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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Sep 22. 2023

그러니까 왜 교사가 되었냐면

육아휴직 3년차


매주 월요일마다 아들의 학습지 방문 선생님이 오신다. 손님맞이가 드문 우리 집에서는 방문 선생님이 오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 대청소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월요일이 되면 나는 아침부터 쓸고 닦으며 부지런을 떨었고 아이는 엎드려서 며칠간 잔뜩 밀린 학습지를 풀었다. 이래저래 학습지 방문 선생님은 근래의 우리 모자에게 가장 긴장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학습지를 신청하게 된 것은 아이가 일곱 살이 끝나가는데도 한글을 다 떼지 못해서였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엄마면 엄마지 갑자기 왜 선생님인 척 하냐면서 심통을 부리는 자식을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랑 한글도 떼고 영어책도 읽고 잘들 하던데, 무정한 아들은 열심히 하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했어도 공부를 시작한지 10분쯤 지나면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기 싫다...엄마 싫다..." 중얼거리는 아들이 웃기면서도 성질났다.


한동안 웃을까 울을까 망설이는 심정으로 아들과 기싸움을 했지만 '한글떼기 프로젝트'는 영 지지부진했고, 초등학교 입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마음이 급해진 나는 어느새 학습지 업체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방문 선생님은 늘 "안녕하십니까-!" 인사하며 기세좋게 집에 들어왔다. 그녀는 놀랍게도 아들의 한글 실력을 빠르게 향상시켜 주었다. 아들은 얄밉게도 선생님 앞에서는 모범생인 척 굴었고 시종일관 고분고분하게 한글을 배웠다. 가끔씩 아들의 주의가 산만해지더라도 문제될 건 없었다. 선생님이 가방에서 신기한 장난감들을 꺼내어 흔들면 선물을 받을 생각에 곧 얌전해졌으니까. 그럴 때면 선생님이 아주 능숙한 조련사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한글 외에도 두 과목을 더 신청하고 선생님이 방문하는 날에는 고급 건강음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루는 젊고 몸도 튼실한 내가 일도 안하고 한량처럼 지내는 것이 궁금했는지 선생님이 "일하실 생각은 없으세요?"라며 물어왔다. 나는 당황해서 휴직 중이라 말하는 대신에 "어, 없는데요."라고 어벙하게 대답해버렸다. 그녀는 내게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경력단절 여성을 환영합니다. 자차가 있으면 더 좋습니다.'와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전문대졸 이상의 경력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알고보니 내게 방문 교사를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르치는 일에서 막 빠져나와 쉬고 있던 나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가르치는 건 자신이 없어서요."라고 대답했고 선생님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언젠가 능숙하게 아들을 조련하던 그녀를 보고 "선생님, 꾸러기 다루는 솜씨가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그렇게 못하겠던데요."라고 감탄하자 그녀가 쉰 목소리로 "아무래도 가르쳐 본 적이 없으면 힘들기는 하겠지요."라고 담담히 답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쩐지 고단함이 묻어나오는 말투였다.




처음부터 가르치는 일에 자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교사였기에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익숙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동네 동생들을 모아놓고 선생님 놀이를 했다. 장래희망은 쭉 교사였고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학원 강사와 시간 강사와 기간제 교사를 거쳐 정교사가 됐을 때에도 한동안은... 가르치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만난 아이들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완전 어른도 아니고 완전 아이도 아니어서 어떤 날은 어른스럽고 어떤 날은 귀여웠다. 일을 쉬는 지금도 떠올리면 웃음부터 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숨을 들이마시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인데도 그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어쩐지 점점 어려웠다. 학부모님께도 전화가 오면 긴장부터 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사극에 나오는 간신같이 굽실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게 하는 학부모는 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상태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심지어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도 주눅이 들었다. 뛰어나게 유능하거나 선량하거나 성실한 교사들 사이에서 나는 초라하고 무능한 사람이었다. 한번은 본인은 교직이 천직같다며 천사같이 웃는 한 선생님 앞에서 "저도요."라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를 않아 그냥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무능한 교사. 인정하기 싫지만 난 결코 뛰어난 교사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학생과 학부모들로 인해 아픔을 많이 느꼈다면 나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그게 또 미안했다. 끊임없이 '여기가 내가 평생 있어야 할 곳이 맞는지' 의심했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한 명 정도는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함?)'이란 말을 할 것 같다. 그렇다. 아무리 힘들었노라고 말해봤자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은 100% 나의 의지였다. 왜 하필, 높은 도덕성과 성실함과 뛰어난 재능과 성스러움을 요구하는(하지만 박봉인) 이다지도 어려운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교사가 된 과정을 보면ㅡ내가 대단히 이타적이며 봉사심이 뛰어난 성녀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선생님들이 좋았다. 나의 스승들은 따뜻하고 좋은 분들이셨다.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어느 날은 당신의 직업에 만족도가 높았던 한 여선생님이 우리에게 "여자 직업으로 교사가 왓따다."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더욱 솔깃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여교사는 사기업에 다니는 여성들보다는 비교적 일찍 퇴근해서 도우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녀를 돌볼 수 있었기에 '돈도 벌고 애도 보는, 남편과 시댁에게만 왓따인 존재'였지만 말이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공부를 소름끼치게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국어나 영어는 조금 잘했다. 대학을 선택할 무렵, 다들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면서 교대와 사범대학의 인기가 치솟았다.  사범대학에 가기로 했다. 국어교육과와 영어교육과 중에서 고민하다가 수능 수에 비해 실제 영어회화실력은 "How are you?"하면 "I'm fine, and you?" 나오는 수준이었기  더 자신있는 국어 과목의 교사가 되기로 했다. 그뿐이었다.

   



어느 해, 정교사 임용시험의 최종 관문인 면접시험에서 나는 어떤 교사가 되겠냐는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하고 있었다.

"저는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정말 진심이었다. 내 앞에 앉은 세 명의 면접관들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을 하고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나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교실에서 엎드려 자거나 떠들거나 화장을 하거나 반항기 가득한 눈빛의 학생들에게 부드럽게 달래것 외에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씩 내게 하는 듯한 거친 욕설을 들어도 못듣는 척 넘기기 시작했다. 들었다 한들 뭐 어쩔 것인가. 아이들은 당당했고 나는 비겁했다. 진이 빠진 채로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모범이 되겠다는 야무진 마음은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무렵,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여고 시절의 은사님 한 분이 머릿속 다시 떠올랐다. 팔자 눈썹을 가진 수학 선생님이었는데 수줍음이 많았다. 원래 이름은 '병S'인데 짓궂은 아이들은 이름 대신 '병X'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우리들 대부분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어두웠다. 수줍은 그의 성격에 짓궂은 여고생들은 버거웠을 것이다. 매일 수업을 하러 교실에 들어오면 그는 우리를 쳐다보는 대신에 책과 벽만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그의 수업은 강의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가끔 숨이 잘 안쉬어지는 듯이 숨을 천천히 내쉬기도 했다. 가끔 애들이 왜 우리를 쳐다보지 않냐고 항의하면 얼굴 전체가 새빨개졌다가 하얘졌다. 아이들은 귀엽다고 웃었지만 그중 몇몇은 "병x"이라 속삭였다.


나는 열심히 그의 수업을 들었다. 그와 눈 한 번 마주쳐 보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선생님이 나를 바라본다면 이렇게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다며, 그러니 용기를 내라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해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단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않았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면 이젠 살았다는 듯이 매번 황급히 교실을 나가버렸다.




아이들 좀처럼 눈을 마주칠 수 없던 순간, 20년 전의 그가 다시 생각난 것은 왜일까. 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서였을. 몇몇 드센 친구들 얼마나 짓궂게 그를 괴롭혔던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만난 아이들도 한 명씩 보면 다 사랑스러웠다. 지루한 국어시간, 나는 그들이 잠을 자 화장을 하는 것보다 수업에 집중을 했으면 했다. 아이들을 애정했으니까.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우스운 농담도 던져보관심있어 할 것 같은 얘기들도 꺼내봤지만 아이들은 잠깐 집중하는 듯하다가 어느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매년 받아보는 교원평가지에는 어느새 공격적인 평들도 많아졌다.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부정적인 평가는 매년 더 심해졌다. 여전히 맹목적으로 선생님을 사랑해주는 아이들도 존재했지만 익명의 힘을 빌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아이들도 점점 많아졌다. '되지도 않는 농담은 집어치우고 시험 대비에나 좀더 신경 써주세요.'라든가 '여자아이들이 너 존X 싫어하더라. 왜 그럴까 맞혀보세요.'와 같은 문장도 아팠고 심지어 자식을 입에 올리는 아이도 있었는데 그건 한동안 정말 많이 아팠다. 누가 그랬을까 짐작하는 일마저도 괴로웠다. 한편으로는 내가 예쁜 아이들을 그렇게 바꾼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사과를 할까 훈계를 할까 망설이다가 휴직에 들어가기 전까지 끝내 아무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심한 성희롱 발언이 적힌 교원평가지를 받고 이에 대한 공론화를 시킨 젊은 교사가 최근에 끝내 교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라서 심하게 흔들리는 존재에게 아무도 나서서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녀는 여러 모로 크게 실망을 한 듯했다. 예전에 내가 다니던 학교와 불과 15분 거리에 떨어진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용감했다. 그리고 나는 비겁했다. 내가 아무리 무기력했어도 아이들이 하면 안되는 말과 행동을 하면, 그러면 안된다고 알려줬어야 했다.




용감한 교사는 일을 그만두었고 비겁하던 교사는 이제 복직을 준비한다. 교재를 공부하고 상담 방법을 배운다. 더 이상은 예전의 무능하고 자기연민에 찌든 교사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면접에서 말했던 것처럼 아이들의 모범이 되는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만날 아이들에게 힘주어 또박또박 말하고 싶다.

"다시 보는 너희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구나. 우리는 함께 성장하는 사이구나." 


다시 한번 서로를 믿어보지 않겠냐며 웃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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