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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일곱 인생을 깨닫다.

빠이 부질없었던 나의 인생아

  "야 이 싸가지없는 새끼들아. 니 아빠가 무슨 돈 버는 기계인 줄 아냐? 어디서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해? 이 배운 것 없는 것들아 ..." 이른 아침 시어머니는 열네 살 아들의 폰으로 전화를 해서 마구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심장이 멈추어버렸다. 모닝커피를 들고 호텔 방으로 들어온 내게 둘째가 내민 폰에서는 쉴 새 없이 욕들이 마치 스피커 폰을 켠 듯 쩌렁쩌렁 울려대고 있었다. 실컷 쌍욕을 내뱉으시던 시어머니는 화가 폭발해서 더 이상 할머니 집에 올 생각도 말아라며, 이제 느그들은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라면서 일방적인 선전포고를 하고선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군산으로 대학을 간 큰 아들이 중간고사가 끝났다며 일주일 정도 논다는 말에 바람도 쐬고 싶고 아들도 보고 싶고 해서 군산으로 둘째를 데리고 가서는 아들과 여자 친구까지 태우고선 전주로 향했다. 육전을 먹고 비빔밥도 먹고 길거리 음식을 먹으면서 큰아들과 여자 친구는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들처럼 옷을 빌려 입고 사진도 찍었고 늦은 시간 극장에 가서 영화도 봤다. 그래도 에너지가 넘치는 큰 아들과 여자 친구를 야밤에 전동 킥보드로 빌려선 늦게까지 쏘다니다가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호텔로 돌아왔다. 미리 말하면 당연히 못 가게 할 것을 알았기에 저녁을 먹고 나서 너무 늦어서 그냥 자고 가겠다고 사정을 했음에도 남편은 코로나 시국에 미친 거 아니냐고 난리난리를 쳤었다. 교회에 혼자 가기 싫어서 괜히 시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했나 보다. 

  내 나이 스물일곱 가장 이쁠 때 부모 형제가 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었다. 애부터 낳아야 된다던 시어머니는 큰 아들이 태어난 지 딱 한 달만에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빚쟁이들은 순천에서 나주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 시어머니와 간신히 통화가 되자 돌아간 일, 함바 식당에 일하게 됐다며 시아버님을 우리 집에 덩그러니 두고 가셨고 음주 오토바이 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도련님을 우리 집에 맡기셨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남편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큰 매형과 보청기 사업을 해 보겠다며 시작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다며 백수생활 1년도 넘어가던 시기였다. 나는 언어치료실에서 6시까지 일하고 7시부터 12시까지 삼겹살 집에서 서빙을 했고 주말엔 주인집 아주머니의 권유로 예식장에서 곰탕을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일하고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설 때면 거실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치우지도 않고 널브러진 채로 티브이를 보면서 왔어? 하며 잠깐 눈길을 주는 게 전부였던 나의 30대 시절. 나는 참으로 강인했다. 내가 노력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부심 하나만으로 나는 나를 너무도 혹독하게 혹사시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섯 번째 새엄마는 유독 질투가 많으셨다. 자식과 본인 중에 하나를 택하라며 거실에서 밤새 싸우시던 아버지에게 내일 내가 나갈 테니 그만 하시라고 했더니 언제 싸우셨냐는 듯 안방으로 들어가서 주무시는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집을 나오게 되었고 나를 23년간 엄마처럼 키워주시던 할머니는 내가 집을 나온 지 일주일 동안 밥 한 끼를 안 드시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토요일 아침 유난히 쉴 새 없이 울려대던 삐삐 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나를 감쌌고 결국 엄마와 같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고를 듣고야 말았다. 나는 미라처럼 마르고 굳은 할머니를 끌어안고 밤새 울었다. "안 돼~ 안 돼~ 할머니, 왜 그랬어~ 내가 자리 잡으면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왜 그랬어~ 이제 나 혼자 어찌 살라고~"그 뒤론 집을 나와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의지할 곳 하나 없던 나에게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를 나는 23살부터 의지하게 되었다. 중국집에서 12시간 동안 일하면서 번 150만 원 중 월세와 교통비와 생활비를 뺀 100만 원씩을 남편에게 매달 주었고 남편은 1년 반 만에 토목기사 1급 시험에 합격하여 이제 토목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시절 시어머니 게 우리에게 했던 한 마디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어찌 끄냐 네가 돈을 벌어야겠다.' 그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시어머니의 가스 라이팅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순창의 강천산 아래 마을. 늙으신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지독히도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마흔여덟. 나는 새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새처럼 자유롭다. 상담심리 대학원을 접수했고 브런치에 글을 남기며 작가를 꿈꾸고 있다. 굿 바이 나의 25년의 헛된 노력들이여. 이제는 나를 더 사랑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나의 에너지를 쓰면서 오늘보다 더 멋진 미래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굿바이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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