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동굴 안에 은둔하다
창문을 닫고 휴대폰을 들었다. 내 방과 세상 사이에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휴대폰의 '라디오 태국' 앱을 터치하니 수많은 방송 리스트가 나왔다. 개미가 기어 가는 것 같은 글자들 사이에서 'COOL Farenheit'를 터치했다. 잠시 후, 요란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조가 5성이나 되는 태국어는 현란했다.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마 광고일 것이다. 짤막한 외침이 지나고 상킁한 태국 노래가 방안을 휘저였다. 뚯을 할 수 없지만 달콤새큼한 파인애플 맛이다.......종종 듣는 'FM MEKONG'을 터치하자 태국어보다 높낮이가 더 급격하게ㅐ 변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염소 울음 같은 베트남어가 여행의 추억을 불러내고 있었따. 문득, 베트남의 어느 허름한 여관에 묵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 아나운서의 발음이 베트남의 연유커피처럼 쓰고 달콤했다. ......아는 것이 고통이요, 모르는 것이 즐거움이다. 폐허로 변한 의미의 세계를 모호한 소리가 재건하고 있다. 평화가 내 안의 짜증을 어루만져 줘었다. 이번에는 서양으로 가볼까? '라디오 포르투갈'을 켰다. 수많은 방송 중에 무엇을 들을까? 모르겠다. 'RFM'을 눌렀다. 오, 여성의 말소리가 부드럽게 굴러가더니 뒤이어 노래가 흘러나왔다. 탁 트이고 시원했다. 포르투갈의 어느 해변에 온 것 같은 느낌. ...이번에는 스페인으로 가볼까?......정열적이고 빠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신나는 라틴 음악이 가슴을 흔들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서로 옆 나라인데도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포르투갈어는 졸졸 흐르는 계곡물 같고 스페인어는 폭포수 같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안 보고, 라디오도 듣지 않았다. 주로 휴대폰으로 유튜브나 외국 방송을 들었다. 내가 알아듣는 것은 인사말 정도였다.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순수했다. 언어를 긍정적으로 보며 소설을 썼지만 그것은 내 작품 안에서의 일이었다. 현실, 특히 정치판에서 의미를 담은 언어들은 허황하고 불평등하며 불결했다.
- '가족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어(지상 저, 문학수첩, 2025) pp 10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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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번째 소설에 나오는 글이다. 소설 속 작가 지망생인 지훈의 독백이지만, 실제 저자인 나의 이야기이도 하다. (물론 소설 전체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중간중간 나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언어란 기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이다. 인간의 세상은 어디나 '기호의 제국'이다. 어떤 시대든, 어떤 체제든...인간은 기호의 도움을 받아 세상을 건설한다. 하지만 '기호의 제국'을 지배하는 자들은 늘 불순하다.
그들에게 저항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근원적인 저항을 하는 자들은 기호를 파괴한다. 힘 약한 사람은 세상에 저항하지 않고 기호를 해체한다. 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분리한다. 즉 드러난 소리, 글자 그 자체와 그 뒤에 숨은 의미와 개념을 분리한다.
그때 황홀한 소리들이 폭죽처럼 튀어오르고, 아름다운 글자들이 춤을 춘다. 그 세계에 나는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쓰면 안된다는 조심스러움을 갖고 접근하고 있지만....그래서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 같지만, '기호의 제국'에 저항하는 '테러리스트의 음모'가 숨어 있기도 하다. 아직은 뾰족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눈밝은 이들은 보겠지.......그리고...나는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더 많이 할 것이다.
언어로, 언어를 파괴하는 작업. 그것은 병을 깨지 않고, 병 속의 새를 꺼내라는 불가의 화두처럼 다가오지만, 결국 우리가 언어를 벗어난 어마어마한 세계 근처까지 가는 방법일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캄캄한 우주를 항해하는 기분이다. 저 멀리 안드로메다 은하가 보이지만, 온통, 사방은 캄캄한 암흑. 그 암흑을 가로지르는 기분.
지금 타이베이 방송을 듣고 있다. 여인의 중국어,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만어 목소리가 황홀하다. (나는 중국 대륙의 만다린보다 대만의 꿔이(국어)가 더 듣기 좋다. ) 뜻은 하나도 모르지만...몰라서 더욱....... 모른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 암담한 시대에 뜻을 하나도 모르는 대만 여인의 목소리가 구원처럼 다가온다.
이 세상의 정보와 완전히 차단된 내 방은, 아파트 동굴 안이다. 캄캄한 암흑 속이지만 아름다운 여인의 대만어 소리가 빛처럼 이 공간을 밝히고 있다. 가끔은 태국어, 베트남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독일어, 프랑스어...그리고 오키나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약간 어색한 일본어 소리...
내 아파트 동굴 안을 세상의 온갖 소리와 음악이 가득 채운다. 여행? 어디론가 안 떠나도, 지금, 이곳이 여행지고, 존재 자체가 여행이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소아가 말했듯이 나는 서울 거리에서 '얼굴과 얼굴 사이'를 여행할 때도 있지만, 방안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를 여행하기도 한다. 돈 하나 들이지 않고........외국에 나갔다 해도, 거짓된 의미로 가득한 소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정신은 '기호의 제국'의 노예같은 신세. 그런 것으로부터 도망가기 힘든 시대가 왔다.
여행을 오래 할수록 내게 다가온 문제는 그런 것이었다. 한국 사람 보기가 힘들었던 30여년 전 시절에는 나는 그런 굴레를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이 아니다.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그래서 아파트 동굴 안으로 은둔했다. 가끔은 좀머씨처럼 거리의 그늘을 기웃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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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어 - 예스24
“우리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낯선 체온에 몸을 기대는 시간,가족이 아닌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들첫 소설 《무인카페》를 통해 소외된 개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 사라져 가는 유대를 회복하고자 했던 지상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가족인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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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어 : 알라딘
첫 소설 《무인카페》를 통해 소외된 개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 사라져 가는 유대를 회복하고자 했던 지상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30여 년간 여행작가로 활동하며 장소를 넘어 그곳에 사는 사람과 그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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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어 | 지상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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