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장과 운동장의 거리
잠이 부족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생활의 하루하루를 버텨갔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기며 할머니가 해줄 수 있는 특급 서비스를 나에게 제공했다.
일단 단전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짜증과 신경질을 모두 받아주었다. 연탄을 갈지 못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 주는 일도 잦았다. 7시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담임선생님의 차를 타야 했다. 고3 담임 선생님은 양평으로부터 시작해 대신까지 아침마다 3명을 각자의 집 앞에서 태워서 데려오셨다.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선생님이 기다리실까 싶어 이모할아버지는 항상 큰길에서 선생님 차를 손꼽아 기다렸다.
항상 잠이 부족했던 나는 눈을 다 뜨지 못한 채 큰길로 내달렸다. 한 겨울에도 찬 지하수로 머리를 감고 채 말리지도 못한 채 할머니의 이불속에 다리를 넣고 있으면 할머니가 한 손엔 드라이기로 내 머리를 말려주었다. 입에는 미리 펼쳐놓은 김에 흰밥을 넣어주면서...
"이거라도 입에 넣어. 배곯으면 공부가 안되지. 아이고 머리가 차디차네. 우짤까 잉"
내가 어디어서 이런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까? 수년간의 노동으로 두껍고 거친 할머니의 손이었지만, 나에게 닿을 때는 항상 부드러웠다. 고3 생활이 고되어도 견딜만했던 것 같다. 이렇게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소중한 한 명이 있어서!
길가에 심어놓은 오이가 길쭉하게 자신의 몸을 키워낼 즈음엔 할머니의 김밥대신 신선한 오이가 나의 주식이 되었다. 미리 챙겨 놓은 비닐봉지에 그날의 최상급 오이를 따서 선생님의 차로 달려갔다. 학교에 도착 후 수돗가에서 씻어 와그작 오이를 깨문다. 난 지금도 오이를 좋아하는데, 이 맛을 이후로는 본 적이 없다. 달큼하면서도 아삭하고 몸에 수분을 빵빵하게 채워주는 오이의 맛.
공부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나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힘든 고3생활에서 유일하게 공부와 재미를 다 얻는 시간은 신문을 보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비문학을 공부한다는 핑계로 사리사욕을 채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침 일찍 도착해 신문을 보는 시간은 고3생활로 세상과 동떨어진 나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 어렴풋하게 신문방송학과에 가면 이 재밌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새엄마가 어느 날 물었다.
"대학교 어느 과에 갈 생각이야?"
"신문방송학과에 넣어볼까 생각 중이에요."
"뭐라고? 너 신문방송학과가 얼마나 어려운데인 줄 알아? 네 까짓게 거길 어떻게 가? 장비 사고 이러는 게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데."
"......"
혹시나였는데, 역시나였다.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뭐랄까... 그냥 이 정도면 그럴듯한 이유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였다. 빠른 독립을 위해서는 새엄마 마음에 드는 과를 골라서 대학에 들어가야만 했다.
나는 이제는 흘러가버린 7차 교육과정의 시작 세대로, 수행평가의 등장과 함께 수능 500점 시대를 맞이했다. 사탐을 네 개 선택해서 각각 50점씩 200점. 언어 외국어 수리 각각 100점! 500점의 수능 성적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능도 준비했지만 그 당시의 전형적인 시골학교가 그렇듯 주류의 분위기는 수시였다. 100명이 채 되지 않은 인원 탓에 1등급은 나올 수 없는 구조였지만, 농어촌 전형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수능을 준비하는 인원은 거의 없었다. 나도 어느 정도 내신은 수시를 써볼 수 있는 성적이었기에 신문방송학과를 포기하고 다른 과를 생각해야 했다. 그 와중에 생각해 본 결과... 사탐에서 윤리가 너무 재밌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그 철학자의 사상을 파악하면 모든 문제가 술술 풀리는? 그리고 돈이 적게 드는 과를 조합하면? 사범대학교 윤리교육과였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윤리를 좋아할 수 있게 가르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범대학교는 수시로만은 불가능했고 수능을 반드시 봐야 했다. 인문반에서 거의 혼자 수능을 준비하는 외로운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수시의 유혹도 강했다. 나에게는 농어촌특별전형이라는 무기와 더불어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담임선생님도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을 쓰면 지금 내 점수로는 인서울 높은 대학도 갈 수 있다며 권유하셨다. 사실 나도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가고 싶어 하는 꿈의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니! 하지만 나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배려 대상자가 아니다. 잘못된 복지를 더 이상 내 사리사욕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말은 언젠가 꼭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19살 때의 내 결정에 만족한다.
학급 대부분의 아이들이 면접에 정성을 들일 때 나는 홀로 귀마개를 하고 수능을 준비했다. EBS 책 꾸러미를 한가득 받아 들고 공부에 매진했다.
수능날 아침. 학교에 새벽같이 모여 버스를 타고 이천의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유난히도 춥게 느껴졌던 어두웠던 그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그 흔한 컨디션 핑계를 대야 하나? 그렇게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모의고사 성적보다도 한참 낮은 가채점표가 내 책상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내가 참담함과 슬픔을 다 느끼기도 전 나는 또 아빠집에 가야 했다. 아빠의 불벼락이 몇 번 떨어지고 인생의 낙오자가 된 기분을 여러 번 느꼈다. 그래도 애써 태연하고자 노력했다. 이왕 점수는 나와버렸고, 아빠와 새엄마 앞에서 낙오자가 된 것을 증명하고 싶지 않아서다. 나의 이 마음과 달리 새엄마는 아빠가 출근하고 나서야 자신의 본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너였으면 지금쯤 여주대교 아래로 떨어지고 싶을 거야. 넌 어쩜 그렇게 애가 태평하니?"
"...."
"4년제는 생각하지도 말고 간호대나 전문대 써. 취직 잘되는 곳으로! 알겠어?"
"네"
더 이상 잔소리가 듣기 싫어 서둘러 대답했다. 나는 한 번도 간호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내심 나에게 수능 볼 기회가 한 번만 더 있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새엄마는 나의 의견은 무시한 채 전문대로 나의 진로를 결정해 버렸다. 아빠에게 재수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졸업식이다. 이때 까지도 나의 향방은 결정되지 않았다. 아빠는 수능을 못 본 딸의 졸업식에는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새엄마가 할머니를 데리고 학교로 왔다. 새엄마 등살에 할머니도 새엄마와 차 안에 있었고 졸업식장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흔한 꽃 한 송이조차 받지 못했다.
비록 수능은 못 봤지만, 3년 동안의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축하해 달라는 건 과한 요구인 걸까? 드라마 도깨비에서 은탁이가 졸업할 때 어느 누구도 오지 않은 장면이 있다. 하지만 갑자기 삼신 할머니가 목화 꽃다발을 들고 따듯하게 안아주는 장면으로 전환되었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오열했다.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운동장에 도착했지만 졸업식장에 들어오기 싫어하는 새엄마 덕분에 나는 가족 누구의 축하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기적처럼 잠깐 교회 학생회 생활을 했을 때 만난 집사님이 꽃다발을 들고 나를 찾아오셨다. 당시에는 교회에 나가고 있을 때가 아닌데도 오셔서 아낌없는 축하를 보내주셨다.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민망했던 나의 두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오랜만에 글을 올렸습니다.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준비했던 일들과 호된 감기로 핑계를 대신해 봅니다. 어느덧 겨울이네요. 이번 감기 정말 오래갑니다ㅠㅠ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어느새 뺄례네 집 손녀딸이 30회를 넘어가서 뺄례네 집 손녀딸 2로 발행합니다. 20살로 넘어가는 시점이네요. 앞으로도 부족한 글의 독자가 되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