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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Sep 21. 2023

복직이 5개월 남았다.

육아휴직 3년차

 



육아 휴직 기간이 3년 반을 넘어간다.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나도 미처 몰랐는데 어쩌다보니 거듭해서 휴직 기간을 연장하게 되었다. 내년 3월에는 틀림없이 복직을 해야 한다. 5개월 후면 복직을 해야 하는 사실이 나는 아쉽기만 한데 첫째는 집에만 있는 엄마가 부담스러웠는지 요즘 자꾸 "엄마, 이제 일해."라고 말한다. 며칠 전에는 시모가 안부전화의 끝에 악의 없는 말투로 "근데 너 언제까지 노냐."라고 물어보셨다. 이제는 정말 복직할 때가 온 것 같다.



(1) 딸 이야기


육아휴직을 신청한 건, 명목상 둘째의 임신때문이었다.

3년간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학교 일과 육아를 홀로 병행하는 일은 많이 고단했다. 둘째 임신의 사실을 알았을 때 그래서 걱정도 했지만 한편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휴가에 들어가는 나의 모습은 흡사 병가를 낸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깨지고 상했던 몸과 정신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많이 회복됐다.


아이 둘을 키우는 일이 물론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워낙에 주변에서 아이가 둘이면 두 배 힘들어지는 게 아니라 수십 배는 더 힘들어지는 거라느니 세상에서 제일 후회하는 일이 아이 둘 낳은 일이라느니 하면서 겁을 줬어서 그런지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오히려 적막하던 집안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니 생기가 돌았다.


여유가 생기니 나를 돌아보고 돌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육아와 살림의 일이 끝나면 시간을 쪼개서 아파트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영어 공부도 하고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좀 사람 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육아(兒)휴직이었지만 한편 육아(育)휴직이기도 했던 것이다. 선물처럼 찾아온 둘째는 숫제 한 집안을 살려낸 복덩이였다. 




그렇게 나를 살리러 이 세상에 온 둘째는, 시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태몽도 어머니가 꾸셨다. 꿈 하나에 맑은 물과 다슬기와 개구리와 황금빛 자라가 전부 등장했다. 나는 아직도 꿈의 정확한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몰라 헷갈리지만 어머니는 최고 좋은 꿈이라며 만족해하셨다. 그러다가 생김새마저도 당신을 똑 닮은 손녀가 세상에 나왔으니, 그동안 딸이 없어 못내 아쉬워하던 어머니는 아기를 보자마자 완전한 사랑에 빠지고 마셨다. 지금도 시댁에만 가면 어머니는 그동안 못다한 한을 푸는 것처럼 아이의 머리를 땋아주고 분홍색 원피스를 사서 입힌다. 즐거워하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둘째가 어머니의 영혼 또한 구원했음을 느낀다.


둘째는 대단한 왈가닥이다. 얌전한 첫째와 달리 발랄하고 장난기가 넘쳐서 어디에서나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주 어린 아기 때부터 명랑한 성격이 점차 드러나는 것이 참 신기했다. 울 때도 그냥 안 울고 한껏 사납게 울었고, 웃을 때에는 늘 주위를 환하게 밝힐만큼 함박웃음을 지었다. 욕심도 많고 질투도 많다. 가끔은 아이의 극성스러움에 진이 다 빠지지만 그래도 밝고 야무진 모습이 대단히 귀여웠다.


때때로 남편과 둘째가 쌓인 에너지를 분출할 길이 없어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막춤을 추기 시작하면 첫째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각각 키 178cm와 100cm인 크고 작은 두 사람이 엉덩이를 흔드는 모습이 붕어빵처럼 똑같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유전자의 신비란! 요즘에는 믿었던 첫째마저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대는 둘 사이에 슬며시 끼어들어 (부끄러워하면서도) 같이 춤을 추기에 이르렀다. 이러다 몇 년 후에는 아빠와 아들과 딸이 '전국노래자랑' 무대 위에서 신나게 막춤을 추지나 않을는지, 그리고 무대 아래에서는 내가 '가문의 영광! 최우수상 가즈아~!'와 같은 피켓을 열심히 흔들고 있지는 않을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2) 동료 선생님들 이야기


한편 내가 육아휴직을 낼 무렵, H쌤과 L쌤도 함께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며 친해진 선생님들이었다. 우리는 비슷한 연배와 가정 상황으로 인해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동안 학교에서 섬처럼 외따로 지내던 나는 마음이 맞는 또래의 선생님들을 만난 것에 진심으로 감격했다.

직장 내에서 친목을 다질 만한 시간이 많지는 않았으나 짬이 날 때면 우리는 으레 서로의 교실에 모여 대화를 나눴다. 다들 학교 이야기보다는 주로 남편과 자녀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런 얘기가 아무래도 훨씬 더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H쌤은 사회 선생님으로 감성적이며 공감능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기관지염이 와도 목을 부여잡고 아이들과 매일 상담을 했고 새벽에는 자녀를 재워놓고 성실하게 교재탐구를 했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부장교사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담임을 맡는 유니콘 같은 교사이기도 했다. 나라면 "잘됐네요"로 간단히 끝낼 말도 H쌤이라면 감탄사를 남발하며 "우와~멋져요~대단해요~최고에요~"와 같은 말들로 상대방을 기분좋게 했다. 학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그런 H쌤에게 좀 버릇없이 구는 것 같다가도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를 부르듯이 H쌤부터 찾았다. 영화 '엘리멘탈'을 보면서 나는 사랑스러운 울보 웨이드가 H쌤을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L쌤은 본인 담당과목인 수학과 정말 잘어울리는 성격의 선생님이었다. 수학쌤답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데 거기에다 인간미까지 있었다. 어떤 일이든지 L쌤만 거치면 항상 명쾌하게 정리가 됐다. 그냥 쿨했다. 나나 H쌤이 어떤 일에 대해 근심하고 있노라면 L쌤이 늘 큰 목소리로 "에이~ 그건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MBTI 검사를 하면 전형적인 F일 듯한 H쌤과 전형적인 T일 것 같은 L쌤이었다. 성격이 참 다른 그 둘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참 재밌었다. 가끔 H쌤이 아주 감성적인 말을 할때마다 "예? 뭐라고요?" 반문하며 놀라는 L쌤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은 내게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당시 학교와 가정 모두에서 낙제점을 받고 있었다. '제 할 일도 잘 못하는 어리버리한 아줌마'쯤의 포지션을 맡고 있었다.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이를테면, 나에게 반감을 가지고 일부러 책상을 두드리며 수업을 방해하는 남학생이 있었는데 고작 학생 하나를 잘 다루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이상의 큰 잘못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셀 수도 없었다. 집에서도 엄마로서 역할을 잘해내지 못했다. 분명히  노오오력은 하고 있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때 H쌤과 L쌤이 엉망진창이던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유능한 선생님이었지만 같은 엄마이자 교사로서 내가 느끼는 어려움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어벤저스와도 같이 H쌤의 공감능력과 L쌤의 논리적 문제해결력은 위험의 순간순간마다 나를 건져냈다. 덕분에 학교를 옮기고 육아휴직을 내기 전까지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한때 '과연 둘째를 낳아야 되는가'에 대해서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다. H쌤은 '하나는 외롭다, 둘은 낳아야 한다'였고 L쌤은 '생기면 낳겠다'였으며 주말부부를 하며 아이를 키우던 나는 '내 사전에 둘째는 없다'였다. 그런 우리 세 명 다 나란히 같은 연도에 휴직을 하고 전부 딸을 낳았다.


셋 다 주부의 모습으로 만나는 일은 정말 편안하고 즐거웠다. 어두침침한 교실 한 구석에서 목소리를 낮춰가며 대화를 나누다가 평일 대낮의 카페에서 편한 복장으로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만나면 2시까지만 얘기하자 했지만 실제로는 5시가 넘어서야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그러면서도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서 다음 기회를 약속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L쌤이 주위를 둘러보며 이런 평일 대낮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저 여자들은 대체 무슨 복이냐며 부러워했다. 우리도 같이 앉아있긴 했지만 그녀들과 좀 다른 처지이기는 했다. L쌤의 휴직은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속에서 하필 옆 자리에 앉은 한 무리의 여자들이 자녀의 담임 선생님을 흉보기 시작했다. 그때가 시험기간이라 학생들이 시험을 치른 후 일찍 하교를 했는데, 담임교사가 조퇴를 내고 아이보다 더 일찍 학교를 나가는 것을 봤다는,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우리는 애써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쩌면 그리 다사명감이 없는지 몰라.'라는 말에는 그만 모두 흠칫하고 말았다. "사명감? 대체 무슨 사명감?" L쌤이 속삭이며 분노했고 H쌤은 울상을 지었다.


그들은 내가 아는 가장 사명감 넘치는 교사들이었다. 그 둘의 성격은 정 반대였으나 유일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학교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아주 과묵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녀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어두운 표정으로 "오늘은 좀 힘드네요."정도로 얼버무리고 마는게 그녀들의 특성이었다. 혹 방금 전 학교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조심스레 입을 떼더라도, 그때의 자신이 더 부족했다거나 그때 그 아이(학부모)는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거나 하는 싱거운 결론을 내릴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 날 우리의 만남이 있은 후로부터 한 달 후, 대한민국의 모든 매체에서 한 초등교사의 죽음에 관한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성실했던 젊은 여교사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평일 대낮의 카페에 앉아 함께 분노하선생님들은 어느 새 복직을 했다. 여전히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바삐 살아간다. 


활기찬 L쌤하고는 가끔씩 안부전화를 하며 서로가 안녕한지를 묻는다. 그녀는 복직을 하니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며 '일장일단'이라고 했다. L쌤은 "쌤, 닥치면 다 하게 되던데요. 저는 괜찮아요!"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 휴직이라는 것이 더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긍정적인 목소리는 정말 듣기 좋았다. 나도 덩달아 기운이 솟았다.


H쌤은 복직 후에도 나와 함께 '미라클 모닝'이나 '감사일기'를 쓰고 카톡으로 인증 샷을 주고 받는다. 휴직중인 나는 쉽게 성공하지만 현재 고등학교에서 담임을 맡은 H쌤은 종일 그 많은 일들에 치여 사느며칠에 한번 겨우 인증사진보내온다. 많이 힘들까봐 그만두어도 좋다고 말했지만 H쌤은 아니라고, 이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다고 다. 속으로만 감내하며 하루를 지냈을 H쌤이 가끔씩 보내오는 사진 속 글을 읽다보 어쩐지 나도 그녀처럼 매우 감성적으로 변하곤 한다. 나는 그녀를 살게 하기 위해 인증하는 일에 계속 동참하기로 했다.


나의 육아(育我)휴직 기간도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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