에 같이 있는 애들은 너와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이다. 쉽게 마음을 열거나 말을 하지 말아라
두 가지를 기억하며 애써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 24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갑내기들에게 친해지지 말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남북통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새엄마는 나에게 내 원래 사이즈보다 큰 흰 티 두 개와 속옷만 가져가라고 했다. 재수학원에서 주는 단체복이 있으니 멋 부릴 생각 말고 두 개로 돌려가며 빨아 입으라는 명령이었다. 가뜩이나 재수를 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던 새엄마의 명령에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학원에서 짐을 정리하는 순간 나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여벌의 다양한 옷을 챙겨 왔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어 안 그래도 움츠러들었던 작은 마음이 더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재수 학원의 일과는 이렇다. 아침에 기상 음악이 7시에 맞춰 울려 퍼지면 재빨리 목욕탕으로 자신의 목욕가방을 들고뛴다. 뛰지 않으면 씻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서로의 몸을 볼 수밖에 없는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사춘기 소녀들의 부끄러움 따위는 함께 지낸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채 사라졌다. 피할 수 없기에 적응해야 했다. 나 역시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매일 따뜻한 공간에서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음에 부끄러움은 저절로 잊혔다.
서둘러 씻고 나오면 아침 배식이 시작된다. 삼시세끼 둥그런 탁자에 모여 밥을 먹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제 반찬(김, 스팸 등)을 가져와 함께 먹는 친구들도 생겼다. 조용했던 급식시간이 시끌벅적해졌다. 팍팍한 기숙학원 생활에서 유일하게 잠깐 자유가 허락된 시간이었으니까...
아침을 먹고 교실로 향한다. 수업과 쉬는 시간이 반복되면 어느새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까지 마치면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는 두 시간씩 두 번의 자율학습 시간이다. 자율학습을 마치면 또다시 목욕탕에 빨리 가기 위한 경쟁을 거쳐 숙소에 들어온다. 자는 시간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자기 전 반드시 군대처럼 점호를 실시했다. 하루 한 명씩 돌아가면서 총 인원 현재 인원을 보고 한 후 잠들 수 있었다. 소등을 하고 움직이거나 옆 친구와 스몰토크는 엄격히 금지됐다. 어둠 속에서도 기숙사 사감선생님이 발소리를 내지 않은 채 감시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방심하고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했다간 바로 복도로 끌려나가 벌을 받았다.
재수학원 생활에서 우리는 복도와 교실 및 생활관에 설치된 CCTV로 감시되고 있었고, 휴대폰은 아예 학원에 가지고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국사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학원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큰 이슈나 국제상황을 말씀해 주셨다. 국사 수업은 지루해할 망정 선생님의 세상 돌아가는 얘기는 흥미진진했다.
그런 우리가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은 매주 일요일. 군인들이 초코파이를 위해 교회나 절 같은 종교활동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강의실에서 열리는 예배에 갔다. 달콤한 초코파이는 없었다. 하지만 수험생활로 지친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기에 믿지 않는 아이들도 예배에 참여했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아이들은 개인정비에 시간을 할애했다. 코인 세탁기로 밀린 빨래를 하기도 했고, 남자아이들은 헬스장에도 가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기도 했다.
우리가 미디어를 볼 수 있는 시간도 일요일이 유일했다. 밤 9시부터 9시 30분까지만 개그콘서트를 교실에서 틀어주었다. 분침이 30분 쪽으로 천천히 가주기를 바랐지만, 영락없이 30분은 바람처럼 다가왔다.
'재밌는 코너는 30분부터인데...'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미 적응을 완료한 아이들은 슬슬 학원의 엄격한 규율을 어기기도 했다. 반입이 금지되는 휴대폰을 가져오거나, 취침시간에 몰래 논으로 뛰어내려 탈출을 했다. 휴대폰으로 콜택시를 먼 곳에 불러놓고 남자아이들이 논을 달려 시내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코스였다. 밖에서 자세히 무엇을 하고 들어오는지는 몰랐지만, 몇몇 아이들의 무용담(?)이 아이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재수학원의 한 가지 진풍경은 쉬는 시간마다 야외 흡연구역에 많은 남자아이들이 몰려간다는 점이다. 쉬는 시간마다 마치 큰 구름 떼가 모여있는 것 같은 진풍경이 펼쳐지는데, 참으로 생경한 광경이었다.
새엄마의 경고를 잊은 채 나는 이 친구들과 점점 더 친해졌다. 그중에서도 3수를 위해 학원을 2년째 다니던 은형언니는 성격이 너무 좋아서 남녀 상관없이 언니를 좋아했다.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상처받기는커녕 더 재밌는 상황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우리 반 반장 언니! 당시에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 캐릭터는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언니가 그 골룸 흉내를 기가 막히게 냈다.
(교탁 위에 올라가서) "마이 플레이셔스, 골룸! 골룸"
정말 생각만 해도 빵 터질 수밖에 없는... 가끔 저녁에 언니가 쉬는 시간에 골룸 공연을 해주면 우리 반 모두는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픈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언니는 화끈하면서도 세심함을 모두 가진 성격이어서 우리의 고민도 언제나 아낌없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들어주었다. 한 살 밖에 차이가 안 났는데도 마치 나이차이가 엄청 나는 큰 언니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언니가 같은 학원 같은 반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언니는 참 좋은 사람이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우리 반에 들어온 여자애가 있었는데, 우연하게 내 옆자리에서 자게 되었다. 작은 계란형 얼굴에 큰 눈망울이 반짝이고 압도적인 머리숱을 자랑하는...ㅋㅋㅋ 한눈에 봐도 참 예쁜 아이. 연이었다. 연이는 합격한 대학교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재수학원에 늦게 들어왔다고 했다. 연이는 이렇게 예쁜 외모를 했지만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고 화가 1도 없는 아이였다. 나랑은 운동을 좋아하고 영화를 즐겨보는 취미도 비슷해서 더욱더 빨리 가까워졌던 것 같다. 사실은 어떻게 친해졌는지 자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우리는 붐비는 샤워실에서 씻지 않기 위해 항상 20분쯤 먼저 일어나,
"연아! 일어나 씻어야 돼"
"으응!!"
샤워실의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소중한 아군이었다.
여자아이들이 유일하게 10명이 되는 우리에게는 큰 불만사항이 있었는데 바로 급식을 배식할 때 남자아이 들을 만 밥양을 풍족하게 주고 여자아이들은 그에 반 정도만 주는 점이었다. 다른 국적의 여성분이 밥을 푸실 때 우리 반 여자아이들은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많이 주세요."
"밥 더 주세요."
얘기를 하면,
"마이마이?"
하고 갸우뚱하면서 밥을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양은 부족하다 느꼈던 것 같다.
"남자만 밥 많이 먹는다고 생각하는 거 남녀차별 아냐?"
"맞지, 맨날 많이 달라고 해도 -마이마이-라고 하고 안 줘."
"진짜로 그래. 엄마한테 확 일러버릴까 같은 돈 내고 남녀차별 너무 심한 거 아냐?"
"근데 밥 적게 준다고 엄마한테 말하면 그만 먹고 공부나 하라고 할 듯"
"맞아!" (까르르 까르르)
"그리고 남자애들만 운동회 하는 거 알아?"
"맞아. 남자아이들만 반 대항으로 축구경기하고 상품 준데."
"왜 여자는 안 해?"
"우리도 축구하면 되지. 아니면 피구라도 시켜주던가. 계주도 있고!"
"왜 여자는 남자 응원만 해야 돼? 나도 운동 좋아하는데."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드센 아이들로 말했다. 남자보다 밥을 많이 먹고 운동을 하고 싶어 하는 여자에게는 드세다는 프레임이 익숙했나 보다. 나는 드센 우리 반이 좋았다. 드센 우리의 요구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다른 반 여자아이들에게도 우리는 미운털이 박힐 수밖에 없었다. 취침시간 전 이불을 깔고 시끌벅쩍 하게 노는 것, 목소리 크게 떠드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태껏 이렇게 마음속에 있는 말을 시원하게 해내는, 그리고 운동을 이렇게나 사랑하는 여자 아이들을 본적이 별로 없다. 뭐랄까... 솔메이트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내가 하고 싶고 살고 싶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이 틀리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체했던 마음이 확 풀어지는 듯 시원했다.
사제 떡볶이를 몰래 가져와 화장실에서 나눠 먹기도 했고, 병원 외출에 당첨된 사람은 꼭 간식거리를 사 와 같이 먹었다. (화장실만이 일과 중 유일하게 사제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였고, 믿기진 않겠지만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여자들의 우정은 떡볶이와 아이스크림과 함께 화장실에서 더욱 돈독해져 갔다.
어느새 새엄마의 명령 같은 지침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뿌듯이 너 왜 초반에 그렇게 말이 없었어?"
"맞아! 말을 이렇게나 많이 하는데."
"엄마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해서.."
"진짜? 이유가 그거였다고? 대박 하하하. 깔깔깔"
"뿌듯이 엄마 빡쎄시네."
"응. 좀 (많이) 빡쎄지..."
드센 여자아들의 일탈은 여기서만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