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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Sep 15. 2023

남편이라는 이름의 존재


기호와 수식으로 채워진 전공 서적은 쉬이 볼 줄 알아도

지갑보다 얇은 시집은 두 장을 넘기지 못하는 남자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마흔의 그는 독서가 취미인 나를 신기하게 생각한다.

는 여가 시간이면 종 스포츠 경기 중계를 챙겨보는 걸 낙으로 여긴다.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살고 싶어서 주식과 부동산 관련 책을 탐독하고 재테크 카페에 가입하며 자산을 불리기 위해 힘을 쏟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1시간 넘게 줄을 선다. 흥이 오르면 집 밖에서도 뻔뻔한 표정으로 헛둘헛둘 기합을 넣어가며 춤을 춘다. 그것도 자기만 추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들까지 선동해서 길거리에서 함께 막춤을 추게 만든다. 그래서 나 혼자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조금은 부끄러운 존재이다.

마흔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체로 온 집안을 활보하거나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볼일을 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할거야?"란 질문을 던질 때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항상 '태어나도' 쯤에서  [아ㅡ니ㅡ]라고 힘주어 대답하는 새침한 존재이면서, 그래놓고 내가 [그럼 나도 아ㅡ니ㅡ!]라고 대답하면 어쩐지 조금 삐지는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도 크게 벌린 입으로 밥을 욱여넣는 그의 모습이 아직은 밉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스무 살, 실패한 수능을 만회하고자 다니게 된 종합입시학원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좋아하던 배우 박해일과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이 박해일이 다 얼어 죽었냐고 킬킬댔어도 나는 그를 지칭할 때마다 꿋꿋하게 이름 대신 박해일이라고 불렀다.  

스물의 그는 원체 말이 없었다.(20년 후 그가 엄청나게 수다스러워질거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의 선택은 좀 달랐을까.) 그리고 그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눈으로만 보고도 풀 수 있는 아이였다. 가끔씩 안경을 썼다 벗었다 했는데 두 모습 다 괜찮았다.

종종 그가 나에게 국어 문제를 물어오고 나도 그에게 수학 문제를 물었다. 그러나 그의 옆자리는 늘 학원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의 차지였고, 그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 역시 다른 말 많고 편한 남자애들과 편의점으로 바나나 우유를 사러 나갔다. 그때의 우리는 그냥 그 정도였다.


그러던 우리가 서른에 부부의 인연을 맺고 마흔이 된 지금은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세상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지. 


그와 나와의 장르는 '로맨틱 드라마'에서 어느새 '호러코미디 액션활극'으로 변해 있었다. 결혼을 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와 습관, 취향, 양가 부모님, 지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퉜다.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상대를 아프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며 각종 날선 말과 행동을 하는데 열중했다. 아이들을 낳으면서 싸우는 횟수는 더 늘었다. 더 이상은 지쳐서 싸울 수 없을 만큼 온 기력을 다한 전투는 몇 년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머리에 하얗게 새치가 나기 시작한 후에야 서로를 상하게 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지쳐버린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너덜너덜 찢겨버린 우리의 조각보를 다시 함께 깁기 시작했다.  


지금의 우리는 여전히- 사기 결혼을 제대로 당했다느니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당신의 여생은 요양원에서 보내게 될 거라느니 하는 살벌한 말들을 농담이랍시고 주고받는다. 그러다가도 어느 한 명이 등이 가렵다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의 옷 속에 손을 넣어 빨간 줄을 그리며 박박 등을 긁어준다.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  


내가 여전히 그를 귀엽다 여기는 건 비밀이다. 나는 아직도 마흔의 그에 스물의 그를 겹쳐 보고 있었다.

그는 좀 늙고 안타깝게 생긴 버전의 박해일이긴 했어도,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 박해일이었다.    




덧) 박해일은 사실 뻥입니다. 그는 코미디언 나선욱을 좀 더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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