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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진정한 쉼터, 퐁텐블로!

프랑스 북서부 여행 17 :퐁텐블로(Fontainebleau)를 방문하다

by 담소

아침부터 구름이 많더니 오늘은 결국 비가 내린다.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였지만 드디어 파리 가까이에 오니 파리의 전형적인 날씨가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긴다.

일드프랑스 지방의 시골 풍경

하지만 비 오는 시골길 운전도 꽤 분위기 있다.

4월부터 5월까지가 절정이라는 유채꽃이 주변을 환하게 만들고 초록으로 짙어가는 무성한 나무들 그리고 오래된 성들과 아담하고 아름다운 집들이 나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에도 내리는 비를 우산 없이 그대로 맞고 다니는 파리지앵들을 자주 봤다.

우산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와 비가 들락거리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파리의 자연스러운 날씨인걸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드 프랑스

오늘부터는 일 드 프랑스(Ile-de-France) 지역의 마을들을 방문하기로 했다.

일드프랑스(Île-de-France)는 '프랑스의 섬'이라는 뜻이다.

센 강을 포함한 여러 강이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고, 그 강들이 이 지역의 대략적인 경계선이 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중심이 파리(paris)이고 파리를 중심으로 7개의 주가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주변 도시는 파리에서 약 1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이지만 화가들의 도시이자 왕들의 휴양지이며 굵직한 역사적인 일들을 담고 있는 곳이 많다.




우리는 먼저 퐁텐블로(Fontainebleau)를 방문했다.

퐁텐블로 주변과 마을 그리고 위치,

다행히 내리던 비는 멎었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숲이 점점 더 우거짐을 느낀다.

퐁텐블로는 프랑스 북부 일드프랑스 지방 센에마른(Seine-et-Marne) 주에 있는 도시로 19세기까지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평범하고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퐁텐블로가 프랑스 왕들과 연결되기 시작했고 왕들의 진정한 왕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퐁텐블로는 역사와 예술적 가치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퐁텐블로 성, 또는 궁전(Palace of Fontainebleau, Château de Fontainebleau)이다.


이곳에 머물렀던 왕들 중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성을 증축한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업적 중 최대 실수를 이곳에서 행했는데 바로 그가 이 성에서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1685)'을 내린 것이다.

위그노의 탄압을 그린 그림

1598년 앙리 4세는 개신교와 가톨릭교도 간의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반포했고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이 14세가 이를 무효화한 것이다.

퐁텐블로 칙령이 루이 14세의 최대 실책이라고 하는 이유는 위그노들 가운데는 숙련기술자들이 많았는데 이 칙령이 내려진 뒤 40만 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 미국 등지로 망명하여 어마어마한 규모의 두뇌 유출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위그노들을 받아들인 주변국들중 영국과 네덜란드는 상공업에 성공을 했고 이와 반대로 프랑스는 큰 타격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이들을 쫓아낸 프랑스는 이때부터 몰락기에 접어든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백 년 후에 일어났던 프랑스혁명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나폴레옹 1세의 몰락도 이곳 퐁텐블로 성에서 이루어졌다.

아래 사진의 광장은 퐁텐블로 성의 '백마 광장(cour du cheval Blanc)'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나폴레옹 1세가 폐위되어 유배되던 날 근위병들에게 이별식을 한 장소라고 하여 '이별 광장(cour des adieux)'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는 광장인 데다가 하필 날씨도 잔뜩 흐린 날이라 그런지 더 휑하고 적막하다.

관광객들도 적어 더 쓸쓸하다.



퐁텐블로 성의 전경(백마광장)과 말발굽 계단

나폴레옹 1세는 성의 말발굽 모양의 계단을 특별히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그 이유일까? 이 말발굽 계단은 현재 퐁텐블로 성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나폴레옹 폐위전, 이별의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1814.4.20)을 재연하고 있는 상황

결국, 1814년 3월 30일, 국제적 압박, 정부의 비협조, 그리고 자원 부족 등의 이유로 영국이 포함된 연합군에게 프랑스는 항복했고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 도착하자마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가 이틀 내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 성에서 나폴레옹의 퇴위 조건을 정했던 역사적인 '퐁텐블로 조약, (Traité de Fontainebleau)'이 이루어졌고 그는 엘바섬(Ile d’Elbe)으로 귀향을 가게 된다. 동맹국들은 퐁텐블로 조약에 의해 그에게 엘바섬을 영지로 주고 그곳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이다.


아래 초상화는 밤새 말을 타고 온 나폴레옹이 이슬에 젖은 잿빛 코트와 진흙이 묻어있는 지저분해진 부츠를 벗지 않고 여전히 분노와 좌절을 삭히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화가 들라로슈(Paul Delaroche)가 그린

'퇴위당해 퐁텐블로 성으로 물러난 나폴레옹('Bonaparte abdicated in Fontainebleau, Napoléon abdiquant à Fontainebleau')' 그림이다.

마치 ‘자신의 몰락이 코 앞에 있음을 알고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는 비탄에 빠진 남자’로 보이는 그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은 자신의 퇴위 각서에 서명을 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전 나폴레옹의 모습과 퐁텐블로 백마광장에서 재연된 나폴레옹 유배 장면


이후 그는 엘바섬에서 탈출해 백일천하(Les cent jours)를 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고 만다.

결국 그의 나이 52세, "내 유골을 센 강변에 묻어 내가 그토록 사랑한 프랑스 국민들 속에 있게 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여기에 눕다"(Ci-Gît)라는 말만 새겼다고 한다.

이렇게 나폴레옹은 그의 여인 죠세핀을 위해 가꾸고 사랑했던 이 퐁텐블로 성을 떠나 다시는 못 오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려던 나폴레옹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이를 계기로 프랑스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사상이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고 유럽 각국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잇따라 일어나게 된 시발점이 되었음을 볼 때 나폴레옹 1세의 삶은 의의가 있다고 여기고 싶다.




퐁텐블로 성은 프랑스 최초 르네상스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루이 6세부터 나폴레옹 3세까지 약 30여 명의 프랑스 왕족들이 무려 7세기 동안이나 거주했던 퐁텐블로 성은 12세기 중반 루이 7세가 왕을 위한 사냥터를 만들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프랑수아 1세(Francis I)는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리를 하여 가장 큰 규모의 퐁텐블로 성을 완성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성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랑수아 1세 갤러리(Galerie François I)'를 만들었는데 갤러리의 장식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많은 화가들을 끊임없이 초청을 해서 완성했다.

갤러리들 그림에는 사냥에 관련된 그림이 유독 많이 보인다. 이곳이 사냥터였기 때문이었을까?

이 장소는 몇 년 전에 방문했던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이 연상되는 홀이다. 하지만 베르사유 궁전이 화려함의 극치라면 이 갤러리는 고풍스럽고 어딘지 모르게 격조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갤러리가 더 편안하고 마음에 든다. ㅎㅎ

성탑 꼭대기 프랑수와를 상징하는 "F"(왼쪽)와 프랑수와 1세 갤러리(오른쪽)


퐁텐블로 성에는 프랑수아 1세를 비롯해 루이 13세, 루이 15세, 나폴레옹 등 많은 왕들이 사용한 가구, 장식품 등을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누렸던 삶의 모습과 왕들의 생활 변천사도 느낄 수 있었다.

태피스트리

여자인 나는 방들마다 화려하고 섬세한 태피스트리들에게 관심이 간다.

그 당시 어떻게 저렇게 큰 천에 정교하게 짰는지...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다.

갑자기 그리스 신화의 '아라크네의 전설'이 생각이 난다.

아라크네(Arachne)처럼 뛰어난 기술을 가진 직공들이었을까?

베를 짜다가 거미가 된 아라크네...ㅠㅠ




나폴레옹 박물관에 도착하니 당시 입었던 화려한 군복과 칼들이 눈에 뜨인다.

그가 야전 시 입었던 군복과 침대 그리고 그의 비데까지 전시되어 있다.

천하를 호령했던 그의 당당함과 위엄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폴레옹 박물관이 소장된 물건들

나폴레옹은 사랑했던 조세핀을 위해 이 성에 정성을 쏟았다던데....

하지만 짧고 굵게 살다 간 나폴레옹 1세!

그의 사랑이 조세핀에게 제대로 전달되긴 했을까?



무도회장(Salle de Bal)

조금은 좁고 컴컴하게 느껴지는 복도를 벗어나자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라고 할 만큼 넓고 휘황찬란한 공간이 우리를 맞는다.

무도회장(Salle de Bal)이다.

이곳은 앙리 2세 말기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벽의 프레스코화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올림포스 신들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는데 정교하고 세밀한 기교에 놀라울 뿐이다

이런 아름답고 화려한 장소에서 연주회를 하고 춤을 추었다니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설렌다.

현재도 이 장소에서 공연이 열린다고 하던데 오늘은 공연이 없다고 하니 조금은 섭섭하다. ㅠㅠ



퐁텐블로 성에서 또 하나의 걸작은 예배당일 것이다.

예배당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아래에서 보아도 너무나 아름답다.

트리티니 예배당

몇 세기에 걸쳐 왕들의 '진정한 쉼터'라 불릴 만큼 프랑스의 역대 왕들이 가장 애정을 가지고 방문했던 궁전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싶다.



아래의 사진은 도서관이고 이 성에서 가장 긴 방이다.

원래는 왕비들의 갤러리(Galerie Diana)였으나 개조를 해서 나폴레옹 3세 때 도서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역시 갤러리답게 달의 여신을 모티브로 한 공간이라 그럴까?

천장을 올려다보니 달의 여신 '다이애나'를 그린 천장화도 어렴풋이 보인다.

갤러리를 도서관으로 변경한 속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1800년대 조성된 도서관이라고 하기엔 세련됨과 화려함, 그리고 품위와 웅장함이 있다.

그런데 벽면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책들은 과연 왕들이 읽었던 책일까?

사냥과 연회 그리고 정사(政事)에 신경을 쓰느라 책을 읽을 시간이 있었을까? ㅎㅎ

아쉽게도 내부에는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Galerie Diana


궁전에는 1,500개의 방들이 있을 정도이니 퐁텐블로를 하루 동안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다.

왕들의 침실과 욕실, 회의실, 성당, 도서관, 타피스트리의 방, 박물관 등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성 내부의 여러 곳들을 둘러보고 성 밖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퐁텐블로 성’의 또 다른 매력은 성 주위의 여유로운 분위기와 숲의 경관이었다.

사냥터였던 곳이라 그런지 온 마을 전체가 숲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밭과 무성한 나무들...

과연 왕들의 사냥터답다..

문만 열면 내다보이는 마치 초원과도 같은 정원.

그런 정원을 거닐다가도 크기와 면적을 가늠할 수 없으리만큼 광대한 숲에서 사냥을 하는 그들.

말을 타고 달리면서 느껴지는 숲의 상쾌한 공기와 청량한 바람.

행복했을까?

부러우면 지는 거라던데 많이 부럽다.

sticker sticker

너무나 넓은 숲이라 우린 숲을 모두 돌아다닐 수도 없다.

이럴 땐 우리도 말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다면 좋으련만....ㅎㅎ

퐁텐블로 숲의 끝 by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퐁텐블로 옆 마을 '바르비종'에 살았던 테오도르 루소가 그린 '퐁텐블로 숲'을 보니 아마도 이곳에 자주 와서 그림을 그렸나 보다.

아름다운 성과 광활한 이 숲은 그림의 멋진 소재가 되었겠지...

더 나가 루소, 밀레를 비롯한 '바르비종파'의 화가들은 이 아름답고 멋진 숲을 보호하기 위해 '숲 보호 운동'에 나섰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는 그들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숲의 예술적 보존을 위해 전체 면적 중 일부인 약 11 Km2(전체의 약 5%)를 보호하는 칙령을 내렸다고 한다.

소위 요즘의 '국립공원'과 같은 의미일 것 같다.

근데 우리는 보통 자연의 '생태계 보전'을 위해 숲을 보호하지 않나???

숲의 예술적 가치를 위해 칙령을 내리다니....ㅎㅎ

역시 프랑스 왕들의 마음엔 예술적 가치의 중요성이 우선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퐁텐블로 숲과 정원




퐁텐블로 성은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이 지어지기 전까지 프랑스 왕궁의 최고봉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루이 14세의 욕망과 그의 영원한 권력을 위해 지었던 베르사유 궁전보다 오늘 방문한 퐁텐블로 성에 더 정감이 간다.

프랑스의 많은 왕들이 진심으로 정성을 쏟은 흔적들을 이 성의 많은 곳들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백여 년 동안 왕들의 거주지가 되면서 이 성은 다양하게 변모했고 건물도 늘어나면서 마침내 오늘날 웅장하고 위엄 있는 위대한 성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성임에 틀림이 없다.




왕들의 권력은 대단하지만 영원할 수 없으며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정성을 쏟으며 완성해 남기고 간 실체들은 몇 백 년이 지나도 고스란히 후대의 프랑스인들에게까지 전해져 현재의 생활과 삶에 반영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의 삶과 정신이 이방인인 나에게도 전달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아름다운 고성은 왕들의 진정한 쉼터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아울러 예술과 역사적 가치를 고스란히 후대에까지 전달하고 있어 프랑스 왕들의 또 다른 면모를 알게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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