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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현 Jul 07. 2023

뜻밖에 만난 소박한 행복

부다페스트 12일째, 벼룩시장과 온천을 방문하다.

2023년 5월 3일 수요일, 흐리다 갬



어제까지 화창했던 날씨가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새벽엔 비도 왔는지 땅이 젖어있다.

오늘 우리의 계획은 어제처럼 부다페스트를 벗어나 근교 '센텐드레(Szentendre)'마을 방문이었다. 하지만 비가 내릴 것 같은 흐린 날씨에 먼 곳으로 가는 대신 부다페스트 상설 벼룩시장인 '에체리 벼룩시장(Ecseri Flea Market)'를 방문해 보기로 했다.

벼룩시장은 주말 오전에 잠깐 서는 곳도 있지만 오늘 방문하는 곳은 일주일 내내 문을 여는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이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부다페스트 외곽지역 '에체리(Ecseri)'지역에 내렸다.

다행히 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은 서서히 파란 하늘로 변해가고 상쾌한 바람도 함께 하니 기분이 밝아진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라색꽃이 풍성한 등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길 건너에 간판 'Ecseri Flea Market'이 보이는데 벼룩시장의 입구가 꽤 넓다.

보라색 등나무와 에체리 벼룩 시장 입구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면적이 넓은 듯하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커다란 면적에 비해 매장들이 폐업을 했거나 문을 열지 않은 가게가 절반 이상이 된다.

주말이 아니라 그런지 마치 예체리 벼룩시장 전체가 문을 닫을 것처럼 무척 썰렁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건물 내부에서 통로를 가운데 두고 가게들이 서있다. 

통로를 걸으며 양쪽 가게를 구경하는 재미를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한집 건너 두서너 집이 문을 닫고 있으니 썰렁함 그 자체다.

벼룩시장 내부

이곳을 찾는 사람도 우리밖엔 없다.

오히려 가게들 앞을 지나다니는 게 어색함이 느껴질 정도였고 살 의향이 없는 낯선 동양인들이 이곳에 왜?라는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다.

가게의 주인들은 고객을 기다리거나 조바심을 내는 분위기도 아니다. 으레 그렇다는 듯 그들끼리 담소를 하거나 나름대로 그저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벼룩시장'의 어원은 벼룩이 들끓을 정도로 오래된 물건을 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곳 역시 벼룩시장답게 가게에 전시된 물건들은 세월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물품들을 비롯해 공산주의 시절에 사용했던 물품 그리고 오래된 그림들과 고가구들이 많다.

그중에는 많이 파손된 가구들도 있고 수선이 많이 필요한 물건도 많아 도대체 이걸 누가 사갈까 싶은 물건들도 있는데 심지어는 시체를 넣는 관[棺]도 있고 가마꾼이 사람을 태우고 다니던 가마도 눈에 띈다.

벼룩시장에 나온 관과 마차

오래된 사진기를 한데 모아놓고 파는 가게는 마치 사진기 박물관에 온 느낌도 든다.

오래된 사진기를 팔고 있는 가게

여성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앙증맞은 그릇들, 유명한 브랜드의 그릇들을 포함해 귀여운 인형들도 진열해 놓고 있는데 대부분 중국제품으로 보여 진품인지 가품인지 구별할 수가 없어 살 수도 없다.

오래된 시계, 축음기, LP판들도 많이 내놓고 있지만 나를 유혹하는 물건들은 보이지 않는다.

부다페스트에서 유명한 벼룩시장에 호기심을 품고 왔는데 썰렁한 분위기라 조금은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출구로 가는 길...

'Grand Market'이라는 가게가 보여 잠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들어서자마자 내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감탄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벼룩시장다운 곳을 만났다.

내부의 규모는 의외로 큼지막했는데 전통악기를 비롯해 오래된 악기들이 걸려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오르골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물건들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는데 의외다. 

나이 든 할아버지가 주인이신데 아주 오래된 오르골들을 모으고 계셨던 모양이다. 

우리는 커다란 부피의 오르골을 살 수도 없어 그저 눈으로만 보며 신기해하는데 주인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전시된 오르골 하나하나 모두 들려주신다. 

할아버지의 자부심도 느껴지고 슬그머니 자랑도 하신다.

그러더니 나보고 직접 오르골을 조작해 보라며 시범도 보여주신다. 

오르골을 구입할 마음이 없는 우리가 이렇게 까지 해도 되나 싶어 망설이는데 얼마든지 해보라며 환한 미소로 선뜻 오르골을 내어주신다.

가르쳐주신 대로 기계를 움직이니 오래되고 낡은 태엽이 돌아가며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왈츠, 폴카 그리고 행진곡 등 오르골에서 많은 음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저 신기하고 좋아 오르골들 하나하나 모두 들어보니 너무 흥분되고 신기해서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이곳에 있는 오르골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오르골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규모와 소리 그리고 조작 등 모든 면에서 다르다.

오래된 외국 영화의 놀이공원 앞에 설치되어 있던 오르골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오르골도 있다.

동전을 넣으면 음악이 나오도록 되어있는 오르골에서는 직접 동전을 주시며 넣어보라고 하신다. 땡그랑 동전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민요가 흘러나온다.

이 순간 마치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좋아하는 물건 앞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나를 떠올리게도 하는 향수에 젖게도 한다.

꽤 오랫동안 가게에 머물렀는데 친절하게 함께 해주신 할아버지 덕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한 경험을 했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친절에 감사의 표시로 한국에서 가져간 전통 기념품을 선물했더니 기뻐하시며 할아버지도  가게'ECSERIBAZAR'를 널리 알려달라며 명함을 주신다.

실망만 안고 돌아올 뻔한 에체리 벼룩시장(Ecseri Flea Market)에서 주인 할아버지의 친절과 배려로 몇 곱절 행복한 마음을 안고 나왔다.

역시 벼룩시장은 사람과 물건들을 통해 나를 아스라한 추억에 대한 그리움으로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는 곳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부다페스트 중심가로 돌아와 며칠 전 방문했던 레스토랑 "AZAR"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맛도 가격도 서비스도 좋아 다시 오기로 했던 곳이다.

지난주에 먹었던 메뉴는 사라지고 새로운 메뉴가 등장했지만 가격은 그대로다.

역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식당이었다.

레스토랑 'Azar'에서의 점심식사




배도 부르고 몸도 노곤해진 우리는 온천(Palatinus Strand Bath)을 방문하기로 했다.

헝가리에 오면 많은 사람들은 부다페스트의 3대 온천으로 널리 알려진 세체니, 루다스, 겔레르트 온천을 찾아간다. 

온천마다 특색이 있는 온천이라 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유명하다는 소문에 한번쯤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방문을 한다.

우리도 그중 한 곳의 온천을 가기로 했지만 세계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탓에 우리가 원하는 조용하고 한가한 온천과는 거리가 멀고 특히 턱없이 비싼 요금에 방문을 꼭 해야 하나 망설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 며칠 전 머르기트 섬을 방문했을 때 온천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오늘은 그 섬 안에 있는 온천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영국 일간지 'The Guardian' 독자들에 따르면 이 온천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천탕 중 하나로 이름난 온천이었다.

숲으로 둘러진 곳에서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여덟 개 레인의 온천 수영장 그리고 두 개의 대형 온천풀, 실내 온천, 사우나(핀란드식, 한증막, 지열 사우나) 등 다양한 시설이 있어 하루를 편하게 보내기에 꽤 좋은 온천장이다.

하지만 이 시설 외에도 거대한 슬라이드를 포함한 6개의 풀이 더 있는데 지금은 성수기가 아니라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온천장이다.

더욱 좋은 건 입장료가 세체니 온천에 1/3이 안 되는 가격이라는 사실이다.

Palatinus Strand Bath 전체와 오늘 운영중인 온천 일부 3개


우리는 머르키트 섬에 도착해 온천(Palatinus Strand Bath)으로 향했다.

머르키트 섬은 워낙 넓어 온천까지 가려면 시내버스나 공용자전거를 타고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우리는 버스대신 자전거를 타기로 했는데 자전거를 타고 섬 내부를 이곳저곳 다니는 것도 무척 상쾌하고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온천(Palatinus Strand Bath)에 도착,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먼저 실외에 있는 온천풀로 향했다.

8개의 넓은 레인이 있는 수영장엔 겨우 두서너 명 정도 수영을 하고 있다. 

실외 수영장의 수온은 26도라고 되어 있다. 우리도 풀장으로 Go!

레인을 하나씩 차지하고 넓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니 그야말로 기분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한국에서 다니던 실내 수영장과 비교가 되니 더 그렇다.

이곳에 산다면 매일 오고 싶을 정도다.


야외 수영장

마음껏 수영을 하고 난 후 수영장 바로 옆에 따뜻한 온천풀(34도)로 들어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안마 시설이 있어 거센 물줄기에 내 몸을 가까이 대본다.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강한 물줄기에 몸을 맡기니 뭉쳐있던 어깨와 등이 시원하다.

하늘엔 구름도 많아 햇빛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우리에겐 야외에서 즐기기 딱 좋은 날씨다. 

사람이 적은 넓은 온천풀에서 바로 옆 다뉴브강의 강바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게 바로 황제 온천인가 싶다. ㅎㅎ

이 순간 우리는 젊은 커플이라도 된 양 재밌는 포즈들을 취하며 사진을 찍어본다.

온천풀장1

한참을 놀다가 가장 따뜻한 온천풀장(37도)으로 건너갔다.

정말 몸이 녹을 정도로 따뜻한 물이다.

한쪽에서는 젊은 여성들 약 20 명이 모여 수업을 받고 있는 듯한데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사람을 파트너가 이리저리 조용히 이끌고 다닌다. 물 위에 누워 명상을 하나?

제일 높은 온도의 온천 풀 에서 그룹 수업을 받는 모습

우리도 그 수업 동작을 따라서 물 위에 누워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보니 마음과 몸이 릴랙스 된다.

조금 전 온천풀에서는 물폭포 안마시설로 몸을 릴랙스 했다면 지금 온천풀에서는 수중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릴랙스 해본다.


실내 온천풀로 들어왔다.

먼저 사우나 시설에서 잠시 몸을 데피고 실내 온천풀에 오니 은은한 조명과 따뜻한 공기 그리고 조용한 분위기가 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베드에 누워 책을 읽거나 물에서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

실내 온천풀

따뜻한 물과 함께 즐기다 보니 어느덧 세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온천을 즐기고 나와 머르키트 섬을 자전거로 산책을 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평일 오후 퇴근 무렵 시간이라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섬을 찾아와 휴식을 취한다.

트랙을 걷거나 달리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개와 함께 산책을 하는 사람, 돗자리를 펴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풍경을 즐기는 사람, 공원의 경치 좋은 곳에서 마시려는 듯 술을 사들고 가는 젊은 남자들도 보인다.

머르기트 섬 트랙을 달리는 사람들

퇴근 후 아름다운 섬을 찾아 한적하고 경치 좋은 자연의 품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이들이 부럽다. 무엇보다 이들 모두에서 느껴지는 편안하고 넉넉한 모습이 좋다. 

평온한 분위기에 젖어 자연과 함께 하고 있는 나도 무척 행복하다.

행복은 어떤 상황에서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오늘 또 우리에겐 헝가리에 살아 볼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 벼룩시장에서 만난 1890년대 오르골을 감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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