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반나절 만이다, 옛집의 모든 짐이 두 대의 트럭에 실려 감쪽같이 이 도시로 옮겨진 것은.
베테랑 이사 업체 직원들은 네 시간 만에 바람처럼 가구들을 실어 새로운 공간에 옮겨 놓았다. 가구들이 분명 우리 집 것이 맞기는 한데, 배경이 바뀐 탓인지 영 낯설었다. 한참을 바라보고서야 이곳이 내 집인 걸 겨우 실감하였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동안의 이사는 늘 수동적이었다. '학교 가까운 곳', '직장 가까운 곳'처럼 살아야 할 곳이 먼저 정해지면 그 주변에서 집을 찾는 게 이사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욕심을 부렸다. 남편과 내 직장까지의 거리부터 계산해서 컴퍼스로 그은 것처럼 둥그렇게 선을 그어 지역 후보지를 몇 군데 선정했다. 그 후 범위 안에 든 모든 곳을 도서관, 공원, 아이들 학교와 병원, 지하철역, 심지어 마트와 맛집, 영화관 위치까지 꼼꼼히 따져서 임장을 다녔다. 그렇게 결정된 동네가 이곳이었다. '내가 직접 선택한 첫 동네'.
그렇게 모든 것을 따져서 이사했건만...
첫날 밤, 불을 끄고 누운 순간에야 깨달았다. 이 큰 도시에 아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익숙한 얼굴들은 모두 내가 떠나온 그 동네에 남겨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사 전날에는 아들의 친구들이 많이 울었다.
하교 시간, 교문 앞에서 아들을 기다리는데 낯익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눈이 빨개진 채로 걸어 나왔다. 흐느끼며 걷는 아이도 있었다. 순간,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 뒤에 알고보니 세상에, 우리 아이가 전학 간다는 소식에 아쉽고 슬퍼서 다들 울었다는 것이다.
아홉 살, 한참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친구와의 이별을 슬퍼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정작 우리 아이는 쑥스러운지 멀찍이 서서 웃고만 있었다. 그런 아이의 눈에도 촉촉하게 눈물이 맺혔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서 아이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달래주었다. 그 마음들이 참 고맙고 예뻤다. 슬픈 이별이 다 내 탓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눈물에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쿡쿡 찔렸다.
어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들 학원 선생님, 둘째 어린이집 선생님, 스치듯 눈 인사만 나누던 동네 엄마들까지 내 이사 소식에 다들 아쉬워했다.
"진짜 가시는 거예요?"
"너무 아쉽네요."
다들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유난히 정이 많은 것인가. 서로 깊이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따뜻하게 마음을 열어 보이는 이웃들 앞에서 나는 괜히 멋쩍고 당황스러웠다. 우는 친구들 앞에서 멀찍이 서 있던 내 아이처럼, 나 역시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실은 처음부터 이 동네는 잠시 머무는 곳이라 생각해왔다. 그래서 여기에 머무는 2년간 애써 사람을 사귀지는 않았다. 혼자 공원을 걷고 도서관에서 책만 읽어도 시간은 잘 갔고, 조금은 외로워도 마음은 편했다. 그래서 이번에 이웃들이 보여준 정다운 모습에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흘리던 아이의 친구들, 손편지를 쥐어주던 동네 엄마들에게 고마워서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만큼은 도무지 숨길 수 없었다. 결국은 올라가는 차 안에서 나 혼자 뒤늦게,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이사온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옛 이웃들이 보고 싶어졌다.
새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마주친 낯선 이들은 하나같이 무표정이었다. 다들 말이 없었고, 그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나는 바로 옛 이웃들을 떠올렸다. 그곳에선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낯이 좀 익으면 당연한 듯 웃으며 안부 인사를 건네고, 아이들에게는 챙겨뒀던 주머니 속 사탕을 건네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조금은 더 개인적인 듯하다.
첫날부터 이렇게나 다른 풍경이라니.
아직은 낯선, 새 집에 들어선다.
남편은 남은 박스를 정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아이들은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인지 깔깔 웃어댄다.
그래, 낯선 시작은 언제나 조금 외로운 법이다. 그래도 조금만 지나면 금방 익숙해질 것을 알지 않은가.
이곳에서도 곧 행복한 순간들이 찾아 올 것이며, 친밀한 이웃들이나 나만 알고 싶은 맛집들도 금방 생겨나리라.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넬 차례였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친절한 첫번째 이웃이 될 수 있도록,
나 먼저 그들에게 마음을 열어보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