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그 아이를 떠올렸다.
늘 손을 흔들며 웃어주던 곱슬머리 아이를.
이유도 없이 그 아이를 떠올렸을 때, 어떤 연유로 내 대뇌 피질이 오래된 기억 서랍을 새삼스레 다시 열어 보이는지 의아했지만 곧 그런 궁금증과는 별개로 그 무렵의 그와 나, 그 교실 풍경, 그때 그 기찻길에 관한 상념들로 마음이 말랑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애틋하고 그리운 감정이었다. 그래서 허공으로 전부 바스라지기 전에 글로 그날의 장면들을 옮겨 적기로 결심했다.
모로. 아홉 살 그 아이의 이름은 모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 하나밖에 못봤다. 그래서 세월이 흘렀어도 모로만큼은 많이 침식되지 않고 온전한 기억들로 간직할 수 있었다.
지금 내 나이가 마흔이니 아홉 살 적 기억들이라 해봤자 대부분이 드문드문 떠오르는 파편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얼마 안되는 아득하고 빛바랜 파편들 중 유독 모로와 관련한 장면들만 그렇게 또렷한 컬러감으로 회상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그 아이를 꽤나 진정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모로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아이였다. 아홉 살이 아무리 조숙했다 한들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건 왜곡된 기억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스스로도 들지만, 여러 번 다시 생각해봐도 그건 정말 좋아하는 감정이 맞았다. 나는 아주 잊다가도 몇 년에 한 번씩은 이렇게 맥락 없이 그를 떠올렸는데 그때마다 어쩐지 모로에 대한 회상은 갈수록 더 아름답고 애틋하게 윤색되었다.
삼십 년 전에는 꽤 많은 아이들이 먼 거리를 걸어 등하교를 했다. 맞벌이 가정인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등굣길은 아빠나 엄마가 출근길에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 주셨지만 하굣길은 언제나 나 혼자서 집에까지 걸어가야 했다. 때로는 귀찮은 하루살이 떼가 들러붙고 때로는 새로 산 구두가 진흙길에 엉망으로 젖어들어도 그때는 그런 게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아홉 살의 여자 아이는 매일 무서움과 쓸쓸함을 꾹 참아내며 한적한 기찻길을 따라 20분을 걸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하교를 할 때면 까만 곱슬머리의 아이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을 느꼈다. 학교에서 우리집까지 가는 길의 딱 중간에 그애의 집이 있었다. 학교 뒤편에 길게 뻗은 철길을 건너면 주택가가 보이고 그중 화사한 장미가 담 위로 피어있는 벽돌집이 나오면 아이는 그때까지 나와 걸음을 맞춰 천천히 걷던 것을 멈추고 후다닥 그 집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그곳이 그 아이의 집인 모양이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사라지는 그애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좀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후로 나 혼자 적적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길다고 느껴졌다. 조금 슬퍼진 채로 다음날도 이 길에서 그 아이를 만나기를 기대했다.
하굣길에서 우리는 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애가 내 앞에 가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그러면 안심이 되고 좋았다. 반면에 내가 앞서는 날에는 왠지 뒤통수가 따갑고 뒤가 궁금해졌다. 때때로 고개를 돌려 차마 얼굴은 보지 못하고 그의 운동화가 아직도 잘 따라오는지 슬쩍 확인하곤 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고개를 돌려왔다.
어느 날 그 아이가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내게 크게 말을 걸었다.
"야, 백침이! 집에 가냐?"
그제서야 그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낯익던 형체가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모로인 걸 깨달은 순간, 나는 눈물이 나올만큼 그애가 반갑고 좋아져버렸다. 그때부터였다. 모로가 내 머릿속에서 분명히 살아 숨쉬게 된 건.
모로는 1학년 4반 남자아이 중에서 가장 키가 컸다. 그래서 여자 중에서 가장 키가 컸던 나의 짝꿍이 됐다. 곱슬머리에 웃을 때면 눈이 몹시 가늘어지던 그 애는 장난기가 많았다. 새침한 여자애였던 내게 수시로 장난을 치고 괴롭게 굴었다. 1학년의 나는 그 애를 많이 싫어했다. 어느날 나는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고 그애는 담임 선생님께 혼이 났다. 그날 그애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진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또 어느날은 내가 책상 가운데에 선을 그었다. 그애의 팔꿈치, 손가락, 연필 같은 것이 선을 넘어오면 모로의 등을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걔는 맞으면서도 좋다고 웃었다. 일부러 조심성 없게 선을 넘어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점점 더 화가 났다. 그후에 어떻게 됐더라... 기억의 파편이 드문드문...
그러다가 2학년이 되고 반이 떨어지면서 그제야 그애가 좀 괜찮아졌다. 복도에서 모로를 마주치면 나는 여전히 데면데면하게 굴었지만, 그애는 늘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나는 벽돌집 그 아이가 모로인 것을 확인한 날부터 매일 하교를 할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모로와 함께 걷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그날도 모로의 뒤통수는 집이 보이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그날도 나는 잠시 멈춰서서 그를 바라보았고.
모로가 집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모로가 말했다.
"백침이! 잘 가라. 내일 또 보자!"
고개를 돌리자 창가에서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손을 흔드는 모로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은 내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었다. 나도 그때만큼은 처음으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 답했다. 그러고는 다시 부끄러워서 이번에는 내가 그의 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달음박질 치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모로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에 엄마가 말해주기를 그애가 미국인가 어딘가로 이민을 갔다고 했다. 뻔하고 흔한 드라마 클리셰 같지만 그건 정말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아홉 살의 나는 그 애가 잠시 아프거나 어딜 다녀오느라 학교에 못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나라로 영영 가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건 마치 그애가 갑자기 수증기처럼 증발했다거나 달나라로 이사를 갔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후로 한동안 그 애를 떠올리면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아홉 살도 그런 기분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후 삼십 년이 더 지났다. 거기 있던 철로가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그가 살던 동네도 몰라보게 변했다. 모로의 근사한 벽돌집도 어느새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3층짜리 새 건물이 올라갔다.
아홉 살의 수줍던 여자아이는 지금은 딱 그때의 모로같은 개구쟁이 아홉 살 아들을 키운다. 오늘 모로가 내 머리에서 튀어나온 건 나의 아들에게서 그의 햇살 같은 웃음을 발견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모로의 다음 출현 시기는 장담할 수 없다. 그에게는 다 잊었다 싶은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깜짝 등장하는 짓궂은 취미가 있으니까.
그래도 그가 늘 귀여운 아홉 살 소년 그대로 내 안 어딘가에 살아간다는 사실은 나를 꽤 즐겁게 한다. 실제의 모로가 머나먼 다른 나라에서 중년의 일상을 보낼 때, 나만의 모로는 아름다운 벽돌집에서 쉬다가 심심할 때면 다시 창문을 열어젖히고 힘차게 손을 흔들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