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침이 Feb 13. 2024

"오늘 슬퍼서 빵을 샀어."

출처: 픽사베이




20대 초반부터 MBTI 검사를 받아보면 대부분은 ISTJ가 나왔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 죄책감이 심하다, 고집이 심하다, 재미없기로 악명이 높다...'

뭐 대충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며칠 전에 심심해서 검사를 해보니 갑자기 INFP가 나온다. 그동안 쉬면서 음악도 많이 듣고 미술 전시도 몇 번 봤더니 드디어 내 메마른 감수성이 조금은 촉촉해진 것일까.


그러다가 오랜 지인들과 밥 먹는 자리에서 MBTI에 대한 얘기가 나왔기에 나도 최근에 INFP가 나왔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내 말을 듣자마자 다들 아니라면서 웃는 것이다. 누가 봐도 언니는 확신의 ISTJ상이란다. 매일 다이어리를 활용하고 그날의 할 일을 계획하는 모습이라든지 대화를 하다보면 어딘지 AI스러운 반응이 그렇다면서 말이다.(웃프다.) 안그래도 이번 모임에서 빠르게 꽂히는 수다와 웃음들 사이에서 유독 나만 "언니 T야?"란 말들을 몇 번이나 들었던 참이라, 슬슬 나도 내가 T인지 F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 명이 나섰다. 본인이 확실히 구별할 줄 안다면서, 내가 T인지 F인지 알려주겠단다. 그러더니 자기가 어떤 말을 할테니 떠오르는 대로 대답을 해보란다. 이윽고 그가 한 말은 "내가 오늘 슬퍼서 빵을 샀어."였다.(나중에 알려주기를, 대답이 ''에 집중되면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형(Thinking) 인간이고 '슬퍼서'에 초점을 맞추면 감정형(Feeling)인간이란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슬픈데... 빵을 샀어...? 슬픈데 왜 빵을 샀지? 배가 고파서 슬펐던 건가...?
그런데 슬플 때 빵이 들어가나...?


거기까지 생각하다 내가 내놓은 대답은 "슬픈데 빵 먹다가 체하면 어떡해."였다. 그날 내 대답에 다들 웃음이 빵 터졌다. 그러더니 그들은 앞으로 한번만 더 F라고 말하기만 해보라면서 [당신은 T입니다.]라는 명쾌한 판단을 내려주었다.






나는 다른 이들의 답변이 궁금했다.

그래서 이번 설 연휴에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께도 테스트를 해보았다.


"제가요, 오늘 아침에 슬퍼서 빵을 샀어요."


그러자 남편과 시아버지가 내놓은 대답은 "왜 슬펐는데?"였다. 슬픈 이유를 알고 싶고 해결은 됐는지가 궁금했단다. 오, 그래, 이 정도만 돼도 무난한 대답이었을 텐데.

 

그리고 공감력 높은 친정엄마의 답은 "그랬구나, 그래서 슬픈 건 좀 풀렸어?"였다. 듣자마자 감탄이 나온다. 정말 슬펐던 마음이 사르르 풀릴 것 같다. 나도 다음에는 엄마처럼 대답해야지. 삐빅, 입력 완료.


한편,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들은 시어머니와 친정아빠에게서 들을 수 있었는데.


먼저 (건강 생각해서 빵 안드시는) 시어머니 왈, 

"아무리 슬퍼도 빵 사 먹을 일은 아니라고 봐."

어머님의 대답을 듣자마자 감이 왔. 삐비빅, 동족이다.


그리고 친정아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는 그.

"...슬퍼서 빵을 사. 그래서 뭐, 나한테 왜 말하는데?"

아빠는 그냥.. 아니다. 넘어가도록 하자. 다만 내 T의 원천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삐빅, 나는 아빠였음, 삐빅, 입력 완료.

                    

그래도 나와 동족인 분들이 양가에 떡하니 한 분씩 존재한다는 사실이 꽤 든든한 연휴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 스토리 에디터님, 꼭 읽어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