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로맨스 in 재수학원
인간은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하는 행동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렇다. 나도. 그런 인간이었다. 공부에 매진해야만 하는 이 시간과 공간에서 사랑, love에 빠져버렸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장영아는 특히 사랑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왜냐하면 내 기준에서는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러 번, 여러 주, 여러 달 바뀌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 아이에게 꽂힌 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양휘훈! 뭐 엄청 꽃미남과는 아니었으나, 180을 넘는 훤칠한 키와 하얀 피부. 선한 웃음을 짓는 인천에 사는 아이였다. 축구 경기에서 뛰는 걸 보면 운동을 제법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거친 수컷의 냄새를 풍기기보다는 뽀송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그런 아리송한 남자아이였다.
내가 이렇게 수컷의 냄새에 민감한 이유가 있다. 어느덧 재수학원의 낮밤이 여러 번 지나간 후, 나는 나도 모르게 소문의 온상(?)이 되어 있었다. 우리 반에는 근육으로 몸이 가득 찼을 것 같은 근육몬이 한 마리 살고 있었는데, 배전운이라는 아이였다. 체대 입시를 준비해서인지 몸이 참 울퉁불퉁했다. 그 아이도 그것을 자랑하는 양 몸매가 거침없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녔다.
배전운이랑 장영아는 서로 원하는 관심사(?)가 비슷해서 인지 이성에 대한 대화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장영아는 흘리듯이,
“배전운이 우리 반에 마음에 드는 여자애가 있데” (찡긋)
하며 표현을 했는데, 왠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응. 그렇데 ㅋㅋㅋㅋ”
나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는데, 왜냐하면 그럴듯한 대화도, 눈빛 교환도?, 플러팅도 없었으므로....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날 이후로 그의 본격적인 그리고 저돌적인 플러팅이 시작되었다. 그 아이네 집은 충주에서 큰 마트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져다줄 수 있다며 근육을 뽐내듯 자신 집의 마트력(?)을 뽐냈다.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재수학원 들어올 때 새엄마의 말을 가슴속에 가득 품고 왔기 때문이었다. 연애? 그것도 재수학원에서? 그건 정말 아빠와 새엄마에게 등 스파이크가 아닌 돌팔매질을 당할 행위였다.
장영아는 나에게,
“뿌듯아, 양휘훈이랑 나랑 잘되게 해 줘.”
“으응?! 근데 나 양휘훈이랑 어색한데...”
“그래도 짝꿍이니까 친해져 봐.”
“알겠어. 한번 해볼게.”
그렇게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운명이 우리를 이어주려고 한 것일까? 보통 남남 여여 이렇게 짝꿍이 되었는데, 휘훈이와 나는 짝꿍이 된 것이다. 약속한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을 뿐인데. 왜인걸...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사랑의 징검다리가 아니라 내가 사랑의 당사자가 된 것이다. 내가 배전운이 아닌 양휘훈을 좋아하게 돼버렸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았다. 따뜻한 말투가 좋았다. 무릎이 늘어난 회색 츄리닝도 좋았다.’
나의 본분인 영아의 사랑을 이어 주기는커녕 내가 좋아하게 되다니. 이상한 사자관계의 서막이 시작됐다.
배전운의 적극적인 플러팅에 마음이 혹하기도 했지만, 내 취향은 양휘훈이었다. 하지만 영아와의 약속이 마음 한구석을 계속 짓눌렀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난 늘 우정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내 그 대상자가 되고 보니... 인생 최대의 난제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는 상대도 못할 감정의 혼돈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마 사랑 쪽으로 몇 발자국 가자마자 나는 영아의 감시망에 걸렸고, 나의 목욕친구인 연이의 그 큰 눈망울에 동공지진이 일렁였다. 연이는 나를 급히 화장실로 불러,
“영아 귀에 너랑 휘훈이랑 서로 좋아한다는 얘기가 들어갔던데, 너 어떻게 해?”
“...”
“너 따로 불러낼 것 같던데?”
“말해야지 뭐.”
“어떡하냐...”
연이는 나를 참 걱정했다. 나도 내가 걱정됐다. 영아는 나보다 키가 10센티 이상 크기도 했고, 사실상 내가 대역죄인이 맞았기에... 항상 그렇듯 정공법을 택했다. 연이가 날 불러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녁 식사 시간에 영아가 나를 옥상과 연결되는 어두컴컴한 통로로 오라고 했다.
"너 진짜 휘훈이 좋아해? 누가 먼저 좋아한 거야?”
“응 그렇게 됐어. 미안해.”
“(어이없다는 듯) 너 되게 당당하다. 너무 사실대로 말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드네?”
“잘못한 거니까. 딱히 다른 말을 할 게 없잖아. 나도 감정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 미안해.”
“그래서 사귀기라도 할 거야? 배전운은?”
“...”
만약에 영아가 날 때리면 맞아야지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공포 섞인 회담(?)이 끝난 후 배전운의 플러팅은 더 과감해졌다. 아마도 내 마음의 방향이 그의 승부욕에 불을 지핀 것 같다.
결정적인 사건은 가을의 어느 날, 바로 내 생일에 일어났다. 내 생일에 배전운은 나의 취향을 완벽히 저격한 핑크색 티니위니 후드를 선물했다. 내 생일인 것을 알고 탈출을 감행해서 사 왔다고 했다. 나를 위해 탈출까지 감행하는 이 아이가 신기하기도 하고 다르게 보였다. 그에 비해 양휘훈은? 비교가 됐다.
‘내가 이렇게 물질적인 가치에 현혹되는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과 ‘내가 전운이와 사귀면 영아와 휘훈이가 잘 될 수 있겠지?’ 엇갈린 사랑의 작대기를 올바르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지 않을까 생각했다.
배전운과 사귀기로 한 다음날. 나는 휘훈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눈엔 배신감이 왈칵왈칵 차오르고 있었고 분노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는데, 내 마음도 휘훈이의 마음도 아팠다.
전운이와 첫 연애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재수 학원을 나온 직후 헤어졌다. 내 생에 첫 남자와의 이별은 깡소주 만큼 썼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는 모두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날 위한 선택을 하기로...
지금도 휘훈이와 모임에서 가끔 만나는데, 우리의 이야기는 놀리기에 딱 좋은! 두고두고 우려내는 사골과 같이 녹진한 추억의 한 자락이 되었다. 휘훈이와 나는 술자리에서 끝까지 남는 소중한 전우가 되었다. 재수학원 친구들은 술자리에서 매번 이 이야기를 하지만 들을 때마다 재밌다. 조롱의 맛이란 ㅋㅋㅋㅋ
역시 인간은 자신에게 금지된 것을 했을 때 극도의 쾌락을 느끼는 것 같다.
*의사 선생님과 약속한 두달이 지나 다시 집필활동을 재개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라이킷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겪어보니 정말 건강이 최고입니다. 모두모두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