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를 방문하다
체스키 크룸로프(Český Krumlov)로 가는 길.
숙소에서 이 마을까지는 약 1시간 10분이 걸린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블타바(Vltava) 강 유역에 있는 마을로 고딕 ·르네상스·바로크 양식 요소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13세기 무렵의 중세도시이다.
5세기 이상 평화로운 역사를 가진 덕분에 중세시대 도시의 구조와 역사적 건축물들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이 마을은 중부 유럽에서 이름난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크룸로프 성(Krumlov Castle)'을 비롯해 중세의 건축물과 역사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체스키 크룸로프 구 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인구가 1만 3000명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마을이지만 일 년에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 체코에서는 프라하 다음으로 중요한 관광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
월요일 아침 7시를 조금 넘겨 출발했는데 신기하게도 외곽 도로는 자동차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한가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월요일 출근시간인 이 시간, 도로에 차가 이토록 없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면서 도착했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오늘이 '부활절 월요일(Velikonocni pondeli)'인 이유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우리가 방문한 체스키 크룸로프 성 내부도 부활절 월요일인 이유로 굳게 문이 닫혀 하는 수 없이 성 외곽만 둘러보고 와야 했다.
'부활절 일요일'은 알고 있었지만 부활절 월요일까지 공휴일로 정해 쉴 줄이야.
알고 보니 '부활절 월요일'은 체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절 중 하나이며 공휴일이었다.
이날 남자아이들은 한 손에 바구니, 다른 한 손에는 오색 끈을 매단 버드나무 막대기(Pomlazka)를 든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성들에게 다가가 오색실로 상대방의 몸을 가볍게 때리며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주문을 하면 여성은 달걀이나 초콜릿 등을 바구니에 넣어주는 독특한 문화다.
오늘 방문한 체스키 크룸로프 골목길에서도 바구니와 채찍을 들고 다니며 가게에 들어가거나 거리에서 만나는 여성들에게 채찍으로 다리와 엉덩이를 건드리며 덕담을 하는 남자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부활절 월요일(Velikonocni pondeli)은 체코인들만의 재밌고 독특한 풍습이 담긴 의미 있는 날인 것 같다.
제일 먼저 체스키 크룸로프 정원을 방문했는데 아름답다거나 화려한 정원이라기보다는 소담하고 아담하게 잘 정돈된 정원이었다.
여기저기 튤립이 피어있고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가지런히 정원을 채운 수수하고 소탈한 분위기를 풍기는 정원이다.
조금 더 정원으로 들어가니 'Letohradek Bellarie'라는 로코코 양식의 여름 궁전이 나타났는데 이곳에서는 뮤지컬과 연극들이 공연되기도 하며 가이드와 함께 이 궁 내부를 투어 할 수 있다고도 한다.
궁 앞에는 공연 관람을 위한 자그마한 관객석도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관객석에 앉아 아름다운 별장에서 선보이는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꽤 좋은 경험일 것 같다.
여름 궁전을 지나 정원의 맨 안쪽까지 걸어가니 크지 않은 한적한 연못이 있는데 단조로움을 덜어주려는 듯 연못으로 드리워진 나무가 풍광을 더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정원 관람을 마친 우리는 크룸로프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규모가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이 성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지만 왠지 자그마한 마을의 크기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크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 비텐베르크 가문이 고딕양식으로 처음 지은 이 성을 로젠베르크 가문이 이어받으면서 르네상스 양식의 스타일로 복원을 했고 이후 슈바르첸베르크 가문이 다시 바로크 양식으로 변형을 한 성이다.
이런 이유로 이 성은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 등의 요소들이 모두 담겨 있는 다채롭고 멋진 성으로 이름나있다.
특히 이 성은 로젠베르크 가문이 주인이 되면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맞이했는데 '로젠베르크'는 독일어로 '장미의 성'이란 뜻이 되다 보니 이 가문의 상징 또한 '장미'가 되었다.
이후 로젠베르크(Rožmberk) 가문은 보헤미아 남부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이 빨간 장미가 체코 보헤미아 지역의 문장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도 장미의 문장이 눈에 자주 띄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스테브니체 마을에서도 곳곳에서 붉은 장미의 문장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해마다 이곳에서 6월이 되면 장미 축제가 열린다는데 체스키 크룸로프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로젠베르크 가문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나 보다.
우리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망토 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는 경사진 성의 상부와 하부를 연결하는 다리로 과거에는 성을 보호하기 위한 요새 역할을 한 곳이었다고 한다.
이 다리는 원래 15세기에 목조 다리로 지어졌으나 복구 과정을 통해 석조 기둥 위에 3층 규모의 아치를 만들었는데 '망토 다리'라는 이름은 아치 모양에서 유래된 것이다.
특히 이 망토다리는 체스키 크룸로프의 아름다운 마을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해져 이 다리 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기도 하다.
'체스키'는 체코어로 '보헤미아의 것'을 의미하며, '크룸로프'는 강의 구부러진 습지'를 의미하듯 이 마을은 블타바강이 구시가지를 S자 모양으로 감싸고 흘러 마을을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망토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체스키 크룸로프 마을은 중세의 좁은 골목과 붉은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올 법한 마을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마을을 커다란 S자 모양으로 둘러싸며 흐르는 블타바강,
그림에서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성과 우아한 타워, 그리고 슬픈 사연이 담긴 이발사의 다리,
바닥이 온통 돌들로 채워진 조그마한 골목길과 여전히 중세의 잔재가 남아있는 거리.
어딜 보나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마을 풍경이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에 들어서자 우아한 흐라데크(타워)가 보인다.
흐라데크(Hradek) 탑이라 불리는 성 탑 162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체스키 크룸로프의 멋진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린 올라가지 못했다.
파스텔톤의 연둣빛과 분홍빛과 보랏빛이 오묘하게 섞인 아름다운 색감의 외벽, 그리고 그 벽에는 프레스코화도 있지만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다.
탑 상단에는 녹색 지붕과 금색 첨탑 그리고 시계와 깃발도 보여 마치 동화 속 성탑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지금까지 봐 온 어느 타워보다도 제일 아름답다.
사진을 아무리 찍어도 자꾸 찍게 만드는 이유는 타워의 아름다움만이 아닌 타워와 주변 풍경과의 조화로움에 더 매혹이 되어 그런 것 같다.
성 밖으로 나올 즈음 해자에는 곰(bear) 우리가 있다.
16세기 후반, 로젠베르크 가문의 상징이 곰이라서 그때부터 곰을 성에서 키우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도 곰을 사육한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곰을 볼 수가 없다.
아쉽게도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곰들도 오늘이 공휴일이란 걸 아는 걸까?
성을 나와 뒤 돌아보니 성 문의 아치에 여러 개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다섯 송이의 장미, 해골모양, 까마귀 모양 등 아마도 이 성의 주인들이 바뀌면서 생겨난 문장의 모양인 것 같다. 그 당시 이들 가문을 대표하는 의미 있는 상징들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세월의 속절없음이 더 와닿는다.
성의 외곽을 둘러본 후 블타바 강이 둘러싸고 있는 마을 내부(올드타운)를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마을에 들어서자 골목에는 중세 마을의 비밀스러움과 신비로움 대신 숙박업소들과 기념품 가게 그리고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채워져 여느 관광지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한 골목길 분위기로 변해버렸다.
나의 욕심이 지나친 걸까?
고풍스러운 옛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그래도 관광객들이 거리에 즐비하다.
특히 좁은 골목에 있는 많은 관광객들 중 한국인이 제일 많은 듯 생각되는 건 여기저기에서 쉽게 들리는 한국말 때문일까? ^^
마을을 둘러보다 15세기 초에 건축된 성 비투스 성당을 만났다.
멀리서 볼 땐 잘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보니 첨탑의 높이가 무척 높다.
고딕 양식의 둥근 그물 모양의 아치 천장으로 널리 알려진 이 교회는 유럽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성당이라고 한다.
교회 내부에는 성경의 이야기가 그려진 15세기의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재단 옆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선명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색상과 형체 모두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성당을 나와 골목길을 더 걸으니 20세기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인 에곤 쉴레(Egon Schiele)와 관련 있는 미술관도 보이는데 오스트리아의 화가인 그의 미술관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체스키 크룸로프 출신이라 그가 여기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 마을에서 잠시 미성년의 누드화를 그렸던 에곤 쉴레는 마을에서 쫓겨났지만 오스트리아에 가서도 아름다운 체스키 크룸로프 마을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거리를 걷다 보니 젤라토가 굴뚝빵에 올려져 있는 재밌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다.
지나칠 수 없어 아이스크림빵을 사서 벤치를 찾아 앉으니 더 좋은 건 우리 앞에 멋진 풍경이 떡하니 앞에 있다.
남편은 화첩을 꺼내 스케치를 한다.
여행 중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띄면 서슴없이 스케치북을 꺼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가장 부러워했는데...
이럴 때만큼은 나도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도 자꾸 보면 틈이 보이나 보다.
새로 복구된 건물들이 과거의 건물과 동떨어진 색상과 형태로 지어져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든다.
기존의 건물들과 좀 더 조화되는 색상과 디자인으로 지어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블타바 강변을 따라 잠시 걸어본다.
넓고 거대한 강줄기의 블타바강을 보다가 이곳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흐르는 블타바강을 보니 마을의 분위기만큼이나 강도 아기자기하게 느껴진다.
걷다가 강으로 내려오니 멀리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있는 슬픈 전설을 가진 다리 'Barber's Bridge(이발사의 다리)'가 보인다.
다리 근처로 가니 역시 관광객들이 많다.
아버지의 직업이 이발사였던 여성을 왕비로 맞은 왕, 하지만 정신질환을 가졌던 왕이 왕비를 절벽에서 밀었는데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범인을 찾기 위해 오히려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추궁하고 죽이기까지 하자 왕비의 아버지가 거짓 자백을 하여 희생해 마을 사람들을 구했다는 전설이 있는 다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이 이발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 준 다리라고 하니 다리 위에서 아코디언으로 슬픈 곡조를 연주하는 젊은이가 왠지 더 슬퍼 보인다.
마지막으로 체스키 크룸노프의 유일한 광장인 '스보르노스티 광장(Náměstí Svornosti)'을 방문했다.
체코어로 '화합'을 의미하는 이 광장은 영화 '아마데우스'의 배경이 된 장소이기도 하다.
중세 시절부터 시장이 들어서고 집회, 축제 등 많은 행사가 열리던 핵심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어울리는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 상점들이 둘러선 활기찬 광장이 되고 있었다.
광장 한쪽에는 페스트를 물리친 기념을 위해 세워진 성모 마리아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작년에 루마니아를 방문했을 때 도시 오라데아의 광장에서도 페스트 퇴치 기념의 마리아 동상이 세워진 걸 봤는데 이곳에서도 또 보게 된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신의 벌이자 종말의 징조로까지 여겨졌던 Pest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세상이 환히 보였을까 싶다.
흑사병이 끝난 뒤 신에게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는 전염병이 다시 오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와 염원의 의미로 이 동상을 세웠을 것이다.
이 광장은 르네상스, 고딕, 바로크 양식들이 섞인 알록달록한 파스텔 계열의 아름다운 파사드의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광장 중앙에 마켓이 들어선 바람에 광장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건물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는 없어 아쉬웠다.
조그마한 광장에 마켓이 열리고 있어 더욱 북적거렸는데 오늘이 부활절 월요일이라 시장이 열린 것도 같다.
스페인 음식 빠에야도 보이고, 크레페, 랑고쉬, 케밥 등 여러 나라의 요리들을 팔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광장을 벗어나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서니 멀리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어깨에 매인 장바구니에서 덜그럭 소리가 난다.
적막한 골목길에 울리는 덜그럭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린다.
맥주병이 들어 있는 걸까?
덜그럭 거리는 장바구니를 매고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 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
오후 3시를 넘겨서야 체스키 크룸로프 관광을 마쳤다.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듯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
블타바강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과 색 바랜 고풍스러운 타워는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