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첫 보금자리를 남부 지방의 한 도시에 꾸렸다.
창 밖으로 철길이 내다보이는 아담한 아파트였다.
새벽이면 잠결에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고, 창문을 열어두면 금세 까만 먼지가 창틀에 쌓였다. 동료 선생님이 내가 사는 아파트를 두고 '불편한 세상'에서 사냐면서 짓궂게 놀리긴 했으나, 그래도 참 소중하고 안락한 집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힘든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저녁에는 남편이 된 그와 손을 잡고 함께 아파트 주변 산책로를 걸었다. 그는 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 나는 기간제 교사로 서로 가진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우리가 데이트를 마친 뒤에도 헤어지지 않고 같은 집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우리의 신혼집은 설렘과 안정의 공간이었다.
신혼집에 들어가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임용고사에도 합격하였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의외로 너무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한창 S와 결혼을 준비하던 무렵이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던 친정 엄마가 이상하게도 그때에는 거의 사정을 하다시피 내게 부탁을 해왔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시험을 볼 순 없겠니?"
나중에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왠지 이번에는 내가 시험에 합격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드셨다고 한다.
이미 공부에 손 놓은지 2년이 다 되어가던 때였다. 시험이라면 질릴대로 질려서 임고 얘기만 나와도 질색을 했었다. 그래도 엄마가 그렇게 간절히 말씀하시니, 그러면 정말 시험지를 '보고만' 오겠다고 선언하듯 말한 것이 운좋게 최종합격까지 이어졌다.
우리의 신혼집은 순식간에 행운의 장소로 변모했다.
다들 내가 S와 결혼해서 마음이 편해진 덕분에 시험에 합격한 거라고 말했다. 시부모님께서는 축하한다며 예쁜 꽃바구니를 보내왔고, 부모님도 기뻐하며 주변 지인들께 한 턱을 쏘셨다.
그 후에도 예상치 못한 기쁜 일들이 연달아 찾아왔다. 합격 후 한 달 정도 지났으려나, 첫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됐다. 황금빛 두꺼비가 손가락을 깨무는 꿈을 꾸고 놀라서 깼는데, 나중에 보니 아들 태몽이었다.
곧, 남편의 근무지도 수도권으로 이전 발령이 났다. 더 나은 조건의 근무환경이었다. 일생에 특별하게 느껴지는 행운 같은 일들이 몇 달 간격으로 이어졌다. 계속 쏟아지는 지인들의 축하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더 이상 이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우리는 다시 이사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새로 발령받은 근무지는 지금 우리가 사는 P시에서는 도저히 출퇴근 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위치했다. 우리는 1년 만에 다시 집을 내놓고, 그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급하게 집을 내놓긴 했으나, 다행히 보러 온 사람들마다 다들 이 집을 마음에 들어했다. 공인중개사는 젊은 부부가 이 집에서 지내면서 좋은 일들만 있었다며 우리의 이야기를 셀링 포인트로 내걸기도 했다. 이윽고 우리집은 몇 주만에 순조롭게 다른 세입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사를 나가는 날, 나는 집을 떠나기 직전까지 화장실 바닥까지 싹싹 문질러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이곳에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을 맛보았기에, 떠날 때도 좋은 모습으로 떠나고 싶었다. 다음에 들어올 세입자들에게도 행운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좋은 마음으로 바랐다. 1년 남짓 머물렀던 우리 부부의 첫 집은 '불편한 세상'이 아닌, '행복한 세상'이었다.
그때 우리 부부의 나이는 서른 살,
인생의 제 2막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