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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Sep 20. 2023

여섯 번째 이삿짐을 꾸리며(1)

신혼집은 '불편한 세상'



이사 날짜가 2 주 앞으로 다가왔다.

여섯 번째의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이제 막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첫 보금자리를 남부 지방의 한 소도시에 꾸렸다. 창 밖으로 철길이 내다보이는 아담한 아파트였다. 새벽이면 잠결에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고 창문을 열어두면 까만 먼지가 창틀에 쌓였다. 동료 선생님이 '불편한 세상'에서 사냐면서 짓궂게 놀리긴 했으나 그래도 집은 참 안락했다. 신혼이니만큼 귀여운 소품들로 아기자기하게 집을 꾸몄고 저녁이면 남편과 손을 잡고 아파트 주변을 함께 걸었다. 그는 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 나는 기간제 교사로 우리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데이트를 마친 뒤에도 같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행복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첫 집은 나에게 설렘의 공간이었다.


두 번째 집경기도 수원의 한 번화가에 위치한 구축 아파트였다. 남편의 근무지 이동으로 갑자기 이사를 했다. 집을 구할 시간도 충분치 않아서 결국 남편 회사가 사택으로 제공해 준, 지은 지 20년 된 아파트로 들어가게 됐다. 허옇게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한 집은 그럭저럭 깨끗했으나 하필 호수가 404호였다. 미신은 안 믿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괜스레 팔을 쓸어내리며 입고 있던 카디건의 앞을 여몄다.


동네의 분위기도 나와는 결이 맞지 않았다. 신도시의 잘 계획된 깨끗함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이왕이면 정갈한 공원과 도서관이 있는 작은 동네였으면 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이곳은 주변 회사의 직장인들을 겨냥한 각종 유흥시설들이 즐비한, 낮보다 밤에 더 화려하게 피어나는 동네였다. 밤이면 골목마다 시끄러운 음악이 울려펴졌고 술에 취한 사람들이 주사를 부렸다.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방음이 잘 되지 않아 새벽마다 열창을 하는 남자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네온사인의 불빛이 스며드는 방 안에서 뒤척이고 있노라면 어쩐지 내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나는 첫 아이를 낳았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동네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몹시 쓸쓸했다. 어쩐지 필사적인 기분이 되었다. 놀이터에 유모차를 끌고 나가서 또래 아기 엄마를 보면 용기내어 말을 붙였다.

 아기가 몇 개월이에요?

아무리 낯선 여자라도 경계를 허무는 마법의 문장이었다. 때로는 그녀들 역시 내게 같은 문장을 물어왔다. 온라인 지역 맘카페에서 '양띠 아가 엄마들 중 지금 ㅇㅇ공원으로 모이실 분!'과 같은 글을 보면 재빨리 '저도 갈게요.' 댓글을 달아 그들과 함께 어울리려 했다. 어느 새 같은 처지의 여자들이 많이 모였다. 나는 그녀들과 품앗이 공동 육아를 했고 숨통이 좀 트였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외로움을 잊었다. 집집마다 다 비슷하게 살고 있었다. 우리는 장난감과 육아용품 사이에 둘러앉아 아이들의 이유식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가며 주사를 안아프게 놓는 소아과와 괜찮은 육아용품 공구에 관한 정보들을 공유했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 나는 새로운 발령지의 학교에 가서 근무를 해야 했다. 다시 거주지를 옮겨야만 했다. 우리는 아쉬워 눈물을 보이며 다음에 또 만나자고 했지만 이뤄지지 못할 말인 것은 서로가 잘 느끼고 있었다. 두 번째 집은 아이를 키우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우리는 좀 더 나은 거주지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세 번째 집에서는 나와 아이 둘만 지냈다. 내가 학교에 가게 되면서 등하원 도우미와 기관의 도움을 받아 홀로 세 살의 아이를 육아했다. 남편은 아무래도 직장이 너무 멀어져서 주중에는 기숙사에서 머무르고 주말에만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생활은 그냥 '힘들다'라는 단어로만 적기에는 너무, 잔인했다. 그때 나는 항상 정신이 좀 나가 있었다. 몇 년 쉬고 난 후 정교사로 다시 가게 된 학교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정말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도 겨우 본전치기였으나, 나는 20개월 된 아들을 홀로 키우는 엄마이기도 했다. 둘 다 보란 듯이 잘해내고 싶었는데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교사로서도 엄마로서도 낙제점을 받고 말았다.


자존감은 갈수록 심하게 낮아졌다. 집에서 샤워기를 켜놓고 울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괜히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이가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한 탓인지 '발달이 느리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침마다 출근하는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 울었다. 떼놓고 집을 나서도 아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그 즈음부터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여 약을 처방 받았다. 그때의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우리의 세 번째 집은 모자 단 둘이서 지내기엔 무서울 정도로 너무 넓고 휑했다. 밤이면 가장 작은 방의 구석진 자리에 이불을 펴고 어린 아들과 꼭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내 어깨에 올린 아이의 작은 손이, 다르랑하고 코를 고는 소리가,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세 번째 집은 어둠이 차갑게 내려앉은 고통의 공간이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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