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와 카미크 마을을 방문하다.
골루바츠에서 니시로 오는 도로 역시 공사가 이루어지는 구간이 꽤 많다. 도로를 넓히려고 하는 공사인데 폐쇄된 구간이 많아 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마침내 주변이 한가한 도로로 나와 운전을 하는데 도로의 상태가 무척 좋지 않다.
군데군데 깊이 파인곳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곳도 있고 도로를 새로 정비하지 않은 채 구멍들을 메운 흔적이 가득하다.
중앙 정부에서는 지방 도로 정비를 위해 지원을 할 계획은 아직 없는 듯하다.
약 3시간가량 운전해 니시(Nis)에 도착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태어난 도시이기도 한 '니시'는 비잔틴 시대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통치를 하지만 훈족에게 멸망을 당했고 그 이후에는 헝가리와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에 있다가 12세기에 이르러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가 다시 찾았다. 하지만 또다시 오스만에 의해 함락을 당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도시 중 하나이다.
니시는 1차 세계대전당시 세르비아의 임시수도이기도 했는데 현재는 세르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우리가 이 도시를 방문한 목적은 그리스(Greece)의 테살로니키(Thessalokini)로 가기 위한 길목에 있는 도시라 하루 묵게 되었다.
사바 강을 중심으로 양쪽에 형성되어 있는 도시 '니시'는 니시 성채를 비롯해 해골탑, 메디야나 궁전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는 도시다.
다만 수차례 전쟁을 거치며 오스만 시기에 지어진 전통 가옥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현재 시가지는 19세기말에 세워진 유럽풍의 건물들이 많은 편이다.
한때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했던 무슬림들은 대부분 추방되었고 불가리아에 가까운 이 도시는 불가리아계 주민들도 많았지만 이들 역시 이주했다고 한다.
니시에 도착한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다시 도시 산책에 나섰다.
다행히 숙소에서 니시의 번화가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니슈엔 니샤바(Nishava ) 강이 흐르고 있다.
강을 따라 걷는데 서울의 한강보다 훨씬 폭도 좁고 강의 유속이 몹시 빠르다. 이렇다 보니 카누 슬라럼(canoe slalom을 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해 놓은 게 보인다.
이 경기는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강 급류에 있는 게이트를 통해 조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쟁 스포츠인데 경기를 실제로 볼 수는 없었지만 시설이 보여 신기하기도 했다.
강 주변의 도시 산책길이 잘 정비되어 있고 강 바로 옆에는 니시 성채가 있다.
니시 성채는 세르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손꼽히는 성채라고 한다.
나무와 벤치들이 많아 무성한 녹색 공원에 들어온 듯한 느낌도 든다.
둘레가 2.1km가 되고 두께는 3m나 되는 니시 성채는 오스만 시대의 목욕탕을 비롯해 탄약보관소, 비잔틴 시대의 거리, 고대 거리 등 다양한 유적들을 잘 보존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 요새는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불가리아인이 점령하여 세르비아 애국자들을 가두는 감옥의 역할을 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성의 일부는 폐허가 되어 있지만 멋진 방어 시설을 여전히 잘 유지하고 있었는데 산책하기 좋아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오후 늦은 시간에도 성채 안으로 들어온다.
고대 유적들과 함께 하는 멋진 산책이 될 것 같다.
둘러보는 중에 '시티 가든'이라는 조그마한 정원이 있어 들어가 보는데 모든 화분과 나무들에 가격표가 붙어있는 걸 보니 이 식물들을 데리고 갈 주인을 기다리고 있나 보다.
하지만 정원이 깔끔하거나 아름답다기보다는 다소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요새에서 나오변 바로 니시에서 가장 번화가인 킹 밀란(King Milan) 광장을 만나게 된다.
킹 밀란은 세르비아의 초대 국왕이었다고 한다.
세르비아의 발전에 많은 노력을 한 국왕이었지만 그의 아들에게 왕위를 뺏기고 심지어는 추방까지 당해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며 비참한 짧은 생애(46세)를 마친 인물이다.
킹 밀란 광장은 과거에는 '해방 광장'이라고 했었는데, 1718년 터키인들이 요새를 짓기 시작하면서 그 주변에 시장이 생기고 번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1879년 터키에서 해방된 후 이 광장은 도시 계획을 실행했는데 베오그라드와 세르비아 북부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이 주변에 건물을 유럽풍 건물을 지어 터키의 분위기에서 유럽 스타일 장소로 변모가 되었다.
이 광장의 중앙에는 오스만의 통치와 1차 세계대전의 해방을 기념하는 기념비(1937)가 있는데 거대하다.
이 기념비는 세르비아의 조각 예술의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지며 기념비의 꼭대기에는 자유의 도래를 상징하는 깃발을 든 기수가 있고, 중앙 부분에는 사람들에게 봉기를 촉구하는 듯한 움직임들을 나타내고 있다.
이 거리에는 레스토랑, 카페 그리고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어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고 있다.
북적거리는 번화가에 오니 비로소 대도시의 느낌이 난다.
비록 세련되거나 아름다운 건물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1900년대 초반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아직도 거리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거리를 걷다가 초콜릿을 파는 예쁜 가게에 들어갔다.
주인 아가씨가 세르비가 여행이 마음에 들었냐고 묻는다.
우리는 세 개의 도시를 방문했는데 각각의 특성이 있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하자 우리의 말에 수긍을 하는 건지 애매한 미소를 짓는다.
세르비아의 많은 도시들 가운데 단지 수도인 베오그라드와 골루바츠 그리고 니시를 방문하고 세르비아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세르비아는 관광객을 위해 조금씩 준비를 하고 있는 나라임은 분명했다.
아울러 세르비아를 여행하기 전에 가졌던 세르비아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와 약간의 걱정스러움은 많이 떨쳐낼 수 있었다.
루마니아만큼 만족스럽진 않지만 세르비아 역시 친절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자연환경 그리고 멋진 유적들을 비롯해 독특한 매력이 스며있음은 분명했다.
높은 산 위에는 커다란 독수리가 양 날개를 벌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형물의 근사한 모습을 보니 호기심이 생겨 정상까지 올라가보기로 했다.
널리 알려진 장소가 아니라 그런지 그곳을 향하는 입구도 안내도 전혀 없다.
올라오는 길이 너무 힘들고 위험하기도 했다.
사람도 없고 길도 없는 이 여정이 처음엔 많이 불안했고 후회도 된 건 사실이다.
이곳을 왜 왔나 싶은 마음도 수없이 들었다.
도중에 수풀이 엉켜 들어갈 수도 없는 숲 속을 만나니 겁도 났고 게다가 다리가 후들거려 내 맘대로 디뎌지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목숨을 건(?) 어드벤처였다.
다음에는 여행 중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하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다.
두 번 다시 가라면 절대 못 갈 것 같다.
그는 지금도 놀이터를 혼자서 직접 만들고 있다며 무척 자랑스러워 한다.
그의 이름은 '미키'였다.
단지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재밌게 쉬다 가는게 그의 희망이라면서 지원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혼자 이 모든 걸 완성해나가는 그의 열정에 놀랍기만 하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을 사는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 이 글은 2024년 5월 여행 중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