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냉장고 맨 아랫칸 서랍에 넣어 둔 오미자청을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여니, 작은 지퍼백에 포장된 김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게 웬 김치?"
"여보! 이게 언제 적 김치예요? 난 처음 보는데."
"아~ 그저께 남해 어머니께서 사골 국물 보내실 때 같이 넣어주신 김치예요. 자기한테 말했는데."
사골 국물만 생각나고 김치는 기억이 없다. 어머니께서 손주 생각하며 고았다고 하시면서 사골 육수를 냉동해서 보내 주셨고, 그 편에 김치를 넣어주신 것이다.
김치를 통에 옮겨 담으며 한 조각 먹어보았다.
돈가스, 라면, 흰쌀밥, 자장면, 국수, 삼겹살...... 방금 먹어본 김치가 어울리는 음식을 떠올리니 줄줄 나온다. 여기저기 다 잘 맞을 것 같은 맛있는 김치였다.
"낮에 집에서 식사할 때 꺼내 먹어 보세요. 김치가 정말 맛있어요." 하고 남편에게 말했다.
결혼 전, 예비 시부모님께 처음 인사 드리러 갔을 때 저녁 식사를 초대받았다. TV드라마에서 흔히 보았던 상다리 휘청거리는 푸짐한 상차림을 기대하고 들어갔더니, 4인 교자상에 영양찰밥과 국, 서너 가지 정도의 모둠전 한 접시, 나물 한 접시, 잡채, 김치가 전부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초대상이라고 하기에 빈약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정갈한 한 상이었다. 그날 먹었던 찰밥이 너무 맛있었고, 또 잘 보이고 싶었던 욕심에 두 그릇이나 꾸역꾸역 먹었던 탓에 돌아오는 길에 소화제를 사 먹었던 에피소드는 두고두고 남편과 나의 이야깃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봄이면 남해 마늘을 챙겨주시고, 여름에는 그 많은 양의 새우를 다 까서 반찬에 쓸 때 바로바로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소분 포장해서 냉동해 주신다. 국물김치, 무김치, 파김치를 떨어지지 않게 챙겨 주시고, 생선을 말할 것도 없다. 겨울이 되면 김장김치를 넉넉하게 챙겨주시고 수시로 밑반찬을 만들어 보내주신다.
언제였더라...... 그날은 회사에서 녹초가 되어 퇴근해서 집으로 왔는데, 커다란 아이스박스가 그것도 두 개나 덩그러니 주방 쪽 베란다에 놓여있었다. 어머니께서 보내신 거라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대로 놔뒀다는 남편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건 맞지만 그 박스 속 음식을 정리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기에 지칠 대로 지친 내 몸과 오늘 정리하지 않으면 변할 수도 있는 음식 사이에서 내 화가 이성을 망각시키고 감정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박스를 열지도 않은 채, 나는 남편에게 할 말이 있다며 식탁에 마주 앉아 일방적으로 쏘아붙였다.
"감사하긴 하지만 나로선 마냥 반갑지만은 않아요. 이걸 정리하는 것도 힘들거든요. 다음부터 자기가 정리할 거 아니면 어머니께 보내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세요. 내가 말씀드리면 많이 섭섭하실 거니까."
남편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씩씩거리며 박스 테이프를 떼고 뚜껑을 열었더니 세상에나 내가 손댈 게 하나도 없는 것만 골라서 보내신 게 아닌가. 국물 멸치, 다듬은 쪽파, 다진 마늘, 새우, 참기름, 깨소금, 나물, 진미채볶음, 며느리가 좋아하는 식혜, 백김치...... 백김치만 제외하고 그대로 냉장고, 냉동실로 직행했다. 남편에게 너무 미안했고, 이 사실을 모르시지만 어머니께는 더더욱 죄송스러웠다.
오늘 저녁, 남편은 근무를 들어갔고, 아들은 8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올 예정이다.
나 혼자네. 뭐 먹을까. 현미밥을 데우고, 당근샐러드, 머위나물, 무나물을 차려 밥 한 술 입에 넣으려던 순간, 낮에 발견한 김치가 떠올랐다. 입 안 댔으니 다시 원상복귀 시키고 자장라면을 끓였다. 어머니의 김치는 오늘 저녁 자장라면과 함께 먹으면 따봉일 것 같다.
꾸덕하게 끓여낸 자장라면을 포크로 돌돌 말아서 입안에 넣고 곧이어 김치를 먹었다.
아! 진짜 "따봉"이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