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8일째, Normafa park에 가다
2023년 4월 29일 토요일, 맑음
영화'로기완'촬영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와 잠에 든 시각은 새벽 4시가 다 되서였다.
그리고 눈을 뜬 시각은 오전 9시가 넘어서였다.
감기 기운도 있고 잠도 제대로 못 잔 탓에 몸이 조금 무겁다.
오전엔 숙소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글도 쓰고 쉬는 시간을 가지니 좀 나아지는 듯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감기가 들어도 금세 낫고 잠자는 시간 상관없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돌아다녀도 피곤함을 몰랐는데 안타깝게도 요즘은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나이가 들어감을 절실히 느낀다.
오늘 점심 식사는 외식 대신 숙소에서 소시지와 감자를 굽고 과일과 커피로 간단히 해결했다.
바깥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다. 바람도 없고 햇살은 눈부시고....
점심식사 후 우리는 따뜻한 봄 햇살을 느끼고 싶어 부다페스트의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가 있는 노르마파 공원(Normafa Park)에 가기로 했다.
전차와 시내버스를 번갈아 타고 중심가를 지나 마을을 한참 동안 계속 올라간다.
이런 마을에 눈이라도 와서 쌓인다면 어떻게 자동차들이 다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마침내 높은 곳, 한적한 마을 시내버스의 종점 Normafa에 내렸다.
이름이 '노르마파 Normafa'이다.
왠지 모르게 벨리니(Bellini)의 오페라 '노르마 Norma'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공원에 대한 설명을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공원의 이름이 벨리니(Bellini)의 오페라 '노르마(Norma)'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폭풍우와 번개 속에 살아남은 거대한 너도밤나무를 신성시 여기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그 당시 불린 이름 Viharbükk)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곳을 찾던 사람들 중 1840년 국립극장의 오페라 가수였던 로잘리아 쇼델 클라인(Rozalia Schodel Klein)은 홀로 서 있는 이 성스런 나무가 마치 오페라 '노르마'의 무대 세트와 매우 닮았다고 여기고 오페라 Norma의 아리아를 이 나무 밑에서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이 나무를 'Norma Tree(Norma f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Normafa는 공원을 부르는 이름이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 전체를 아우르게 되었다고 한다.
입구에서부터 약 1시간 정도 걸으면 산 정상의 엘리자베스 전망대에 오르게 된다.
Normafa 표지판에서 나무에 표시되어 있는 파란색 경로를 따라 능선을 향해 올라가면 마치 초록색 동굴로 들어가듯 울창한 나무로 뒤덮인 아름다운 산책길이 펼쳐진다.
이 공원을 걷는 코스는 쉬운 단계부터 어려운 단계까지 다양하게 있는데 우리는 공원 첫 방문이고 또 내 몸의 상황을 고려해 쉬운 코스로 선택해 걷기로 했다.
안정되고 평평하게 다듬어진 흙으로 덮인 산책로가 능선을 따라 거의 2km에 걸쳐 이어지는 길인데 유모차를 끌고 올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길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부다페스트 시내엔 고목이 많고 공원도 많다는 게 나는 부럽다.
평평하게 잘 다듬어진 오솔길을 걷는데도 주변엔 고목과 독특한 형상을 한 나무들이 가득하다.
상쾌한 공기와 함께 조용하고 시원한 숲길을 걷다 보니 아주 오래전 대학교 강당에서 보았던 오페라 '노르마'가 저절로 떠오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진지하게 오페라를 관람할 걸 그랬다.
기억으로는 무대 배경이 어둡고 조금은 음침한 무대였던 것도 같은데 그에 비해 아름다운 현악기의 선율로 시작되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리아의 멜로디가 떠오른다.
사랑했던 연인이 배신을 하자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며 부르는 처절한(?) 가사의 노래이기도 하지만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 잊지 못하는 아리아다.
하필 로잘리아는 왜 너도밤나무를 어둡고 슬픈 오페라의 무대와 같다고 생각을 했을까?
혹시 그녀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노르마가 불길이 치솟는 처형대로 향하는 무대를 생각했을까?
아니, 오페라 1막의 아리아 '정결한 여신(Casta Diva)'에서 나오는 가사 '이 신성하고 아주 오래된 나무들 (queste sacre antiche piante)'를 떠올리며 연결했는지 모르겠다.
서로 사랑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결말, 죽음으로 끝을 맺는 비극 오페라 '노르마'의 무대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지만 연결이 어렵다.
그렇게 생각하니 공원의 많은 고목들이 모두 신성하고 아주 오래된 나무들처럼 보인다. ㅎㅎㅎ
혹여나 이 공원의 이름을 탄생시킨 신성한 너도밤나무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려보지만 노르마의 무대 세트와 비슷하게 생긴 너도밤나무는 찾을 수가 없다.
사실 그 나무는 영원히 보존하기위해 지하수 샘 웅덩이에 두었지만 대부분 썩었고 나머지는 석회층에 묻어두었다고 하는데 헝가리 위대한 시인으로 알려진 Gábor Devecseri가 지은 시***가 담긴 명판에 새겨져 있다.
이 생각 저 생각들을 떠올리며 전망대로 올라가는데 벌써 부다페스트의 탁 트인 아름다운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붉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멀리에는 다뉴브 강과 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이 멋들어지게 놓여있다.
부다페스트의 랜드마크인 멋진 국회의사당도 멀리서 빛을 내고 있다.
오늘은 토요일, 가족끼리 놀러 와 요리를 직접 해 먹으며 하루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Anna-ret 놀이터에 왔다.
푸른 잔디가 넓게 펼쳐진 평원에는 식사를 준비하고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은 물론 바비큐 시설도 잘 마련되어 있다.
Anna-ret 놀이터 주변에는 총 7개의 화덕이 있으며 각 화덕에는 테이블과 2개의 벤치가 있어 가족들과 함께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탁 트인 전망과 아름다운 넓은 초원 가장자리에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놀이터가 위치해 있어 가족들이 함께 즐기기에는 안성맞춤 장소다.
직접 불을 피우고 석쇠에 고기를 굽는 아빠 그리고 피워 놓은 불에 얹어진 커다란 쇠솥에는 맛난 음식이 무언가가 끓고 있는데 그 곁을 지나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진동한다.
가족들의 식사를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부모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나름대로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의 놀이 기구도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편안하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이런 분위기가 편안하고 정감이 간다.
멋 부림 없고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며 함께 어울려 사는 이들의 사는 모습에서 참다운 여유를 느낀다.
전망대까지 가는 내내 나무도 많고 길이 편안해 힘든 줄 모른다.
거의 왔을까?
랑고쉬(Langos)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휴게소를 만났다.
저마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있는 게 보여 우리도 사 먹어 보는데 역시 맛나다.
여기부터는 전망대까지 가는 길이 편안한 우회로와 가파른 지름길로 나뉘는데 우리는 지름길을 이용해서 올라가기로 했다.
가파르다고는 해도 약 5분 정도만 오르면 되는 쉬운 오르막이다.
마침내 야노스 헤기 전망대(János-hegy Erzsebet)에 올랐다.
이곳 야노스 헤기 (János-hegy)는 528M의 높이로 전망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도 유명한 하이킹 코스였는데 1882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곳을 방문했기 때문에 'János-hegy Erzsebet 전망대'라고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정면에서 본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망대가 무척 아름답고 우아하다.
이 탑의 건설 작업은 1908년에 시작되었고 1910년에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안전 문제로 탑을 잠시 닫고 보수 공사를 한 후 2005년부터 다시 옛 분위기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전망대이다.
1층은 폐쇄형 회랑식으로 되어있는데 야노스 헤기와 엘리자베스 전망대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관이었다.
전망대를 짓는 과정과 복구작업, 그리고 주변 지역과 자연환경이 소개되고 있었다.
1층 회랑 관람 후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나선형 계단을 돌아 올라가야 한다.
100여 개의 나선형 계단을 돌면 돌수록 테라스의 공간은 점점 작아지고 있는 느낌이지만 내가 볼 수 있는 전망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오르는 걸음이 빨라진다.
드디어 탑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전망대에 오르니 바람이 장난 아니다. 그런데 차갑기보다는 시원한 감촉으로 다가온다.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부다페스트의 모든 곳을 360도 돌아가며 모두 볼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시내를 벗어나니 작은 능선으로 된 초록색 언덕이 대부분이다.
천지가 초록색으로 덮인 장관을 보니 마음도 눈도 편안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초록색으로 덮인 드넓은 장관을 쉽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
오후 늦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공원으로 나들이를 온 가족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꼭 붙잡고 걷는 손녀, 아빠의 어깨에 앉아 장난을 하며 좋아하는 어린아이와 아빠의 행복한 얼굴...
모두 편안한 미소가 담긴 얼굴들로 보기 좋은 모습들이다.
우리 모두 언제나 이렇듯 편안한 얼굴과 미소를 잃지 않고 사는 삶이길 바래본다.
*** 시인 '가보르 데베세리(Gábor Devecseri)의 시(詩)
" Norma tree(Normafa),
Your branches have swung with the wind through the ages,
And cheery the songs were of ramblers around you,
Norma tree(Normafa),
May songs come alive in the green of your verdure,
And conquer indifference, and conquer the storm..”
(translation courtesy of Leslie A. Kery)
노르마 나무여
너의 가지들은 오랜 세월 동안 바람과 함께 흔들렸다.
그리고 쾌활한 노래들은 당신 주위의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노래였다.
노르마 나무여
당신의 푸른 초원에 노래가 살아있기를
그리고 무관심과 폭풍우를 이겨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