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실수를 할 때가 있어.
전화위복은 인생의 진리인가.
"걱정 마. 우리들도 버스 엄청 자주 세워. 부끄러운 일 아니야. "
- Antalya, Turkey. 안탈리아행 버스 안. 화장실이 급해서 길 한복판에 버스를 세운 뒤 날 토닥거리던 버스 안의 할머니.
때는 2005년 겨울 터키. 마침 그때는 터키의 명절이라 혼잡한 버스터미널에서 겨우 안탈리아행 버스표를 샀고, 출발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4시간가량 소요된다고 했다. 명절 버스라 그런지 40여 명 정도 되는듯한 승객 중 나만 외국인이었고 다들 나를 호기심 있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딱히 말을 걸진 않(못한)은채, 휴게소에 도착했다. 반 정도를 왔기 때문에 이제 2시간만 더 가면 된다고 생각했고 나 혼자 이방인이란 생각이 들어 사방을 경계하느라 내릴 엄두를 내지 못해 화장실은 들르지 않았다.
무언지 모를 세상 전체를 잔뜩 주시하며 움츠린 채 지금쯤 도착해야 하는데 하고 창밖을 보니, 갑자기 내린 눈에 산속에서 버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휴게소를 다녀오지 않은 나, 버스에서 제공하는 차 4-5잔을 생각 없이 들이킨 나 자신을 원망하기 무섭게 점점 방광의 압력은 차오르고, 버스 안에 갇힌 지 6시간째 되었을 때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표정관리가 되지 않을 정도까지 왔다. 잔뜩 웅크리고 혼자 끙끙대길 1시간째, 결국 옆자리의 내 또래 아가씨가 "무슨 문제 있냐"라고 물었을 때 화장실이 급하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내 옆자리의 아가씨는 영어가 아주 능숙했고 내 사정을 설명하자마자 버스 안내원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더니, 걱정 말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1분 1초가 억겁처럼 지나가고 몇 분 뒤, 휴게소나 건물 정도에 정차할 거라고 생각했던 버스는 그저 산 정상의 한 복판에 서더니(이럴 거면 아까 거기 서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가..) 바람 빠지는 기계소리가 나며 버스 앞문이 열린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어도 괜찮다며 거절했을 상황이었지만 그 당시는 정말 그야말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마자 내 인생 최고의 속도로 달려 나가 최대한 멀리 뛰어서 나무 뒤에 앉았다. 그야말로 폭발 직전의 아찔한 순간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그렇게 넘긴 뒤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며 버스로 걸어오는데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창문으로 날 보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걸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몇 명이 버스에서 나오더니 각자의 나무를 찾아 걸어간다. 급한 불을 끄고 나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제야 민망함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날이 추워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발개진 볼로 버스에 들어서자 한 할머니가 터키 말로 말을 걸며 과자를 손에 쥐어준다.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충분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아. 아가씨. 우리도 다들 자주 차 세워. 걱정 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어. 토닥토닥.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안탈리아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도시였다.] 자리에 앉자 아까 나를 도와주었던 옆자리의 아가씨가 말을 건다. 안야(A)는 20대 초반 아가씨로 타지방에서 일을 하다가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남동생과 아주 어린 10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어 일을 해야 한다고, 오랜만에 가족을 보는 거라 행복하다며 활짝 웃는 패션센스가 좋은 마른 몸의 아가씨였다. 대화는 만국 공통의 사랑이야기까지 이어져 한참을 그녀의 남자 친구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예상시간보다 4시간 늦게 안탈리아에 도착하게 되었다. 예상보다 늦은 도착시간에 숙소까지의 이동도 막막한 시점. 버스 안의 모든 이가 날 도와준다. 그 숙소까지 가려면 이 시간엔 이 버스를 타는 게 좋겠어. 모두의 토론 끝에 내가 탈 시내버스를 점찍어주고, 심지어 한 아저씨는 내가 타는 버스의 기사님께 따로 내릴 지점까지 당부해주고 떠난다. 덕분에 길고 길었던 하루를 안전한 숙소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날 가장 가까이서 도와줬던 옆자리의 A양과는 다음날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했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해가 뜨고 맞이한 안탈리아는 그야말로 찬란했다. 푸른 바다와 설산, 해안가의 절벽. A양과 시내를 돌아다니며 배도 타고 쇼핑도 하고 인생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어 명절 내내 매일 A양을 만나 놀러 다니기를 나흘째. 그야말로 우린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고 안탈리아를 떠나기 전날, A양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수많은 여행지에서 집으로의 초대는 늘 거절했던 나도 기꺼이 선물(당시 터키쉬 딜라이트)을 사들고 초대에 응했으며 더듬거리는 영어로 인사를 건네는 수줍은 동생들과, 말 한마디 안 하고 날 쳐다보기만 하지만 한국에서 쌀을 먹는다는 이야기에 온 저녁상을 쌀로 가득히 차려주신 어머니까지. 그야말로 터키 사람의 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던 저녁 초대였다.
[A양과 헤어질 때 선물로 나눴던 나자르 본주. 생긴 건 좀 그렇지만 재앙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내가 버스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이 수많은 친절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그저 아무 일 없이 버스에서 내렸다면 평생 몰랐을 따뜻함과 인연들. 안탈리아라는 작은 휴양지가 내 기억에 이리도 흐뭇하게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내 작은(?) 방광과 휴게소를 넘겨버린 내 실수 덕분이었다.
누구나 기억을 더듬어보면 있을 거다. 실수로 점철된 이불 킥 하고픈 어떤 순간들이. 그렇지만 그런 순간들이 지나고 보면 한껏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 실수들이 있었기에 벌어질 수 있었던 전화위복의 순간들도 분명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앞으로도 또 실수하고, 자책하고, 멍청이 같은 일을 벌이겠지만, 나의 이러한 인간다운 매력(?)을 인정하고 이 실수가 불러올 웃음과 전화위복의 순간들을 기대해 보아야겠다. 또한 그때 당시 나를 따뜻하게 토닥거려줬던 버스 안의 사람들처럼, 누군가의 부끄러운 순간에 도움을 주고, 토닥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한 번 더 결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