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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곰 Apr 10. 2024

오늘 저녁 뭐 먹지?

'엄마 마음대로 해'라는 말의 함정

"엄마 배고파~오늘 저녁 뭐 먹지?"

"글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그냥 엄마 마음대로 해."

"그럼 오늘 저녁에 미니탕수육 먹을까?"

"아~ 나 오늘은 소스 범벅 싫은데. 딴 거 없어?"

"딴 거 뭐? 네가 먹고 싶은 걸 말해봐. 엄마가 해줄게."

"내가 집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 엄마가 정해줘."

"장조림 어때? 콩나물이랑 김 싸서 먹자"

"아 양념김은 반찬이랑 궁합이 안 맞아. 최악이야."


" 만둣국이 좋은데."

"만둣국 싫어 맛없어. 너만 좋아하는 거잖아."

"그럼 오빠는 뭐 먹고 싶은데?"

"아 몰라, 생각이 안 나."

"그럼 오므라이스 먹자."

"것도 싫어. 난 달걀이 싫다고."

"그럼 달걀 빼고 먹던가."

"아, 난 너랑 같이 있는 게 제일 싫어. 우리 집에 없었으면 좋겠어."


아 머리가 찌근찌근 아프다.

오늘 저녁 뭐 먹지로 시작된 대화가 결국은 남매의 싸움으로 번졌다.

뭔가 제대로 틀어진 아들. 다 맘에 안 든다고 한다.

딸은 계속 싫다고 하는 오빠가 이해가 안 가는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


"우리 그럼 시켜 먹자. 집에 맛있는 것도 없고, 배고프다면서."

"아, 시켜 먹는 건 살찌는데. 건강에도 안 좋고 돈도 들잖아."

"그럼 레시피 검색해서 요리해서 먹을까?"

"엄마 요리 못하잖아."


와, 이 정도면 이젠 나랑 싸우자는 건가.

이건 대화가 아니라 기분 나쁘다고 시위하는 거다.


난 입을 닫았다. 그래도 아들은 계속 투덜투덜, 딸은 그 말을 듣고 쫑알쫑알.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 이럴 때는 조심해야 한다.

나중에 후회할 말이 입 밖으로 나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돈이 문제네, 돈만 있으면 집도 큰 거 사서 동생 얼굴도 안 보고, 맛있는 음식도 요리사 보고 해 달라 그러면 되고."

아들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오늘도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이 튀어나가 버렸다.

"내가 너 돈 줄 테니까 요리사 아저씨 구해서 나가서 살아라. 나도 너한테 이런 말 들으면서 살기는 힘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걸 알면서도 정색하고 아들에게 이런 말을 던지는 나 자신이 참 싫다.

아이랑은 싸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유치한 말들밖에 할 수 없는 나의 그릇이 부끄럽다.


더 이상 말하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분노의 타이핑을 시작했다.

마침 노트북이 켜져 있어서 내 감정을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들리는 아들의 말이 하도 어이없어서 받아 적었다.

화가 났다는 것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일부러 키보드 소리 탁탁 내면서 아들의 쏘아붙이는 말들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

"냉장고에 뭐 있냐고? 나물, 멸치, 장조림, 김치, 카레, 깍두기."

"근데 깍두기 할 때 받침이 기역인가, 쌍기역인가?"

갑자기 헷갈리는 맞춤법.

지금까지 화를 내던 아들이 진지하게 "기역 같은데요."라고 말한다.


그리곤 지금 뭘 쓰는 거냐고 묻는 아들.

너와 있었던 일들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네가 엄마한테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한데 너한테 똑같이 아프게 말하기 싫어서 그냥 적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자기가 한 말을 눈으로 쭉 읽던 아들이 멋쩍은 듯이 말한다.

"내가 진짜 이렇게 말했어요? 너무 심한데"

"그렇지? 너무 화가 난 상태로 말을 하면 이렇게 실수하게 되지."


어느새 내가 쓰고 있던 노트북 주위로 아들이랑 딸이 모였다.

"엄마, 음식에 관한 글이니까 음식 사진을 넣으면 어떨까요?"

"우리 먹고 싶은 음식 다 꺼내볼까요?"

갑자기 존댓말을 쓰면서 팬트리에서 각종 즉석요리들을 꺼내온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들은 다 몸에 안 좋은 것들이네."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하나씩 골라봐."

"아니에요. 저 그냥 어제 만든 카레 먹을게요."


그렇게 상황 끝.

너무 웃기지 않은가.

날 미친 듯이 화나게 만든 저녁 뭐 먹지 사건이 글쓰기로 끝이 났다는 것이.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던 나도 글을 쓰고 정리하다 보니까 마음이 가라앉는다.

다시 읽어보니 정말 웃기는 말들이다.

아이의 가시 돋친 말속에 담긴 마음은 다 놓친 채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화를 냈다.


아, 아직 멀었다. 엄마의 길은 정말 길고도 험하다.

그래도 전처럼 몇 시간을 혼자 울면서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는 대신 글쓰기를 하니 훨씬 마음이 편하다.


내일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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