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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Nov 24. 2023

그럴 거면 그냥 대치동 가서 살아.

 



예전 근무하던 학교에서 나는 아주 유난스러운 엄마처럼 보였던 듯하다.


두 자녀를 모두 의대에 보냈다는 부장님께 조심스레 자녀교육의 비법을 여쭈어 보거나 쉬는 시간에 아이의 학원 스케줄을 짜는 모습이 같잖아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루는 집에서 읽다 만 자녀교육서를 생각 없이 교무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는데, 친하던 한 선생님이 툭 하고 던지는 말이 "그럴 거면 그냥 대치동 가서 살아." 였다. 어쩐지 비꼬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고 불쾌했다. 내가 뭘 했다고, 대체 뭘 보고 대치동을 운운하는 걸까 의아했다. 여섯 살 아이에게 피아노와 학습지와 태권도를 시켜서? 과학 동화 전집을 별 고민 없이 사들여서? 그때 물어보진 않았다. 그냥 못들은 척 넘겼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후 나는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자녀교육과 관련한 말과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쩌면 '저희는 많이 안 시켜요. 그냥 놔두는 편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이 또래 아이를 둔 상대방에게 쓸  없는 적의감을 주지 않는 현명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둘째는 영어 유치원에 대기를 걸어뒀다. 원래는 6~7세쯤 보내려 했는데 이번에 어린이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내년인 다섯 살에는 입학을 할 것이다. 이것도 또 아무 생각 없이 말하면 몇몇 엄마에게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느니 극성맞은 부모라느니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둘째를 그놈의 영어 유치원에 보내려고 마음 먹은 가장 큰 이유는 영어를 학습이 아닌 언어로 자연스럽게 익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우리말처럼 영어로 편하게 말하고 읽고 쓰는 자유를 딸에게 선사하고 싶다.

그 저변에는 수능 영어 1등급을 맞았어도 실제로는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나, 회사에서 외국인들과 영어로 소통할 일이 많은(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 남편, 벌써 영어를 지루한 학습으로 받아들이는 첫째의 경험이 아프게 깔려 있다. 둘째 너만은, 영어가 필수가 되어버린 이 지구에서 영어 콤플렉스나 스트레스가 기를 바라는 심정이랄까.


집 바로 근처에도 여러 영어 유치원들이 있지만 알아보니 내가 일하는 시간대인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이를 맡길 경우에는 비용이 월 300까지 치솟았다. 그건 확실히 우리 가계에 부담이 된다. 그런 금액을 내고 유치원에 아이를 보낸다면 왠지 '교육'이 아닌 '투자'가 되어 가격에 상응하는 아웃풋을 내기 위해 아이를 닦달할 것만 같았다. 딸아, 이만큼 돈을 들였으니 저만큼의 성과를 내야지, 같은 건 그러나 원하지 않는다.


다행히 딸을 보내기로 한 S 유치원은 비록 차로 15분 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납득이 가는 금액이었다. 그래서 회사원과 교사인 우리 부부의 월급으로도 괜찮을 듯하여 대기를 걸었다. 편하고 자유로운 원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외국인 친구들도 다녀서 아이가 자연스럽게 언어를 익힐 수 있을 듯하다.


둘째는 야무지고 외향적인 성향을 가졌다. 여자애라서 언어 발달이 빠른 편이기도 하고 욕심도 많아 오빠를 따라 책을 읽고 글씨 쓰는 시늉도 곧잘 한다. 이대로라면 영어 유치원에 보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새로 이사를 온 이 동네에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가끔 어린이집 엄마들과 등하원 시간에 짧게 얘기하다 보면 어떤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영어 단어들을 문장 곳곳끼워 넣었다.

원장 선생님이 너무 dkgol 해서 rksgl 했잖아요. 

그러면 다른 엄마들도 자연스레 받아친다.

그러게요, 너무 akqwy 했어요.

다들 어디에서 살다 왔다 했나. 나만 못알아 듣는 것 같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간다. 기 죽을 필요도 없다. 자랑이 아닌 자연스러운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아파트 단지에는 백인, 인도인, 히잡을 쓴 중동계 외국인들도 보이며 놀이터에서도 꽤 많은 아이들이 영어로 말하며 뛰어논다. 저번엔 공원에서도 어떤 할아버지가 CNN 방송을 듣고 계셨지. 이 정도면 영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낸다 해도 대치동 가서 살란 말은 안 들을 것 같다.(그리고 사실, 대치동을 못가는 거지 안가는 것이 아니니까.)


안그래도 둘째는 이미 동기 부여가 된 듯했다. 며칠 전, 햇볕이 좋던 날 놀이터에 딸을 데리고 나왔을 때였다. 놀이터에는 영어 유치원 가방을 멘 아이들이 흙놀이를 하고 있었다. 딸아이는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언니, 오빠들을 잠자코 보다가 갑자기 내게 Mommy~!를 외치며 달려왔다. 그리고는 내 품에 안기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나도 영어 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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