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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Sep 20. 2023

엄마는 괜찮아. 미안해.

엄마가 또, 차 사고를 낸 날




남편에게서 장모님이 또 차 사고를 낸 것 같다는 전화가 왔다.


 차 명의자로 되어있는 남편에게 사고 접수 문자가 날아온 것이다. 엄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많이 놀란 목소리였지만 정말 다행히도 다치진 않으신 것 같았다. 까닭을 들어보니 출근길에 마음이 바쁜 나머지 추월을 하려다 일어난 사고로 100% 엄마의 과실이었다. 이번에는 폐차를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 했다. 일단 엄마가 괜찮다 하시니 한숨은 돌렸지만, 이른 아침 아이들 등교와 등원 준비로 부산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벌써 여러 번이었다. 자잘한 접촉사고 같은 건 엄마에게 흔한 일이었다.


 몇 년 전 엄마는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남편 명의로 차를 구입하여 직원 할인을 받았고 사위 덕 톡톡이 본다며 행복해하셨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엄마는 운전을 하면서 자주 덜렁대는 모습을 보였다. 정차 중에 떨어진 물건을 줍다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서 앞차 꽁무니를 콩 박기도 하고, 주차를 하다가 라바콘을 저멀리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두어 달에 한 번씩 차량 소유주로 등록된 남편에게 과태료 쪽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속도 위반, 신호 위반, 주정차 위반... 엄마는 '음주운전'을 제외한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도 교통법규를 위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웃으며 "또 왔다." 말하던 남편은 점차 심각해졌고 말없이 나에게 과태료 고지서를 내밀기 시작했다. 엄마가 내는 자잘한 사고가 자동차보험료 할증이 붙는데 한몫한 것 같았다. 나 역시 남편에게 무안해져서 웃음으로 때우기를 여러 번, 슬슬 짜증과 걱정이 번갈아 커지던 참이었다. 심지어 몇 달 전에는 입원을 해야 할 정도의 사고가 나기도 했다. 생각에 잠긴 엄마가 뒤늦게 정차신호를 보고 급브레이크를 밞다가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목과 등에 충격을 받은 엄마가 병원에 있다가 퇴원한지 이제 겨우 반 년이 지났다. 이제는 가족들이 엄마가 운전을 한다고 하면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란 가슴 미처 쓸어내리기도 전에 오늘 또 다시 이런 큰 사고가 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의 사고가 나지 않도록 대책을 빠르게 강구해야 할 때였다.

엄마는 60대 초반의 나이로,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에 따른 고령 운전자의 실수로 치기에는 아직 너무 젊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고를 좀더 불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법규위반을 하는 희한한 애국자라거나, 성격이 모가 나서 경범죄를 저지르는데 거리낌이 없는 악인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엄마는 모든 사고에 이유가 있었다고 핑계했다. 아니, 핑계가 아니라 엄마에게는 정말 진심이었을 것이다. 미처 못봤거나 자신이 그렇게 빠른 줄 몰랐거나 다른 사람이 너무 가깝게 붙었던 거였다. 고의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운이 안좋은 선량한 시민이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평소에도 엄마는 접촉사고 말고도 일상에서도 실수가 잦은 분이셨다. 남들이 보는 엄마는 시골 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항상 우아하고 점잖은 카리스마를 뽐내는 중년여성일지 모르나, 집에서의 엄마는 그저 온 가족의 짜증을 받아내는 덜렁이 아줌마일 뿐이었다. 항상 들떠 있다고 해야 하나, 엄마는 매일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깨뜨리고 넘어지면서 존재감을 뽐냈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 끝에는 항상 엄마에게 잔뜩 짜증이 난 아빠가 잔소리를 퍼붓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어릴 때에는 '아빠는 왜 항상 엄마한테 화를 내지?'라 생각했다면 커서는 '엄마는 왜 항상 아빠 화를 돋우지?'로 바뀌었다. 조용하고 정적인 다른 가족에 비해서 엄마는 너무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젊은 날의 엄마는 아주 아름답고 우아했다. 비록 일을 하느라 비가 와도 내게 우산을 가져다 주거나 운동회에 자주 참석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엄마가 밉지 않고 좋았다.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으면 그만이었다. 어느 해에는 어떻게 왔는지는 몰라도 운동회가 거의 끝나갈 때쯤 엄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기도 했다. 베이지색 정장 스커트 차림의 엄마가 나를 부르자 돌아본 아이들이 "와, 너네 엄마 예쁘다."며 부러워했다. 그러면 나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밤이면 엄마는 침대 옆에 놓인 주광색의 램프를 틀고, 나와 오빠에게 아름다운 내용의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우리가 잠들 때까지 은은하게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주기도 했다. 그런 엄마라서 좋았다. 아빠가 늦게 퇴근하는 날, 엄마는 비싸던 바나나를 사서 칼로 예쁘게 썰고 포크로 찍어서 어린 남매의 입 속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비오는 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한 입씩 먹던 바나나의 맛은 마흔의 기억에도 아주 달콤했다. 주인집 한 켠에 딸린 작은 전셋집의 마루 위에서 막 씻고 나온 엄마와 어린 오빠와 내가 나란히 일렬로 서서 젖은 머리를 털기도 했다. 엄마가 수건을 돌돌 말아 머리를 탈탈 터는 동작의 시범을 보여주면 오빠와 나는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이 재미있어 까르르 웃었다.  

 

엄마는 한때 섬마을 바닷가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느라 시댁에 어린 남매를 맡겨 놓은 적이 있었다. 주말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돌아갈 때면 아이들이 저희도 가겠다고 계절에 안맞는 옷을 꺼내 입어서 젊은 엄마를 울게 했다. 언젠가 함께 차를 타고 꼬불거리는 고개를 넘어갈 때에 엄마가 창 밖을 가리키며 말해서 알게 됐다. "여기가 바로 눈물길이야. 어린 너희 떼어놓고 학교 관사로 되돌아 가는 길. 그때 버스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나는 기억나지 않은 옛날 일이었다.


때로는 엄마가 학교공개수업에 오지 못한 것에 심통난 어린 남매가 "엄마 일 그만두면 안돼?"하고 조를 때도 있었고 때로는 남편이 함께 이른 퇴직을 하고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자고 권유했을 때도 있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미안한 듯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묵묵하게 자기의 일을 갔다. 그리고 이젠 교장으로서 퇴임을 몇 년 앞두고 있다. 성실하고 우아하며 강인한 여자였다. 다만 가끔씩 덜렁댈 뿐이었다.

   



엄마는 괜찮아. 그리고 미안해.



수화기로 들려오는 엄마의 말. 아직도 놀란 기가 가시지 않은 풀죽은 목소리에 나도 눈물이 핑 돈다. 괜찮은 건 둘째치고 미안한 건 또 뭔가. 해가 갈수록 사고의 정도가 심해지는 엄마가 나는 자꾸만 염려되었, 그녀는 어느새 당신이 챙김을 받는 나이가 되어가는 것에 낙심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앞으로 천천히 함께 가자고 말했다. 그녀말 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아지기만을 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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