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회상
손목터널증후군이 심해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님의 왼쪽 손목에는 검정색의 손목 보호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시모를 처음 만난 건 1월의 어느 추운 날이었다. 어머님은 처음부터 나와의 결혼을 반대하셨다. 그때 나는 아직 기간제 교사였는데 대기업 연구원으로 돈을 잘 버는 아들에 비해서는 영 탐탁치 않은 상대였던 듯하다. 나는 결국 그와의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들을 결국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한번 만나자 하셨다.
어머님을 만나던 날에는 칼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주차장에 서서 떨고 있는데 날씬하고 세련된 중년여성이 다가왔다. 검정 코트위에 스카프를 걸친 그녀는 내게 당신 아들의 이름을 말했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인사하는 내 얼굴 위로 사정없이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시키고 오랫동안 대화를 했다. 무슨 말이 오갔던 건지 지금은 기억도 안나지만 그날 두 여자 모두 몇 번씩이나 눈물을 닦았던 것만큼은 생생하다. 그리고 그날의 대화를 끝으로 그녀는 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훗날 어머님은 그때 하얗게 드러난 내 목덜미가 너무 시려 보였다고 말했다.
그후 우리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서로의 집에 인사를 가고 신혼집을 얻고 혼수품을 샀다. 상견례를 하던 날 그러나 어머님은 어쩐지 좀 우울한 표정이셨다. 시종일관 점잖게 대화를 나누고 웃음과 덕담도 간간이 오갔으나, '다 내려놓고' 결혼을 시키겠다는 그녀의 말이 순간 날카롭게 가슴에 박혔다. 골칫덩어리를 치워버린다는 사실에 그저 들뜨신 부모님 귀에는 들리지 않은 말이었다. 그후로도 어머님은 '다 내려놓고'라는 말을 몇 번 더 했고 그때부터 나도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어머님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결혼 후 마주한 시댁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우리집과 비교하면 상상하기 힘든 정도여서 표정관리가 안될 때가 많았다. 시댁에서 벌어지는 여러 장면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질 때쯤, 나는 핸드폰 메모장에 내가 본 것을 적어놓기 시작했다.
1. 일가친척이 다 모이는 날에는 밥상을 세 개 폈다. 하나는 남자 어른들이, 다른 하나에는 손주들이 둘러 앉아서 밥을 먹었다. 세 번째의 상에는 음식을 차리지 않았다. 앞선 두 상에서 밥을 다 먹고 일어나면 그 위에 남아있는 접시들을 세 번째 상에 옮기고 그제서야 여자들이 앉았다. 밥만 새로 퍼와서 먹었다.
2. 하루는 어머니가 김장을 할 거니 와서 보고 배우라고 했다. 그때 나는 임신 8개월이었다. 남편에게 같이 가자 하니 "나는 오지 말라했는데." 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도 억지로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우리가 함께 나타나자 어머님이 "너는 뭐하러 왔냐"며 들어가 쉬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봐, 내가 안온다 했잖아." 라고 말했다.
3. 아기를 낳았다. 어머니는 내게,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왔을 남편을 피곤하게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아기가 생후 1년이 다 되도록 그는 일에만 전념했다.
4. 2박 3일간의 명절 기간, 어머님을 도와 전을 부치고 고기를 구웠다. 슬그머니 아주버님이나 남편이 돕겠다고 나설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님이 앞을 막아섰다.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있어." 어머니는 며느리가 해야 할 일을 굳이 당신의 아들들이 나눠 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적다가 적다가 나중에는 적는 것마저도 비참해서 견딜 수 없어질 때쯤 나는 기록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머님은 며느리인 내가 이 집안에서 최하위의 서열에 위치하였음을 무언의 선언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잊을세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알려주셨다.
그렇다고 어머님이 어떤 악의를 가지고 나를 그렇게 대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시할머님도 생전에 성격이 대단하셨다고 들었다. 그런 시어머니 아래에서 일년에 수 차례 제삿상을 차려냈을 어머님은 그런 분위기와 역할나눔에 익숙해졌을 거고, 과거에 당신도 그러했듯이 나에게도 '현숙한 며느리 도리'를 착실하게 전수하려 했을 뿐이리라...
그런데 어머니는 두 가지의 사실을 모르고 계셨다.
첫째, 나는 시댁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에서 자랐다. 나의 아버지는 '양성평등'에 관해서는 특이할 정도로 열려 있으셨다. 살림이든 뭐든 부모님은 함께 했다. 요리도, 청소도, 설거지도 아빠는 늘 아내의 일로 미루지 않고 항상 나서서 같이 했다. 나 역시 적어도 집에서는 여자라서, 딸이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매번 시댁에만 가면 더욱 황당하거나 화가 나거나 슬퍼졌다. 시간이 갈수록 부정적인 감정은 쌓여만 갔고 나중에는 '시'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둘째, 내가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그건 정말 잘 모르셨을 만 한 것이, 평소의 나는 아주 만만한 사람에 가까웠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니까. 어디 가서 직업이 교사라고 밝히면 "아, 어쩐지 딱 교사일 것 같았어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나는 아주 가끔은 '돌아이'가 됐다. 그건 딱 '이해되지 않는 차별대우'의 경우에만 발현되었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서 한번 그 '갑질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가슴 속에 항아리를 만들고 물을 받기 시작하는 미친 자가 됐다. 항아리에 한 방울씩 물이 똑똑 떨어지고 결국에 물이 가득 차면, 그 순간 모든 분노가 터져나왔다. 오래 참을수록 그 분노는 맹렬하게 타올랐다.
지금까지는 오빠, 남편, 나보다 한 살 어린 부장님에게만 그런 모습을 보였었다. 오빠와는 한달간 말을 하지 않았고, 남편은 내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 부장님은 두 시간 동안 울었다. 그리고 이번에 나는 어머니를 지목해서 차곡차곡 항아리의 물을 받았던 것이다.
항아리의 물이 넘치던 어느날, 나는 어머니 대신에 애먼 남편에게 달려들어 소리를 지르고 집안의 물건을 깼다. 아이를 들쳐안고 집을 뛰쳐나와 친정에서 한 달을 버텼다. 시댁에 가서도 웃는 대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사나운 개처럼 한동안 '왈왈왈' 짖어대고 모든 걸 물어뜯었다.
그리고나서야 나는 다시 수줍은 며느리로 돌아왔다.
얼이 빠진 시부모님 앞에서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라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부모님은, 특히 어머님은 이런 며느리 때문에 아주 크게 놀라셨다. 남편의 주재하에 시댁 가족끼리 비밀 긴급회동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그들은 내가 다시 미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0년이 지났다.
이제 2023년의 어머님은 추석에 모든 음식을 사서 먹을 것임을 선포하는 쿨한 신세대 시어머니가 되었다. 부엌에 아들이 들어와도 "그래, 함께 만들어 봐라." 웃으며 얘기하게 됐다. 비록 당신은 지금도 여전히 친구끼리 해외여행을 가도 남편을 위해 며칠 치의 음식을 다 해두는 분이시지만. 혹 명절을 앞둔 며느리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일부러 손목통증을 핑계삼아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하면 참 고맙고 죄송하다.
그 시절에도 돌이켜보면 가슴 뭉클한 순간들 또한 여럿 있었다.
며느리가 남몰래 가슴 속 항아리에 물을 붓고 있을 때
어머니는 바쁜 사돈을 대신해 아기를 출산한 며느리의 침상 옆을 지키고, 여름만 되면 며느리가 좋아한다는 옥수수를 쪄오기도 하셨다. 가끔 예쁜 립스틱 같은 것을 깜짝 선물로 주기도 하셨다.
40년간 부엌에서 혼자 외로이 서 계셨을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그동안 계속해서 음식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나를 부르던 것도 이해가 된다.
시간이 갈수록 며느리도 조금씩 철이 들고 있었다.
이번 추석에는 손목이 아픈 어머니 대신에 어설퍼도 직접 음식을 몇 가지 만들어 갈까 한다. 남편과 함께 만든 음식들을 어머니가 맛보고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