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 설치 기사와의 민망한 순간

by 승연



이사를 오니 새로 손을 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조명 기구 수리, 가스 개통, 정수기 설치, 인터넷, 식기세척기, 고장난 배관 수리와 에어컨 설치...


며칠 새에 수많은 설치 기사들이 집을 방문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 약속을 잡아야 하는 것이 좀 번거롭고 귀찮기는 했지만, 그들이 왔다가면 확실히 뭔가가 하나씩 작동을 했고 조금 더 살 만한 집이 됐다.


나는 그분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래서 무뚝뚝한 성격임에도 음료수를 드리면서 괜히 말 한 마디 더 붙인다든지 현관 앞에까지 나와서 재차 감사 인사를 전하든지 힌면서 나름 감사한 마음을 전달했다. 그 친절함이 나중에 어떤 민망한 결과를 불러 일으켰는지 그때는 알지 못한 채였다.




그날도 식세기 설치 기사가 방문했다.

단정하게 회사 유니폼을 입고 생글생글 웃으며 등장한 그는, 훈훈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서비스직 종사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타고난 성격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에게선 연신 꼬리를 흔들어대는 대형견스러운 귀여움이 묻어났다. 남발하는 미소와 나긋나긋한 서울 말투가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잘생김' 효과 덕분인지 나 역시 덩달아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나도 안그래도 됐는데 괜히 그 옆에 서서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았다. 그게 실수였다.


그는 싱크대 하부장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만화처럼 머리에 회색 먼지를 덮어쓰고 말았다. 옆에서 보다가 놀라서 머리 머리, 먼지 먼지, 를 외치니 그가 무심결에 내게 머리를 쓱 하고 숙여왔다. 뭐야, 털어달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저절로 그의 머리카락에 손이 갔다. 조심스레 몇 번 털어주다가 놀라서 바로 떼긴 했지만.


그 청년도 화들짝 놀란 듯 싶었다.

앗, 제가 털게요, 하더니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머리를 털었다. 사방에 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기침이 나왔다. 코미디 그 자체였다.





마냥 해맑던 그 청년은 그후 눈에 띄게 태도가 어색해졌다.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온몸으로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외치는 듯했다. 어쩐지 나를 음흉한 아줌마로 치부하는 느낌이었다. 와-, 되게 억울했다. 나는 평생을 반듯하게 살아온 '수줍은 아줌마'였다. 나 역시 어색하고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귀엽긴 했지만 그건 훈훈한 손주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마음과 비슷했다.


나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빨리 작업이 끝나고 이 불편한 상황이 마무리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문득 예전 수영장에 다닐 때가 생각났다. 젊은 수영 강사의 몸을 거침없이 터치하던 몇몇 여사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와 다른 미혼 여성들에게는 유독 쌀쌀맞게 굴었지만, '우리 선생님'만 보면 잇몸만개 미소를 지으며 팬클럽 회원처럼 굴던 그 여사님들. 그때 난 그녀들을 싫어했나 경멸했나 아무튼 이해는 전혀 못했다.

내가 그와 같은 느낌을 낼 수 있을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좀 전의 상황이 약간 그런 느낌이었나 싶기도 하고...




설치기사는 마지막에 방심했는지 다시 한번 코미디 장면을 연출했다.

그가 식세기 설치로 떼어낸 싱크대 하부장을 우리집 창고에 넣어주면서 생긴 장면이었다. 좁은 창고 안에서 뒷걸음치며 커다란 상자를 끌어당기다가, 그는 벽과 상자에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갇히고 말았다. 청년이 울상을 지으며 "앗, 저 왜 갇혀있죠? 어떻게 나가죠?"하고 물어왔을 때, 또 다시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그 대신 "다시 상자 밀고 나오세요." 라고 답했다. 그 젊고 잘생긴 허당에게 또다시 수영장 여사님들처럼 느끼하게 굴긴 싫었다.


이사한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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