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요정 삼청각

희대의 정치스캔들 정인숙 리스트

by 김인숙


우리나라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삼청각


내가 삼청각(三淸閣)을 방문한 날은 11월 16일, 한창 단풍이 아름답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남산 이야기가 길어져 삼청각에 다녀온 시간이 꽤 지나버렸다.


첫눈이 내린 지도 오래전이라 단풍으로 물든 삼청각 사진을 올리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찍어놓은 사진을 내년까지 기다릴 수 없어 삼청각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올려본다.


삼청각은 과거 우리나라 3대 요정 중 하나였다. 70~80년대 한국의 권력과 비즈니스가 은밀하게 움직이던 곳은 바로 ‘요정(料亭)’이었다.


삼청각 정문


정치인이나 사업가들이 접대와 밀실 회동을 하며 화려한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던 삼청각은 대원각, 청운각(혹은 오진암, 선운각)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장소로 남았다.


오늘은 삼청각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변모한 우리나라 요정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고 한다.


요정 정치란?

요정은 고급 요리와 술, 그리고 기생(접대부)의 가무(歌舞)가 함께 제공되던 최고급 유흥업소를 말한다. 일반음식점과 달리 연회를 할 수 있는 공간에서 접대부가 술 시중을 들며 흥을 돋우는 ‘방석 문화’의 정점이었으며 오늘날 룸살롱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회를 주름잡았던 ‘요정 정치’는 삼청각을 중심으로 고위 관리, 재벌, 군인 등이 만나 나라의 운명이 결정될 만한 은밀한 대화와 각종 뒷거래를 했다. 흔히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이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요정 정치(자료-KBS 히스토리)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요정 정치는 사회적인 문제가 됐다. 당시 요정 정치에 대한 국민의 반감은 엄청났다. 요정 정치가 안고 있는 비밀 거래, 공직기강 해이와 풍기 문란, 축첩 문제 등이 연일 도마 위에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최고 요정이었던 대원각(현재 길상사)에서 일하던 정인숙이라는 여인이 총에 맞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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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3 공화국 최대의 정치스캔들 ‘정인숙 리스트’

1970년 3월 17일 밤, 서울 마포구 강변에서 발생한 한 젊은 여성의 피살 사건은 대한민국 제3공화국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교통사고가 아닌 총탄으로 숨진 정인숙(당시 25세)은 요정 종업원이었다. 그런데 죽은 그녀의 빨간 핸드백에서 정관계 고위층의 명함 33장과 수첩이 발견되었다. 빼곡히 적힌 이름에는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장관, 차관급 인사들, 대한민국 국군 장성, 5대 재벌그룹 회장, 국회의원 등의 이름이 있었다.


‘정인숙 리스트’는 곧 정권을 강타했고, 여기에 그녀의 세 살배기 아들의 생부가 박정희 대통령 또는 정일권 국무총리라는 소문까지 겹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파국으로 치달았다.


사건 발생 일주일 후 경찰은 그녀의 오빠를 범인으로 지목하며 서둘러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진실은 현재까지 미궁에 빠진 채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미스터리로 기록되고 있다.


정인숙(본명 정금지, 피살 당시 만 25세)은 1970년대 초 제3공화국을 뒤흔든 희대의 정치스캔들의 중심에 선 여인이다.


정인숙


정인숙은 1945년 2월 13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행정공무원으로 대구 부시장을 지냈으며 대구일보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아들만 다섯이었던 아버지는 절에 불공을 드리며 딸을 원했고 곧 쌍둥이 딸을 얻었다. 아버지는 ‘금이야 옥이야’ 여겨 딸의 이름을 금지(金枝)와 옥지(玉枝)로 지었다. 옥지는 생후 1년 반 만에 병사하고, 살아남은 금지가 바로 정인숙이다.


집안이 넉넉하여 개인교사를 둘 정도로 유복하게 자랐으나 4.19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실직한 아버지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다. 공부에 관심 없었던 정인숙은 대학 중퇴 후 KBS 라디오 방송 작가인 장사공과 사귀었다. 당시 장사공은 <태양은 늙지 않는다>라는 드라마를 집필한 인기 작가였다. 그녀는 자기 애인이 유명한 작가라며 자랑하고 다녔다.


정인숙은 무역회사를 하던 오빠들 덕분에 영어 회화를 잘했다. 그녀는 뛰어난 외모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려고 했으나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장사공은 인기 작가로 수입이 많았으나 정인숙의 사치와 낭비벽을 감당할 수 없었다. 거기에 여자 문제가 불거져 장사공과 헤어진 정인숙은 당장 먹고살 걱정이 막막했다.


요정


그 무렵 비밀 요정을 경영하고 있던 마담 김 씨를 만난 정인숙은 잠시 영화도 찍고 패션모델을 하기도 했다. 이후 김 마담의 한남동 고급 요정에 나가게 되었다. 정인숙은 타고난 미모와 영어실력으로 얼마 뒤 인기 있는 1급 접대부가 되었다.


그녀는 콧대가 높았다. 인기를 끌자 연회 참석자들의 이름을 미리 묻고 웬만한 상대가 아니면 아예 응하지 않았다. 그즈음 청와대에서 접대부 여성을 차출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2백여 명의 아가씨들이 모였는데, 그중에서 50명을 뽑고, 다시 신원 조회를 통해 25명을 선출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미모순으로 다섯 명을 뽑았는데 5명 중 정인숙이 1등을 차지했다.


1962년 당시 정인숙


그녀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삼청각, 대원각, 옥류장 등 서울의 일류 요정들은 정인숙을 데려가기 위해 앞을 다투었다고 한다.


그녀는 정부의 A급 고관대작들만 상대했으며 평소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다”라며 자신이 정치권 고위 인사와 ‘깊은 관계’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잘 나가던 그녀가 갑자기 권총으로 피살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녀의 오빠 정종욱은 사건 발생일에 코로나 승용차에 동생을 태우고 서울 마포구 서교동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집 근처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나 차를 세웠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며 누구냐고 묻자 국무총리실에서 보내서 왔다고 대답했다. 평소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으므로 정종욱은 자연스럽게 창문을 마저 열었다. 그때 한 남자가 열린 창문을 통해 뒷좌석에 있던 정인숙은 머리와 가슴을 총으로 쏘았다.


괴한들은 정종욱을 협박해 차를 몰도록 했고, 차량은 한강 북쪽 강변 3로를 달리다가 절두산(양화대교 부근) 근처에서 멈춰 섰다.


잠시 후 멈춰 선 차량에서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후 정인숙은 뒷좌석에서 숨진 채로, 운전석의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당해 신음하는 채로 지나가던 운전자에게 발견되었다. 이는 단순 교통사고를 가장한 총격 살인사건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검찰은 정인숙의 넷째 오빠 정종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정인숙이 요정에 나가면서 많은 남자들과 사귀었고, 심지어 아들까지 낳아 기르는 등 사생활이 좋지 않아 운전을 하던 오빠 정종욱이 나무랐으나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반발하자 정종욱이 권총으로 살해했다."


수사 당국은 정인숙의 운전사였던 정종욱이 여동생의 문란한 행실 때문에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살해한 뒤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고 발표하며 사건을 서둘러 종결지었다.


그러나 권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증거는 오직 정종욱의 자백뿐이었다. 검경의 수사가 워낙 빨리 끝났고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자동차는 불과 2시간 만에 깨끗하게 청소되었다.


인숙은 복수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때는 일반인이 한번 해외에 다녀오면 재발급받아야 하는 단수여권을 사용하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고위층 리스트가 발견되었음에도 수사가 그쪽으로는 지지부진했던 점 등으로 보아 정종욱은 희생된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떠돌았다.


정종욱은 동생 살해 혐의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뒤 19년을 복역하다가 지난 1989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는 출소 후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나는 범인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동생을 죽일 수는 없다. 아버지가,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우리의 뒤를 봐준다고 했다면서 회유하기에 거짓 자백을 했을 뿐이다. 강변도로에서 집 앞에 있던 괴한들이 총을 쏘았다. 내가 억울하지 않다면 수감생활까지 다 하고 나와서 "내가 쏘지 않았다"라고 하겠느냐. 마지막으로 재심 청구를 해서 반드시 누명을 벗겠다."


사실 당시 유일하게 나온 증거는 정종욱의 옷소매에서 탄흔이 나왔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결과였다.


2010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과학적 검증에서는 정종욱이 직접 총을 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실험 결과 본인이 총을 직접 쏘지 않았어도 자동차 안에 총탄이 발사됐으면 옷에 탄흔이 묻을 수 있었다. 또 운전석에 앉은 정종욱이 뒤돌아 총을 쏘았다면 정인숙이 총에 맞은 각도와 거리가 맞지 않는다는 검증도 나왔다. 결국 이 사건은 고위층의 압력으로 진범과 배후가 은폐되었다는 의혹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삼청각 장독대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정인숙의 피살 사건이 희대의 정치스캔들로 비화된 핵심 이유는 바로 그녀의 세 살배기 아들이 누구의 아들인가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정인숙의 수첩에 적힌 정권 최고위층 중 누군가를 아이의 아버지로 지목하며 소문이 퍼졌고, 그중 박정희 대통령과 정일권 국무총리가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유족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오빠 정종욱과 외가에서는 정일권이 1967년 정인숙과 교제하여 1968년 정성일을 낳았으며, 정일권이 직접 ‘성일’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줬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종욱은 정일권이 아이를 안고 즐거워하며 집에 자주 찾아왔다고 증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은 정일권이 자신의 형에게 “내 아들을 낳았으나 공개할 수 없다”라고 고백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2000년대 이후 언론 취재 결과, 정일권이 생전에 정성일 측에 금전적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일권 생부설에 무게가 실렸다.


정인숙과 아들 사진


한편 미국에서 살던 정인숙 아들 정성일은 1991년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으나 소송 중 정일권이 사망하는 바람에 소를 취하했다.


정성일은 자신의 저서에서 1991년 정일권이 문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라고 말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후 정성일은 방송에서 정일권이 자신에게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주장하며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생부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당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나훈아의 노래를 개사하여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노래가 널리 퍼졌다. 신민당 조윤형 의원은 대학가에서 가사를 바꾼 이런 노래가 유행한다면서 여당을 향해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곧 금지곡 리스트에 올랐다.


그동안은 정일권이 생부라는 주장이 유력했으나 정일권 본인이 불임수술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를 부인하고, 정성일이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정인숙 피살 사건은 1971년 대선과 총선을 1년여 앞둔 시점에 발생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정인숙의 죽음이 분명히 정부 고위층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연일 여당을 압박했다. 이처럼 정인숙 살해 사건 이후 의혹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관련자를 색출하였으며 곧 정일권 총리를 해임시키며 사건을 종결지었다.


이 일로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의심하여 부부싸움을 하다가 “내 아내한테까지 오해를 받고 재떨이까지 날아왔지만 참았다”라고 말한 내용이 세간에 퍼지기도 했다.


또 이 사건 이후 ‘강변 3로, 오빠 조심, 명함 조심’이라는 유행어가 돌기도 했다. 정인숙은 경기도 파주 광탄면 용미리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일로 인해 권력층의 문란한 성문화와 비밀 거래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커지고, 강남이 발전하며 ‘룸살롱 문화’로 대체되면서 요정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인숙 사건은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장자연 사건이 그렇고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을 뿐 억울한 죽음은 여전히 일어나고 앞으로도 일어날 예정이다. 문제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익명의 남자들은 일언반구 언급도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글을 쓰면서 힘없는 사람은 힘 있는 자에게 죽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해도 변명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무섭고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삼청각(三淸閣)을 지은 이유

삼청각은 북악산 자락 아래, 청와대와 가까운 성북동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때 권력의 은밀한 밀담이 오가던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던 이곳은 현재 고즈넉한 한옥의 아름다움 속에서 전통문화와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도심 속 쉼터로 탈바꿈했다.


취한당 & 일화당 담벼락


삼청각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72년이다. 이곳의 탄생 배경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된 직후, 남북 간의 회담이 계속 이어지면서 남북적십자회담과 같은 중요한 일을 치를 장소가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귀빈을 접대하고 북의 고위급 인사를 맞이할 ‘최고급 비밀 접대 공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에게 건물을 지으라 긴급하게 지시하였다. 장소는 최고 권력층의 접근이 쉽고 보안 유지가 철저하며, 북악산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성북동이 선택되었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국빈 접대 및 정치 회담의 장소라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군 공병대가 투입되어 택지를 다지고 중앙정보부의 일사불란한 감독 아래 공사가 시작되었다.


삼청각 안내도


삼청각은 전국 최고의 기술을 가진 도편수와 최고급 목재가 동원된 목조 한옥 4채를 지었다. 그중 가장 큰 건물인 일화당은 목재 외에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나 한옥의 정교함을 살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공사 기일을 맞추지 못해 실제 협상 장소로는 쓰이지 못했다.


이후 삼청각은 고위 대표들의 만찬 장소로 사용되었고 고관대작들의 비밀회합 장소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요정이 강남 룸살롱으로 대체되자 삼청각은 일반음식점으로 전환했으나 경영난으로 1999년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곳에는 고급빌라가 들어설 예정이라 삼청각은 헐릴뻔한 위기를 맞았다.


결국 서울시가 사들여 문화시설로 지정하면서 철거 위기를 면했다. 서울시는 1972년에 건립된 삼청각을 50년 만에 리모델링하여 전통문화 공연장으로 개관했다. 이렇게 삼청각은 시민들이 쉴 수 있는 쉼터로 바뀌었다.


삼청각은 2만 115㎡ 규모의 부지에 본채인 일화당, 천추당, 청천당, 취한당, 동백헌 등 5개의 별채, 2개의 야외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와와 어우러진 단품


삼청(三淸)’은 ‘산이 맑고(山淸), 물이 맑으며(水淸), 사람의 인심이 맑다(人淸)’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각의 한옥 건물은 요정 시절에는 소규모 연회 장소였지만, 현재는 시민과 관광객을 위한 다채로운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화당 야외식장


그중 일화당(壹華堂)은 삼청각의 메인 공간으로 최신시설을 갖춘 공연장은 물론 전통 한식을 맛볼 수 있는 한식당, 북악산과 한양도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가 있다. 결혼식 연회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는데 최근 이재명 대통령 아들의 결혼식도 이곳에서 치렀다.


일화당 한식당 & 예식장


청천당(聽泉堂)은 소규모 연회가 주로 이루어지는 별채로 전통 혼례 및 연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외부 잔디마당과 연결되어 있다.


운치 있는 담벼락과 단풍


별채인 천추당(千秋堂)은 소규모 연회나 전통문화 교육 및 체험 공간교육 프로그램, 세미나 진행 장소로 쓰인다.


천추당 전각과 아름다운 단풍


역시 별채로 지어진 취한당(翠寒堂)은 소규모 연회와 전통 예술 전시 및 시민의 휴식처다.


취한당


별채 동백헌(東柏軒)은 전통차 및 음료를 판매하는 한옥 카페다. 동백헌으로 가는 산책로에는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곳곳에 시민들이 쉴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을 마련해 자연과 문화, 쉼이 함께하는 여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정표 앞 정자


팔각 모양의 정자 유하정(流霞亭)은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현재는 교육 및 체험 장소, 교육 공간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취한당 & 동백헌 & 유하정


현재 삼청각은 품격 높은 공연과 전시를 상시 개최하고 있으며 서울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관광명소로 국내외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거듭나고 있다.


내가 방문한 날은 일화당에서 예식이 거행되고 있어서 테라스 카페 다원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삼청각은 수위가 지키고 있으나 들어가는데 아무런 제지는 하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결혼식이 열리는 일화당 정원


교통은 조금 불편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삼청각은 내려서 오르막길을 10여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주차장은 워낙 넓어서 주차하기가 쉽다. 또 4호선 한성대역이나 창덕궁 앞에 삼청각을 오가는 셔틀버스가 있는데 이 버스 역시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다. 단 시간에 맞추어 운행되므로 사전에 시간을 알고 가야 한다.


셔틀버스 운행 시간표


내가 방문한 날은 주말이라 결혼식이 있었다. 그러나 삼청각을 둘러보는데 방해되지는 않았다. 곧 예식이 없는 평일날 멋진 삼청각을 보러 다시 한번 방문할 예정이다. 테라스 카페 다원에 앉아 바깥 구경을 하면 경치가 매우 좋다는 평이다. 최근 상견례나 소모임을 이곳에서 많이 하고 있는데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한정식은 정갈하고 맛있다는 소문은 있으나 가격은 1인당 55,000원부터 20만 원까지 다양하다.


근처에는 성북동 빵공장과 길상사가 있어 차 없이 이곳저곳을 걸어 다녀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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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헌 계단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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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길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