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디브의 작은 섬 굴히에 머물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몰디브의 작은 섬, 굴히(Gulhi)다.
걸어서 이십 여 분이면 섬 한 바퀴를 전부 돌아볼 정도의 작은 섬, 주민도 많지 않은 아주 조용한 섬이다.
특별히 볼 것 없는 소박한 섬으로 비취색과 코발트색 바다가 바다가 섬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바다 바로 옆 숙소에서 묵었던 우리에게는 동이 트기 전 바다로 달려가 아무도 없는 새벽 바다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호수 같은 환상적인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게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내 몸을 간질이는 바닷물을 느끼며 웅장한 해를 맞이하는 숭고한 순간이다.
동이 틀 무렵이면 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비취색의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는 금세 붉은 기운으로 물든다.
마침내 기다리던 해는 주변을 마치 뜨거운 용광로처럼 만들더니 이글거리며 고개를 내민다.
그런데 한 번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얄밉게도 구름 사이로 몇 번씩 슬쩍 내밀다 사라지고 밀당을 하는 몸짓으로 우리를 몹시 감질나게 하는 녀석이다.
하지만 바다 위로, 구름을 젖히고 나와만 준다면...
얄미운 몸짓이 끝나면 한 줄기 빛으로 그의 존재를 들어내는 강렬한 해, 그리고 일출에 반짝이는 윤슬은 아침 해가 우리에게 덤으로 주는 선물이다.
이런 장관을 우리는 굴히에서 매일 경험했다.
저녁엔 아름다운 일몰을 보며 느긋한 수영을 할 수 있는 곳 또한 굴히다.
일몰 또한 장관이다.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색으로 하늘 전체를 물들이며 지는 해와 함께 조용한 바다에 나를 맡긴다.
한낮 강렬한 햇빛을 즐기던 서양인들이 서서히 바다에서 떠날 즈음 우리는 조용해진 바다에서 우리의 시간을 마음껏 즐긴다.
매일 일출과 일몰을 보지만 볼 때마다 다른 색, 다른 형상들로 다가온다.
맑은 하늘에서의 노을을 볼 때에는 눈물이 터져 나올 만큼 아름다운 색에 반해 말을 할 수 없지만 진한 먹구름이 잔뜩 드리운 노을이 하늘 전체를 뒤덮을 땐 마치 지구의 종말이라도 온듯한 무서움이 들 때도 있다.
아름다움이기보다는 위압감마저 든다.
내가 갖고 있는 한정된 색으로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색들의 조합이다.
역시 자연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아침과 저녁 시간을 이용해 바다를 즐겼던 우리는 낮에는 주로 낮잠과 영화, 책을 읽으며 한낮을 보냈다.
10월 중순의 몰디브 날씨는 한낮에는 뜨겁다.
하지만 습기가 없어 야외 나무 그늘에 들어가면 무척 선선하고 쾌적하다.
독특하게 이 섬에는 나무에 매단 그물로 만들어진 의자들이 많다.
나일론으로 얼키설키 엮어 나무에 매단 의자인데 처음에는 불편하다가도 금세 편안해진다.
주민들은 답답한 집에서 밖으로 나와 시원한 바람과 풍경을 즐기며 나무 아래 벤치에서 담소를 즐기고 오가는 관광객들도 구경을 한다.
우리도 그 틈에 끼어 매달아 놓은 독특한 벤치들에 누우면 저절로 눈이 감기는 그런 편안한 의자다. 볼 때마다 앉고 싶어지는 의자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 의자들이 그리워질 것 같다.
그런데 주로 이 의자들에는 남성들이 앉아 여유를 누리고 여성 주민들은 주로 구석 골목 그늘에 앉아 있다.
독특한 풍경이다.
굴히의 맑은 바다는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보이고 심지어는 가오리(Stingray)와 상어(nurse shark) 떼도 매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굴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정박된 요트 밑바닥에 떼 지어 있는 상어들도 보고 많이 놀란 적이 있는데 더 신기한 것은 가오리와 상어 떼들이 썰물이 된 얕은 바다에 몰려와 재롱을 피우는 것을 매일 밤마다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현지인이 말하길 어부들이 잡아온 고기를 이곳에서 손질하고 남은 버려지는 생선을 먹기 위해 매일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무섭고 공포스러운 대상으로 여겨졌던 상어 떼들이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올 줄이야...
사실 이곳에서의 상어는 사람들에게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주둥이가 작아 상어를 특별히 괴롭히지 않는 이상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
나흘간 굴히에서 머무는 동안 저녁때마다 만났던 가오리와 상어들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굴히에 머무는 날 중에는 '2024 Footsal'경기가 있기도 했다.
밤이 되면 환하게 경기장에 불이 밝혀지고 주민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 각자의 팀을 응원했다.
우리가 본 경기는 굴히의 팀과 이 섬으로 원정을 온 팀과의 대결이었는데 선수들은 제법 진지하게 경기를 하고 아나운서 또한 경기를 열심히 중계했으며 관람객들은 열정적으로 응원을 해 경기장 분위기가 매우 뜨거웠다.
조용하고 적막한 이 섬에 이렇게 한껏 달아오르는 분위기가 있다니...
결승전이 있었던 그날 밤엔 어느 팀이 승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벽까지 축제의 분위기가 이어져 잠을 설쳐야 하기도 했다.
조용한 섬 동네에서 모처럼 벌어진 커다란 행사에 잠시나마 독특한 경험을 했다.
몰디브에서는 모히또를 마셔야 한다는 근거 없는 유행어를 따라 우리도 모히또를 마시러 마실을 나섰다.
하지만 몰디브에서 술은 생각할 수 없다.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실 몰디브에서 알코올이 들어간 모히또를 마시기란 쉽지 않다.
칵테일 모히또(cocktail mojito)는 섬 하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단독 리조트에서나 혹은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Party boat(Floating Bar)에서만 마실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역시 굴히 섬에 머물고 있는 이상 알코올이 들어간 '칵테일 모히또(cocktail mojito)' 대신 칵테일 모히또를 흉내 낸 '목테일 모히또(Mocktail mojito)'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칵테일이든 목테일이든 어떠랴...
부드러운 밤바람이 살갗을 스치는 야외 테이블에서 달착지근한 모히또를 먹는 기분은 비록 알코올이 없어도 저절로 취할 수 있는 충분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오전 9시부터 12까지, 약 세 시간가량 이루어지는 반나절 투어를 신청했다.
'코랄가든(Coral Garden)'이라고 불리는 바다에서 스노클링(snorkeling)을 하며 아름다운 바다 생물들을 본 후 더 먼바다로 나가 돌고래들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모래섬(Sand Bank)에 들러 수영을 하고 점심을 먹으며 놀다 오는 여정이다.
우리는 여덟 살 쌍둥이 남매와 세 살이 된 남자아이들을 데리고 온 스웨덴 가족, 그리고 세 명의 안내원들과 함께 투어를 떠났다.
스피드 보트로 섬에서 약 15분 정도 신나게 달려 '코랄 가든'이라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청명한 바다다.
굴히는 바다 어느 곳을 가도 맑지만 이곳은 코랄가든이라고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산호를 비롯해 많은 물고기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바다에 뛰어들어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 가지각색의 물고기들이 돌아다닌다.
아쿠아리움에서도 본 적이 없는 물고기들,
어찌 이렇게 독특하고 다양한 색들로 치장을 했는지...
몸짓이 큰 고기, 작은 고기 할 것 없이 현란하고 다양한 그들의 생김새와 몸짓에 내 눈이 어지럽기까지 하다.
각각의 독특한 생김새와 색상들을 가진 물고기들이 널려있어 그야말로 바닷속은 현란했다.
갑자기 가이드가 거북이가 나타났다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 급히 따라가 보니 거북이가 있다.
바다 밖에서와는 달리 물 깊은 곳을 유영해 나가는 거북이는 바닷속에서는 제법 빠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만난 거북이는 마치 실컷 구경하라는 듯 느릿느릿 헤엄치며 오랫동안 우리 앞에 머물러준다.
아무리 구경해도 바닷속은 항상 새롭다.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사실, 이곳은 산호가 군집해 있기 때문에 불리는 이름인데도 나는 신기한 물고기들을 내내 쫓아다니느라 산호가 얼마나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 ㅎㅎ
바닷속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50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드디어 고대하던 바다 돌고래쇼를 보러 간다.
가이드는 운이 좋으면 볼 수 있다고 했다. 제발 운이 우리에게 따라주기를....
코랄 가든에서 나와 약 10여분 배를 타고 가니 돌고래가 우리 앞에서 춤을 춘다.

와.... 이럴 수가..
한국의 아쿠아리움에서만 보던 돌고래 쇼를 진짜 바다에서 마음껏 보았다.
떼를 지어 쇼를 보여주는 돌고래들과 각자의 기량을 한껏 뽐내는 돌고래들...
마치 돌고래 쇼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많은 돌고래들이 우리 요트의 주변에서 즐거운 몸부림을 친다.
이렇게 많은 돌고래들이 우리 앞에서 재롱을 떨어주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계속 터져 나오는 환호와 감탄이 그치질 않는다.
정말 신기하고 놀라움 그 자체였다.
몇 년 전 필리핀 보홀에서도 돌고래를 구경하러 바다에 나갔지만 희미하게 아주 멀리서 헤엄치는 돌고래 몇 마리만 보고 돌아와야 했는데 지금 몰디브 바다에서는 나의 주변이 돌고래들 천지다.
몸을 비꼬며 하늘로 치솟았다가 바다로 떨어지는 그들의 재롱을 우리 앞에서 마음껏 보여주며 심지어는 우리 요트까지 다가와 재롱을 떨어준다.
다시 못 볼 기회다.
한참이나 돌고래쇼를 구경하고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 샌드뱅크로 향했다.
산호가 많은 몰디브 바다는 샌드뱅크를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래의 퇴적이나 지각변동으로 인한 융기로 인해 그 결과 많은 샌드뱅크가 이루어진 것 같다.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모래섬에 우리 일행만 도착했다.
안내원들이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바다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적절한 수온,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
나를 감싸는 부드러운 물결들,
바다에서 결코 나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 사이 모래섬에 빨간 파라솔이 펼쳐진 그늘에서는 점심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주스와 치킨 샌드위치의 간단한 점심메뉴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나에겐 만찬이었다.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아름답고 조용한 샌드뱅크....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장소다.
다음 날 오후, 여전히 바다로 향했다.
해변에서 멀리 있는 샌드뱅크를 눈으로만 보며 직접 가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만 가지고 있었던 샌드뱅크를 오늘 우리는 직접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샌드뱅크까지 가기 위해 카약을 빌렸다.
남편과 나는 앞뒤로 앉아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다의 깊이에 따라 바다색이 달라지는데 투명한 옥색, 청명한 하늘색, 맑은 네이비색 그리고 진한 코발트색 등 그러데이션 되는 다양한 바다색들을 거쳐 마침내 바다 한가운데 있는 샌드뱅크에 도착했다.
우리가 저어 온 카약을 안전하게 정박시키고 샌드뱅크를 돌아보았다.
둘러봐야 몇 분이면 모두 돌아볼 수 있는 샌드뱅크지만 바다 한가운데 우리 부부만 있다는 사실에 흥분이 된다.
잔잔한 바다, 사람 없는 모래섬에서 앉아 무알콜맥주를 마시며 잠시동안 바다 한가운데에서 적막감과 함께 희열을 느꼈다.
이런 기분은 몰디브 이외에는 느낄 수 없는 흥분이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몰디브 주민이 우리나라의 갯벌을 본다면?'

행복한 반나절을 보내고 호텔로 귀가....
몸과 마음을 잔뜩 자연에 맡긴 채 휴식을 했지만 좀처럼 누려보지 못했던 낯선 생활에 조금은 피곤하다.
아무리 좋은 삶이라도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그늘 아래 나무 그네에 누워 낮잠을 청해 본다.
꿈에서도 오늘 보았던 돌고래들과 함께 놀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나흘간 머물렀던 '굴히 Gulhi'는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로 표현하기 부족한 섬이었으며 '아름다움'이라는 내가 갖고 있는 범주 그 너머를 선물한 섬이었다.
굴히의 바다는 언제나 잔잔하고 편안하고 그리고 포근했으며 굴히 섬마을 분위기는 적막하지만 안락했다.
굴히에서 지낸 며칠은 오래오래 기억될 보석 같은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