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마!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정리를 미룬 지 몇 달이 지났다. 일단 서랍에 넣어두기만 한 물건들이 수북이 쌓여갔다. 더 이상 서랍에서 물건을 찾아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서랍 문은 굳게 닫혔다. 문을 열면 나의 게으름과 직면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점점 서랍문을 무겁게 만들었다.
영원히 열고 싶지 않았던 서랍문을 열어 버린 건 딸아이! 갑자기 예전에 만들었던 쿠키가 만들고 싶다며 쿠키틀을 찾았다.
"엄마, 쿠키틀 어딨 어요?"
"글쎄, 기억이 안 나네."
(분명 서랍 어딘가에 있지만 말하기 싫다!)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걸까?
부지런한 딸은 서랍을 열어서 물건 더미를 뒤졌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딸은 쿠키틀을 찾아서 신이 났지만, 난 피하고 싶은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았다.
언제 저렇게 많은 물건을 넣어두었던가?
어차피 쓰지도 못할 것 그때그때 버릴걸 후회가 됐다. 심난한 서랍 정리를 위해 먼저 버릴 것을 골라냈다. 쓰레기 봉지 하나를 가득 채웠지만 아직 반도 비우지 못한 서랍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때 등판한 아들!
"엄마, 뭐 하세요?"
"정리해, 오랜만에 하려니 끝이 없네."
"제가 도와드릴까요? 엄마가 제 방 정리도 도와주잖아요."
"정말?"
정리를 정말 싫어하는 아들이 도와준다고 하니 믿기질 않았다. 매번 잔소리하던 엄마의 치부를 들켜버린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엄마, 정말 신기한 것들 많이 모아뒀네요. 엄마가 환경을 보호하고 계셨군요! 당분간은 집에 있는 빨대나 젓가락만 사용해도 충분하겠어요. "
지저분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환경을 보호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쓰레기가 유용한 물건들로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아들은 한참을 서랍 앞에 서서 정리를 했다. 비슷한 종류끼리 묶어서 지퍼백에 차곡차곡 넣었다. 아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니!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덕분에 아들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하고, 서랍 정리도 해냈다.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