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 쉬르 루앙(moret sur loing, Moret-Loing-et Orvanne), 그레 쉬르 루앙(Grez sur loing), 부롱마흘롯(Burron marlotte), 그리고 바르비종(Barbizon)이 우리가 갈 곳들이다.
마을들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규모가 작은 마을들로 걸으며 산책하기에 최적인 마을들이다.
5월인 지금 이 마을들 대부분이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여 푸른 잔디가 주변에 가득하고 조용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강 '루앙(Loing)'이 마을을 관통하고 있다. 강에는 오래된 돌다리가 얹혀 있어 한층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이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어찌 그냥 흘려보낼 수 있을까?
그 이유에서인지 퐁텐블로를 포함해 모레 쉬르 루앙(moret sur loing)과 그레 쉬르 루앙(Grez sur loing), 바르비종(Barizon)에는 많은 화가들이 거주했으며 아름다운 마을 풍경들은 그들에게 그림 소재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여전히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그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연하고 있는 듯하다.
대로가 아닌 좁은 골목길들, 돌로 만들어진 가옥들, 세련되지 않은 투박한 성당, 무너져 가는 고성 그리고 이 모두가 어울려 자아내는 마을 분위기...
심지어 마을에 존재하는 공기와 내음 조차도 현대의 그것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오래전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고 더불어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흥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우리는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가 말년에 머물렀던 모레 쉬르 루앙(moret sur loing)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퐁텐블로에서 약 20분가량 떨어져 있으며 약 4,000명가량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아름다운 마을이다.
매우 아담하고 조용하며 중세의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마을이다.
마치 전원 풍경의 고즈넉한 분위기의 동화 속 마을 같은 곳이다.
나는 인상파 화가 들 중에서 알프레드 시슬레의 그림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는 이곳 모레 쉬르 루앙의 풍경을 많이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 해짐을 느낀다. 한마디로 힐링이다.
같은 시대의 인상주의 화가이지만 모네의 그림과는 분위기와 색감이 다르게 다가온다.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화려한 정원을 가꾸며 그림을 그렸다면 시슬레는 모레 쉬르 루앙의 강물과 이곳의 공기, 그리고 마을의 조용하고 소박한 분위기들을 화폭에 담았나보다.
화려한 색의 향연이 아닌 조금은 가라앉은 차분한 색조, 그리고 이렇다 할 특징 없는 덜 표현적인 그의 그림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오래전 파리 방문 시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만났고 눈에 확 띄진 않았지만 볼수록 뒤돌아서 다시 보고 싶은 그림들이었다.
그때의 여운으로 시슬레의 체취와 그가 사랑했던 마을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이 마을을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약 40세가 넘어 이곳 모레 쉬르 루앙으로 이주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사후에야 인정받기 시작했던 그림들 탓에 살아서는 빈곤한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인상파 화가 중 모네에 가려져 모네만큼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오로지 풍경에 전념했으며 큰 변화 없이 일관적인 그의 화풍에 나는 더 정감이 간다.
"Le pont de Moret" by 알프레드 시슬레
시슬레가 그렸던 그림 장소에 잠시 포즈를 취해 본다.
그림과 거의 흡사하며 변한 게 거의 없다.
강가 옆에 놀고 있는 어미거위와 새끼 거위들이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고 있고 낯선 이방인 한 사람이 서있는 게 다를 뿐....
참으로 평화롭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마을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일까 싶을 정도로 인적이 뜸하다.
예쁜 강(loing)을 중심으로 오래된 나무들, 작은 물레방아 그리고 고풍스러운 집들과 성당이 한층 더 고상하고 품위를 느끼게 해주는 아담한 마을이다.
이 마을을 방문하는 누구나 어디서든 이젤을 놓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할 마을이다.
이런 마을에서 화가가 머물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어딜 둘러봐도 저절로 붓이 움직여질 정도로 영감이 떠오르는 마을...
이 마을 사람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배경 삼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을까?
보리 설탕 박물관(Musee du Sucre d'Orge)
주변의 풍경과 아름답게 어울려 있는 위의 사진은 '보리 설탕 박물관(Musee du Sucre d'Orge)'이다.
보리 설탕은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1792년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없어지면서 생산이 중단되었고 심지어는 보리 설탕의 제조방법도 없어질 위험에 있었으나 나폴레옹 3세의 장려로 다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니 정말 다행이다.
수녀원에서 사람들에게 제조법을 전달해 주었고 이 마을에서는 보리 설탕을 지금도 만들어 팔기도 한다.
나도 들어가 구경해보고 구입도 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문이 닫혀 캄캄하다.
성 안으로 들어와 마을 중심가에 도착하니 이제야 가게들이 보이고 도로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시슬레가 자주 들렀을 것 같은 자그마한 식당에서 연어가 든 베이글과 와플로 점심식사를 하고 중심가와 골목길을 걸으며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그가 겪었을 인간적 고뇌를 음미하려고 노력해본다.
식사 후 loing강을 따라 프랑스인들이 가고 싶어 하는 마을 중 하나인 '그레 쉬르 루앙(Grez sur loing)'을 방문했다.
모레 쉬르 루앙과 분위기가 많이 비슷하지만 규모가 더 작은 마을이다.
Grez sur loing
그레 쉬르 루앙은 '이케아'에 영감을 준 스웨덴의 화가 '칼 마르손(Carl Larsson)'이 머물렀던 마을이라고 한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그의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해 스웨덴의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화가이다.
나의 집, 나의 가족(좌), 크리스마스 이브(우)- 칼 마르손
그런데 마을이 그야말로 적막하다.
어딜 다녀봐도 인적을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숨소리마저도 크게 내기 어려운 정적이 흐르는 마을이다.
루앙(loing) 강이 흐르는 이 마을은 인적도 가게의 번잡함도 없는 중세 그대로의 마을, 적막하다 못해 마을 분위기가 조금은 어두운 마을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방인인 우리가 감히 들어와서는 안 될 마을처럼 폐쇄적이기까지 한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마을 골목에 잠시 차를 세우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마을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 소리뿐이다.
차를 운전해 마을을 돌아다니기 미안해 걸어 다니기로 했다.
아니, 이런 장소를 차로 구경한다는 것은 마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고풍스러운 집들과 나무들, 조그만 골목길과 강물만 남긴 채 마을 사람들은 다시 중세로 돌아갔나 보다.
오래된 돌 시계탑이 있는 조그마한 노트르담 성당, 돌다리, 그리고 오래되어 많이 허물어진 그래도 나름 멋진 Ganne탑과 그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강 loing....
Ganne탑과 마을 교회
모레 쉬르 루앙을 시작으로 시작한 아담한 마을들의 산책은 '부롱마흘롯(Burron marlotte)' 마을까지 이어졌다.
방금 전에 들렀던 마을들과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이곳 역시 고풍스러운 주택들이 모여있는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마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광장에는 마을의 관공서(mairie)가 있고 블랑제리와 레스토랑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마을을 좋아하나 보다.
옛 것에 매력을 느끼는 그들의 성격이 이런 데서 나타나는 듯하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도 옛 것에 대한 매력과 소중함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신박한 기술과 새로운 것에 관해서라면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즘 상황에서 벗어나 이젠 우리의 옛 것에서도 좀 더 많은 매력을 찾고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 바르비종(Barbizon)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퐁텐블로에서 약 10여 km 떨어진 곳이며 '바르비종파'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루소, 밀레, 코로 그리고 도비니 등 바르비종파의 많은 화가들이 모여 살았으며 특히 밀레가 약 25년간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마을이다.
이 마을의 전성기는 1830년~1860년경이었는데 이때 당시 80명 이상의 화가들이 이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때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와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그리고 불안한 정치 상황을 피해 한적한 이곳으로 모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딴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라고 불리는 화가들에 의해 이 마을은 유명해졌다.
거주인보다는 관광객들이 더 많이 오고 가는 이 마을에서 우리의 방문시간이 늦은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관광객마저도 뜸하다.
약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전체를 산책하는데 걷는 시간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크지 않은 마을이다.
프랑스인들에게 있어서 '변화', '리모델링'의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인가 보다.
무언가 더 새롭게 만들고 기능을 향상하기 위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프랑스인들과는 멀어 보인다. 오히려 옛 것을 보존하기 위해 무척 노력하는 흔적들이 그대로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몇 년 전 나의 고향인 시골을 방문했을 때 무척 당황스럽고 놀란 경험이 있어다.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놀던 장소는 물론 학교에 다니던 길이 너무나도 변해버려 찾아갈 수 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주변의 건물들 모두가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앉아 있어 내가 태어나고 살던 고향이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였다.
마음이 씁쓸했다.
내가 고향을 찾는 목적 중 하나는 오래전 나의 옛 기억을 끄집어내고 향수를 느끼고 싶은 마음에서 방문하는 건데 나의 의도와 바람을 묵살시킨 지 오래다.
오래된 건축을 없애거나 노후화를 억제한다는 명목, 기능을 개선하고 향상시킨다는 목적으로 대부분 개조를 하거나 증축을 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해가는 현상이 요즘 시골 농촌의 트렌드인가 보다.
과연 옳게 변하고 있는 건지 한 번쯤 되짚어 봐야 할 것 같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 있는 몇 안 되는 가게들은 독특하고 개성 있게 전시해 놓은 진열품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마을에 있는 가게들이 무척이나 정겹다.
골목길 주택의 담벼락에는 보라색 열매가 축 늘어진 등나무와 담쟁이덩굴들이 봄 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다.
5월의 자연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걸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꾸미지 않았는데도 이곳은 화가들의 마을과 잘 어울린다.
밀레 기념관에 도착했다.
밀레 기념관은 밀레가 약 25년 동안 실제 살았던 거주지였으며 아틀리에였다고 한다.
밀레의 아틀리에(Maison et Atelier de Jean François Millet)입구와 주변 골목길
이런 골목길을 걷다 보면 밀레를 비롯해 루소, 간, 도비니 등의 모자이크화 된 그림들을 마을의 벽과 골목에서 쉽게 볼 수 있어 100년 전 화가들의 자취와 숨결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아울러 마을의 모든 것들이 캔버스에 그려진 것처럼 하나의 작품들로 여겨진다.
그래서 바르비종은 마을 전체가 갤러리이다.
밀레는 그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콜레라를 피해 시골 바르비종에 정착한 후에 주로 농촌과 농부에 관련된 그림을 그려 선보이자 그를 사회주의자라고까지 비난을 했다. 하지만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1860년대부터 그가 그린 그림은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직접 밖으로 나가 농촌 풍경과 농부들을 화폭에 남아낸 화가 밀레.
그 당시 여인네들이 이삭을 주울 수밖에 없는 농촌의 어려운 환경과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 두 손 모아 감사 기도로 평안을 찾는 부부...
밀레가 화폭에 표현한 내용과 독특한 색채들로 그의 그림이 오늘 더욱 경건하게 다가온다.
만종(The Angelus) (밀레) 과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
밀레의 집에서 가까운 테오도르 루소의 박물관에 들러 보기로 했으나 아쉽게도 문이 잠겨있어 내부에 들어갈 수 없어 골목길을 걸으며 루소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루소와 밀레의 기념비(Monument de Millet et de Rousseau)
루소는 밀레와 가장 친하게 지낸 인물이다.
그는 1833년 처음으로 퐁텐블로 마을을 방문했고, 10년 뒤에는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에 정착하여 밀레를 비롯해 쥘 뒤프레, 도비니 같은 화가들과 함께 일했지만 주로 퐁텐블로 근처에 머물며 그곳의 자연 풍경을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는 성경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며 매번 출품전에서 낙선을 했다던데....
풍경화는 제대로 정당한 취급을 받지 못했던 그 당시에 왜 자연을 찾아다니며 화폭에 담으려 노력했을까?
아마 그는 대자연에 대한 숭배와 변함없는 자연으로부터 평안과 깊은 진실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그림을 보니 나무의 묘사에 뛰어난 루소만의 감각이 느껴진다.
퐁텐블로의 숲을 비롯해 자연은 그에게 있어서 마치 떨어질 수 없는 가족과도 같았나 보다.
그가 그린 나무에게까지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55세의 나이에 가장 친했던 밀레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았으며 그 후 루소의 아내는 밀레가 돌봐주었다고 전해진다.
퐁텐블로 숲의 끝(좌), 퐁텐블로 숲(우) (테오도르 루소)
많은 화가들이 머물었던 그때 당시의 바르비종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오늘 우리가 방문한 바르비종은 한가롭고 여유 있으며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바르비종파의 화가들이 아니었다면 이 마을은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마을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을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마을로 만들 수 있었던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가져본다.
오늘 우리는 꿈꾸듯이 이 마을 저 마을 독특하고 개성 있는 프랑스의 옛 마을들을 찾아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