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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사랑

나의 엄마 할머니 사랑해요.

오랜만에 할머니 산소에 국화꽃 한 다발을 내려놓는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목놓아 절규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이 지나버렸다.

내일이 아버지 생신이기에. 아버지를 낳느라 고생한 할머니 생각이 났다.

도둑 가시가 나의 팔이며 다리며 신발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고 할머니가 나에게 투정을 부리시나 보다..

두 아들 먼저 보내고 금지옥엽 키워 낸 외아들인 우리 아버지는 상사 면장의 늦둥이 아들이었다.

나의 할머니가 한국 전쟁 때 빨갱이들에게 전재산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꿋꿋이 지켜 낸 외아들이었다.

거듭되는 사업실패로 아버진 할머니와 우리 3형제를 이모할머니께 거의 버리다시피 하고선 떠나버리셨다.

순창. 나의 고향이다.

산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어 나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쓰며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깡촌이었지만 할머니가 함께 있기에 행복했다.

2 때 나를 버리고 떠나버린 엄마를 명절쯤이면 신작로 위 무덤에서 몇 날 며칠을 기다렸지만 끝내 오진 않으셨다. 자식이 셋 있는 새엄마가 자식이 많다며 3학년인 우리 언니를 다른 집에 식모로 보내버렸다.  

우리 아버지가 가장 원망스러운 순간이다.

나라에서 나오는 배급과 , 이모할머니가 준 땅에서 근근이 먹고살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랬는지 지금도 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우리 언니는 수많은 생채기들을 끌어안고 사랑이 그리우면 내게 전화를 건다.


앞마당에 차가 2대다. 동생네가 왔나 보다. 동생 내외가 감을 따느라 분주하다. 올케가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나를 맞이한다. 보고 싶었다고. 미안했다고. 남동생의 연이은 주식실패로 그나마 내가 지켜주었던 아버지 통장의 잔고는 텅 비어버렸고 한쪽 눈이 실명되어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된 77세 된 아버지의 레미콘마저도 아들에게로 넘어갔지만 반성의 기미가 하나도 없는 나의 남동생은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감만 딴다. 올 설날쯤 대판 싸우고부터 내가 발길을 끊은 까닭이다.  고모 왔다고 웃으며 달려와 천리향 한 가지를 건네는 조카는 그 새 더 많이 자라 있었다.

뒤꼍으로 가보니 홀쭉한 볼에 알사탕을 입에 문 아버지가 참을 수 없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선 살짝 웃으신다.

내가 다시 집에 발을 들여놓으니 좋으신가보다. 쓸데없이 분주하게 움직이신다. 내가 와서 기쁜 모양이다.


 남들 다 가는 대학 얘기에 여자 애가 무슨 대학이냐며 공장에 가서 돈이나 벌어오라던 못난 나의 아버지.

 나는 오기가 생겼다. 독서실에서 숙박을 하며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해버렸다. 그랬더니 온 친척들에게 전화를 해선 딸이 장학생으로 대학을 간다고 자랑하시던 그 아버지가 이젠 할머니를 닮아 있.

쑥 들어간 볼과 구부정한 허리와 깡마른 모습이.


에미도 버리고 에비도 버린 자식들을 왜 키우냐고 고아원에 보내버리라고 성화를 해대도 할머니는 우리 삼 형제를 까투리처럼 품어주셨다.

80이 훌쩍 넘으신 연로해진 할머니를 데려가라며 친척들의 성화에 어쩔수없이 우리를 데려가게 된 아버지는 그 이후에도 세 명의 새엄마를 내게 겪게 했지만 할머니와 함께라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어느 날 자식하고 자기 중에 선택을 하라며 거실에서 밤새 싸우시는 아버지와 새엄마의 싸움에 무슨 용기였는지 그만 하시라고 내가 내일 나가면 될 것 아니냐고 소리치던 다음날.


나는 더는 견디다 못해 아침 일찍 짐을 싸서 집을 나오려는데 하나 밖에 없는 신발이 없다. 할머니가 눈치를 채시고 어딘가에 숨겨둔 게 틀림없었다.

할머니는 책상 밑에 숨겨둔 신발을 내가 찾기라도 할까봐 엉덩이를 끌고 가선 내 신발을 가슴에 끌어안는다.

어서 신발 내놓으라고. 

더는 이 집에서 못 살겠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던 게 생전에 할머니께 보여 준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니...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나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다.

일주일 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을 알았다면 그리하지 않았을 것을.

내가 집을 나오고 여인숙에서 눈물로 밤을 새우던 그 시간 동안 할머니는 밥을 한 끼도 드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내가  자리 잡고 반드시 할머니를 데리러 올 거라고 몇 번 더 말해줄 것을.

아니면 그때 내가 함께 데리고 나올 것을...

스무세 살의 나는 할머니가  내게 남긴 금반지를 건네받으며 한없이 목놓아 울었었다.


엄마가 마냥 그립기만 한 8살의 손녀는.

 "할머니~~~ 할머니를 그냥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될까?"


어두운 호롱불 아래 할머니 등에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할머니의 쭈글거리는 배를 안으며 나는 물었다.

"그래라~할머니면 어떻고 엄마믄 어떠냐. 니 하고 싶은 데로 해라."

할머니는 마른 기침을 연신 하시다가 이내 잠드셨지만.


늘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그리운 나는.

그 이후도도 오랫동안

신작로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무덤가에 앉아서

엄마를 기다리곤 했었다.

고개숙인 할미꽃 옆에 앉아서.

할미꽃 말동무 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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