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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Mar 12. 2023

무엇을 먹을까.

나의 전공은 식품영양이다. 전공과 진로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영양사 면허를 취득하면 취직 잘 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자의 1%, 타의 99%로 선택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식품영양을 전공했다고 하면, 20대 때에는 주로 "결혼하면 남편이 좋겠네.", "요리 잘하겠네." 등의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요즘에는 "헉! 이미지가 안 맞는데?", "요리 잘하겠네." 등의 반응이 다수다. [식품영양 전공=요리를 잘한다]라는 막연한 추측은 항상 있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2년제 전문대학 식품영양의 교육 과정에서 요리, 즉 다시 말해 조리 수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4학기 중에서 2학기에 전공과목으로 매 학기당 한 과목씩 있었던 게 전부였던 걸로 기억한다. 대부분 화학과 관련된 과목이 주를 이루었고, 물리, 화학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새 학기의 전공과목을 볼 때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안줏거리로 삼고, 고분고분 말씀을 들었던 나를 책망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정반대이지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퇴근 시각이 되면 여기저기서 나오는 귀여운 고민거리다. 나 역시 주말에 일주일 분량의 서너 가지 밑반찬을 해 두고도 주요리에 대한 부담을 가지기 일쑤다. 밑반찬을 만들 때는 평일 퇴근 후 주방에서 서두르지 않으려고 미리 해 두려는 의도가 있음에도 막상 하루하루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식탁에 올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식사의 재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직접 치댄 햄버거 스테이크도 만들고, 튀기고 양념 입힌 닭강정, 두부 짜글이, 오븐에 구운 우럭...... 등 몸이 좀 힘들더라도 가족이 즐겁게 식사할 수 있다고 믿으며 퇴근하고 2차 근무에 돌입하듯 식사 준비를 했다. 식구들은 맛있게 잘 먹었고, 그 모습에 나도 뿌듯함을 느끼며 '그래, 몸은 좀 힘들었지만 식구들이 좋아하잖아?' 하며 그것을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 정의하고 항시 부지런을 가동하곤 했다. 식품영양 전공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옳았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전공지식은 1도 참고되지 않은 채, 파워 블로거들의 레시피, 유튜버들의 레시피를 본 나 스스로가 비주얼 중심의 요리를 그것도 자기만족을 위해 했었음을 이제야 느끼고 실소하게 된다.




주말 이틀 중에서 하루는 돌아오는 새로운 한 주의 편리를 위해(어찌 보면 나를 위해) 막연하게나마 전공지식을 투입하고 부지런을 떨며 가족들의 밑반찬을 준비한다. 이제 개학한 아들은 학교에서 급식으로 점심과 저녁을 먹을 것이기에 남편과 나를 위한 밑반찬이 맞겠다.


"뭐 먹지?"


좋은 것 먹어야지. 간소하면서도 깔끔한 것 먹어야지.

교대근무를 하는 남편은 낮에 집에서 밥 먹은 횟수가 많고, 나도 점심 도시락을 싸 다니기에 저장성도 있으면서 그 양도 많아야 한다. 고기를 멀리 한 지 이제 1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우리 집은 채소 반찬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끔 삼겹살이 당기거나 할 때 또는 회식으로 인한 육고기나 생선은 망설임 없이 먹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애써 구입해서 비주얼 신경 써가며 먹는 수고를 자처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식단이 급속도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전공지식의 역할이 컸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전환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의 속도가 전공이 아니었더라면 좀 어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아들이 커가면서 육고기 맛을 알아버려 고기가 먹고 싶을 땐 (특히, 소고기는) 근처에 있는 외가에 가서 먹고 오도록 할 때도 종종 있다. 내 마음 같아선 육고기를 안 주고 싶지만, 그건 마치 기독교가 아닌데, 불교가 아닌데 나를 억지 전도하려는 것과 같은 꼴이 되는 것 같아서 고기를 차단하지는 않지만 횟수를 제한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소고기 구이나 돼지고기 수육을 해 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니 마트 매대의 채소 종류도 가짓수가 풍성해진다. 또 가격도 살짝 내려가는 느낌이다.

그저께 금요일엔 사무실 앞 난전에서 할머니께서 파시는 어린 머위를 35,000원어치 샀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봄나물이기 때문이다. "할머니 머위 한 소쿠리에 얼마예요?" 하고 물으니 "5,000원"하고 답하신다. "그럼 몇 소쿠리 살 수 있어요?"하고 다시 물으니 잠시 눈을 껌뻑이시더니, 서둘러 아직 꺼내지 못한 커다란 봉지 속남아 있는 머위를 보시면서 "이거 다 사게?" 하신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떨이하겠다고 다 주시면서 35,000원이라고 하신다. 살짝 데쳐서 된장, 고추장, 다진 마늘, 참기름, 매실액 넣어 버무리면 밥도둑이 따로 없는 기특한 봄나물이다. 또 지난주에 적게나마 만든 생취나물을 남편이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이번엔 4팩을 사서 무쳐두었다. 콩나물도 세 봉지, 무, 오이, 호박, 그리고 우리 집 단골 밑반찬 당근샐러드까지. 마트 계산 직원은 계산대 위에 올려둔 상품을 보면서 "제사 준비하시나 봐요."하고 말을 던지기도 한다.


알록달록 색감이 좋은 나물 반찬


머위를 35,000원어치 샀다고 하면 다들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친정 엄마는 나에게 간이 크다고 하셨다. 하지만 고기를 35,000원만큼 샀다고 하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양을 적게 산 거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물론 채소든 고기든 그간 형성돼 온 가격의 수준이 있기에 그러한 반응들이 당연하지만 채소 구입에는 가격 때문에 망설이거나 주저함은 없었다.


사실 생취를 다듬거나 콩나물 대가리와 뿌리를 다듬는 과정, 단단한 무를 채 써는 과정은 좀 더 많은 시간과 힘을 필요로 한다. 굳이 그 과정이 아니어도 간단하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반찬은 많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주일 정도의 저장성과 많은 양을 다 충족하는 반찬은 나물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 인지 그 틀이 바뀌질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중요한 건, "참 맛있다." 질리지 않고, 매 끼 먹을 때마다 신선한 느낌이다. 또한 콩나물 다듬는 그 시간, 생취를 다듬는 그 시간은 일종의 무념무상처럼 어떤 잡생각도 없이 그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다른 형태의 명상과도 같다.


콩나물 세 봉지 다듬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한 시간 명상했다.


이런 나를 두고 유별나다, 대단하다, 심지어 얼마나 오래 살려고 등의 반응을 보이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오늘 점심 식사를 하고 수저를 내려놓으면서 남편이 혼잣말로 했던 그거면 충분하다.


"아! 맛있다."


나 혼자 먹는 밥상

                                    

금요일 저녁. 선물 받는 초벌부추를 다듬어서 부침개를 만들고, 남아있는 나물을 양푼이에 다 넣어 비벼서 각자 덜어 먹었다. 어지간해서 비빔밥 안 먹는 아들도 맛있다고 두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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