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 Jul 31. 2022

오늘은 모처럼 라면이 당긴다.

물 500ml를 끓인 후 스프와 면을 넣고, 3분간 더 끓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몇 가지의 사연을 거쳐 나는 전문대학 진학을 결정했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식품영양을 전공으로 택하게 되었다. 몇 가지 사연이라 함은, 전기 대학교의 낙방, 극도로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부모님은 이왕 전기대 떨어진 거 그냥 대학을 안 가고, 취업을 했으면 하고 바랐지만, 나중의 원망이 두려우셨는지 2년제 전문대학을 권하셨고, 적성이나 생각해왔던 전공과는 무관하게 소위 '취업이 잘 되더라.'는 세평에 선택의 기준을 잡으시고 '식품영양 지원해라.'하고 단호히 결정해 주셨던 게 대표적인 세 가지 사연이었다.


 영어 교사를 꿈꾸던 내가, 물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내 잘못이 제일 컸음을 직시했으나  궁핍한 가산을 이유로 후기 대학 지원은 엄두도 못 냈다는 우울함으로 대학 생활 처음 두어 달 정도는 무기력했었다. 하지만 이내 졸업과 동시에 영양사로 취직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 와중에 학과 사무실 근로학생을 뽑는다는 조교선생님의 공지에 용돈이라도 스스로 벌어 보려는 마음에 망설임 없이 지원했고, 간단한 주의사항 정도만 숙지하고 그날부터 바로 근무에 들어갔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과 수업 끝난 오후 6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10시 20분에 마무리되는 학과 사무실 근무는 몸은 다소 피곤했지만 꽤 재미있었다. 딱 한 번 한여름 심한 복통으로 조퇴한 것 빼고는 한 번도 지각하거나 빠진 적이 없었는데, 교수님께서는 이런 내 모습을 성실하다고 눈여겨보셨는지 졸업하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교수님의 추천으로 상호를 말하면 다 아는, 라면 생산 식품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IMF 구제금융 시기였고, 기업구조조정으로 멀쩡히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도 하루아침에 직장을 나와야 하는 시기였던지라 가산이 여의치 않았던 우리 집에서 나의 취업은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영양사가 아닌 원재료, 완제품 품질관리 부서로 발령이 났는데, 식품회사의 품질관리 부서는 한마디로 식품분석 실험실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라면 스프에 대한 품질 분석을 담당했다.

  

 입사가 결정되고 한 달 동안 수습 업무를 배우면서 주어진 과제 중 스프 원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다 보라는 것이 있었다. 시약을 써서 수치로 확인되는 수분, 염도, 지방 수치 등의 데이터도 중요하지만 상품개발자가 의도한 맛을 최종적으로 소비자가 먹었을 때 일정한 품질로 제공되는 것도 데이터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처음 2주 정도는 식사 시간에 밥을 떠서 숟가락을 입에 갖다 대기만 하면 목에서 스프 원재료의 맛과 향이 올라오면서 입덧하는 임산부 마냥 헛구역질이 나오더랬다. 하지만 여러 힘듦은 '나도 이제 월급 받는 직장인이다.'라는 타이틀을 떠올림으로써 다 극복할 수 있었다.


 신제품이 첫 생산되는 날에는 긴장과 분주함의 연속이었다. 직속 선배와 개발자는 하루 종일 생산 현장에 붙어서 원재료 계량부터 투입, 혼합, 배출되어 포장실로 옮겨질 때까지 분석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스프가 배출될 때마다 선배는 몇개의 샘플을 가져와서 개발팀에서 표준으로 내려준 스프와 비교하기 위한 라면 시식을 준비하라고 오더를 내렸는데, 이 때는 이사님, 개발 부서와 우리 부서, 생산 부서의 팀장님들, 현장 생산 직원, 개발자, 선배, 나 등의 여러 직원들이 내가 끓인 여러 그릇의 라면을 시식하면서 품평하고, 보완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진행할 것인가를 숙고하는 시간이었다.


 시식 라면을 끓이기 위한 매뉴얼은 다름 아닌 라면 포장지 뒷면에 제시된 '조리 방법'이다. 물 500ml 또는 550ml를 계량컵으로 계량하고, 끓는 물에 분말스프, 건더기 스프 면을 넣은 후 '몇 분간' 더 끓인다. 이때 정확한 '몇 분'을 지키기 위해 스톱워치는 필수다. 포장지에는 파, 계란을 곁들이면 더욱 맛이 좋다는 이른바 꿀팁을 적어놨지만 시식라면은 '몇 분간' 더 끓이는 것으로 끝을 내야 한다. 그야말로 쌩얼라면을 먹음으로써 제대로 생산되었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참 희한하지. 라면을, 또는 뜨거운 물에 녹인 스프분말을 매일 먹는 게 업무의 일부여서 물릴 만도 할진대, 퇴근해서 집에서도 매일 라면 하나씩을 끓여 먹었다. 가끔 약속이 있어서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밖에서 저녁밥을 먹고 들어가더라도 라면은 별개로 끓여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제일 맛있는 라면은 계란, 파 등을 넣지 않고 끓는 물에 면, 스프만 넣고 몇 분간 더 끓인 그 라면이었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또한 조리 방법에서 제시한 물의 양도 정확하게 계량하고, 끓이는 시간의 정확성을 위해 스톱워치도 필수다.(25년 전, 나는 집에서도 시계의 초바늘을 보면서 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개발자는 자신이 개발한 제품이 많이 판매되기를 기대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매자의 입맛을 사로잡아야 한다. 포장지 뒷면에 열거된 조리방법은 (특히, 물 양과 끓이는 시간) 포장지 속에 있는 라면과 스프의 성질에 따라 반영된 최상의 맛을 위한 것이어서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해도 성공이다.

조리 방법은 라면을 최상의 맛으로 만들어주는 길잡이다.

 


 그곳에서 만 5년을 근무하고, 여러 고민 끝에 지금의 회사로 이직을 한지도 20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라면을 좋아하고, 식구들도 다들 좋아라 한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K는 너무 좋아하는 탓에 일주일에 3회까지만 허용한다. 또한 대파, 계란, 콩나물 등 다양한 토핑까지 요청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 예전처럼 매일 먹지는 않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먹는 것 같다. 이제 소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기에, 라면이나 자장면 등을 먹고 나면 속이 많이 부대껴서 편하지가 않다. 그리고 콜레스테롤 수치나 성인병의 침입을 조심해야 하는 나이라서 가급적이면 채식 위주의 식사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끌림이 강하게 느껴지면 큰 망설임 없이 물 계량하고 휴대폰 스톱워치 가동해서 끓여 먹는다. 혹시나 아들이 중간에 '한 젓가락만'하고 오면 기꺼이 덜어줄 요량으로 미리 대파를 듬뿍 넣어 끓여본다. 속이 좀 부대끼더라도 맛있게 먹어 보자. 25년 전, 수렁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던 우리 집을 조금씩 조금씩 꺼내 주었던 그 회사를, 매일 먹었던 라면을 떠올려 보면서.

작가의 이전글 밥 한 끼 '때웠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