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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끄적끄적

"오늘 슬퍼서 빵을 샀어."

by 승연
출처: 픽사베이

20대 초반부터 MBTI 검사를 받아보면 늘 ISTJ가 나왔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 고집이 심하다, 재미 없는 성격이다...

뭐 대충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검사를 해보니 갑자기 INFP가 나온다. 몇 번을 다시 해봐도 INFP다. 오호- 그동안 쉬면서 음악도 많이 듣고 미술 전시도 몇 번 다녔더니 드디어 메마른 감수성이 조금 촉촉해진 것일까.


그 후, 오랜 지인들과 밥 먹는 자리에서 MBTI에 대한 얘기가 나왔기에 나도 이번엔 INFP가 나왔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내 말을 듣자마자 다들 아니라면서 웃는 것이다. 누가 봐도 언니는 확신의 ISTJ상이란다. 매일 그날의 할 일을 계획하는 모습이라든지 대화를 하다보면 어딘지 AI스러운 반응 등이 그렇다면서 말이다. 오늘 안그래도 빠르게 꽂히는 수다와 웃음들 사이에서 유독 나만 "언니 T야?"란 말들을 몇 번이나 들었던 참이라, 슬슬 나도 내가 T인지 F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 명이 나섰다. 본인이 확실히 구별할 줄 안다면서, 내가 T인지 F인지 알려주겠단다. 그러더니 자기가 어떤 말을 할테니 떠오르는 대로 대답을 해보란다. 이윽고 그가 한 말은 "내가 오늘 슬퍼서 빵을 샀어."였다.(나중에 알려주기를, 대답이 ''에 집중되면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형(Thinking) 인간이고 '슬퍼서'에 초점을 맞추면 감정형(Feeling)인간이란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슬픈데... 빵을 샀어...?
왜 하필 빵을...?
그런데 슬플 때 빵이 들어가나...?

거기까지 생각하다 내가 내놓은 대답은 "슬픈데 빵 먹으면 체하지 않을까...?"였다. 그날 내 대답에 다들 웃음이 빵 터졌다. 그러더니 그들은 앞으로 한번만 더 F라고 말하기만 해보라면서 [당신은 T입니다.]라는 명쾌한 판단을 내려주었다.




나는 다른 이들의 답변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께도 테스트를 해보았다.


"제가 오늘 아침에 슬퍼서 빵을 샀어요."


그러자 남편과 시아버지가 내놓은 대답은 "왜 슬펐는데?"였다.

슬픈 이유를 알고 싶고 해결은 됐는지가 궁금했단다. 오, 그래, 무난한 대답이다.


공감력 높은 친정엄마의 답은 "그랬구나, 그래서 슬픈 건 좀 풀렸어?"였다.

듣자마자 감탄이 나온다. 정말 슬펐던 마음이 풀릴 것 같다. 나도 다음에는 엄마처럼 말해야지. 입력 완료.


한편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들은 시어머니와 친정아빠에게서 들을 수 있었는데.


먼저 (평소에 건강 생각해서 빵을 잘 안드시는) 시어머니 왈,

"아무리 슬퍼도 빵 사 먹을 일은 아니라고 봐."

어머님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 즉시 감이 왔다. 삐비빅, 동족이다. 대문자 T.


대망의 마지막은 친정아빠.

한참을 생각하더니 내놓은 대답은,

"...그래서 뭐. 나한테 왜 말하는데?"

아빠는 그냥... 아니다. 넘어가도록 하자.

다만 내 T스러움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삐빅, 나는 아빠 딸이다. 입력 완료, 당신은 나의 아빠.


그래도 나와 동족인 분들이 양가에 떡하니 한 분씩 존재한다는 사실이 꽤 든든한 연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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