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의 첫 이별
아빠는 회사를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능에 낙오한 딸의 졸업식장엔 오지 않았다. 새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운동장까지는 왔지만 졸업식장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둘 중 나에게 더 가혹한 인물은 누구일까?
새엄마는 핀잔 섞인 말과 함께 나를 서둘러 차에 태웠다.
"졸업식 얌전히 지나가는 애들도 많은데, 너는 참... 쯧쯧"
친구들이 나에게 다가와 건넨 시끌벅적한 축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새였다. 할머니를 대신 집에 내려다 두고 나는 새엄마와 함께 아빠가 있는 이천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이천 집이 아니라 외곽의 식당이었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다다다다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간 새엄마의 표정은 아직도 뚜렷하다.
"너 재수할 거야?"
"... 네.."
"참... 뭐라고? 너희 아빠는 너 재수시키려고 하던데. 재수는 무슨 재수야 네 머리로. 간호대학교 가서 간호사 되면 취직도 잘되고 네 밥벌이는 할 수 있으니까 간호대 간다고 말을 해. 알겠어?"
"..."
"왜 대답이 없어!!! 재수를 할 거라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재수를 하면 어디서 할 거냐고. 이천에서 할 것도 아니고 대신도 아니고. 그리고 너 솔직히 열심히 했잖아. 열심히 해서 나온 점수인데, 더 한다고 성적이 오를 것 같아? 내가 주위에서 보면 재수해서 성적 오르는 거 극히 드물단다. 지금 네가 받은 점수가 최선이니까 그거에 맞게 간호대를 가."
"..."
"네 아빠는 항상 대책 없이 돈 들어갈 거 생각도 안 하고 일을 벌이려는 게 문제야."
"..."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빠 앞에 가서 말 바꾸고 재수한다는 거 아니지? 간호대학 가겠다고 네 입으로 말해라. 알았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마음에 새겨들어."
이 말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새엄마의 눈 밖에 날 것이다. 더 나빠질 일이 눈에 선했다. 더 나빠질 일이 없을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나빠질 일들만 이 나를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새엄마에게 몇 번이나 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나는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황폐해진 아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더 죄인이 되었다.
"너 어떻게 할 거야. 엄마 말대로 간호대학에 갈 거야?"
"... 네..."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새엄마와의 강요 같은 거래가 성립된 후였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흠.. 너 간호사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 줄 알아? 네가 진짜 되고 싶은 거야? 간호사?"
아빠의 말투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빠는 내가 간호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재수해 보자. 아빠가 알아볼 테니 재수를 해봐."
새엄마의 따가운 눈초리가 있었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네. 재수해볼게요. "
간호대에 가기로 한 새엄마 와의 비밀거래는 성사되지 못했다. 새엄마는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정말 다시 한번 노력해 보고 싶었다. 그 기회를 아빠가 주었다. 지금도 나를 낳아준 것 다음으로 재수를 시켜준 아빠에게 감사하다. 하지만 아빠는 두고두고 나에게 미안한 일이 있거나 혼내야 하는 상황에서 '재수를 시켜준 것'을 큰 아이템으로 활용했다.
그 후 나의 거처는 아빠가 알아본 기숙형 재수학원이었다. 상당한 거금을 매달 내고 숙식과 공부를 해결하는 내 인생의 2막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성적을 반드시 올리리라 다짐했다. 아니 올려야만 한다. 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할머니와 난생처음 떨어져 있게 되는 점이었다. 이모할아버지와 이모할머니가 옆집에 있었지만 걱정이 되는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할머니, 나 공부하러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학원으로 가야 해."
"그려. 가서 공부 열심히 해야지."
"나 없어도 혈압약 잘 챙겨 먹고 연탄갈기 귀찮아도 꼭 갈고. 밥 대충 물 말아서 먹지 말고 있어. 나 중간에 휴가도 받으니까 그때 보면 돼."
"그려. 아무튼간에 내 걱정은 말고 너 공부하는데 무척 힘을 써야 혀."
"알겠어 할머니"
할머니와의 이별도 아쉬웠지만 그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강하게 들었다. 할머니에게 못한 효도는 대학합격해서 하자!
옷가지와 세면도구, 책을 챙겨 새엄마의 차로 향했다. 새엄마는 마뜩지 않은 표정을 했지만, 아빠의 결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등록을 할 때 가봤던 학원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앞에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고 있는 그야말로 오로지 공부만 할 수 있는 환경이다. 학원은 경기도 광주에서도 차를 20분 넘게 타고 가야 도착하는 초월읍에 위치했다. 학원에 도착하고 나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수많은 브랜드의 차가 운동장에 빽빽했다.
흡사 출사표를 던지는 장수의 느낌으로 교실로 들어갔다. 등록할 때 보았던 시험으로 반이 나뉘어 있었다. 나는 그중 딱 중간인 13반에 배정되었다. 학원이름이 크게 적혀있는 위아래 검은색 운동복을 받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의 재수 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보수적인 사회분위기 덕분인지 남녀 비율의 차이가 현격했다. 딸을 기숙사 생활 시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대부분의 반은 여자의 인원이 한자리 수였으나, 내가 속한 13반은 10명이 넘었다. 여중 여고를 나온 나에게는 조금 안심이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교실을 안내받고 전체적인 학원 생활과 생활관 규율에 대해 안내받고 생활관으로 향했다. 25명 정도가 함께 사용하는 큰 방이었다. 구조는 독특했는데 군대 내무반처럼 되어 있었다. 1층 바닥이 있고 사다리를 오르면 2층 바닥과 사물함이 있는 형태였다. 각자 가져온 이불을 정갈하게 개어놓고 자신의 소지품을 정리했다. 아직도 서로 잘 모르는 사이라 서먹함은 여전했다.
새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만이 머릿속에 둥둥 떠나니고 있었다.
"너 거기 갔다고 행여나 친구 사귀거나 할 생각은 하지도 마. 걔네들은 너랑 신분이 달라. 다 부잣집 애들인데 거기에 휘말려서 착각하지 말고 공부나 똑바로 해."
원래 나의 상황이라면 여기 올 수 있는 여건이 아니지. 아빠가 엄청 무리해서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을 안다. 하지만 말을 꼭 저렇게 해야 하는 걸까? 듣기 싫은 말은 왜 항상 귓가에 맴도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나의 재수학원 1일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