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얼 홀 기억 6 전시관 & 안중근 기념관
조선의 안산이었던 남산(南山)은 일제강점기 수난을 거쳐 군부독재의 그림자, 그리고 민주화의 함성까지, 대한민국의 굴곡진 역사를 온몸으로 새긴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였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도 남산의 뒤안길을 걸어보았다.
남산은 도읍 한양의 안산(案山)이자 주산(主山)인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감싸는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일부였다. 풍수지리에서 왕궁이나 고을 관아 뒤에 위치하는 산은 주산(主山), 이를 영접·마중하는 반대 방향의 산은 안산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양의 주산은 경복궁 뒤에 있는 북악산이며 안산은 남산이다.
아뢰기를, “남산은 서울의 안산(案山)으로 평상시 수호하고 금양(禁養)함이 다른 산에 비해 더욱 각별했습니다. 그런데 근래 무뢰배가 서로 작당하여 남산 안팎의 토석(土石)을 제멋대로 떠내 여염집에 몰래 판다고 하니 듣기에도 놀랍습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1년 5월 12일>
남산은 왕궁을 영접하는 길지(吉地)로 여겨졌으며, 함부로 나무나 돌을 채취할 수 없는 금양(禁養) 구역, 즉 지금의 그린벨트였다. 특히 소나무는 지력(地力)을 보존하는 중요한 식물로 금송(禁松)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부터 시작된 소나무의 수난은 일제강점기에 극에 달했다. 일제는 소나무 숲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아카시아와 벚나무 같은 잡목을 심어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다.
조선 태조 때 축성된 한양성곽은 남산을 지나 숭례문으로 이어져 도성 방어의 굳건한 축을 이루었다. 그런데 수려한 경관과 오르기 쉬운 접근성으로 관료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고 도덕을 연마하던 장소였던 남산은 일제에 의해 무참히 훼손되었다.
일제강점기는 남산에 가장 치욕적인 수난의 시기였다. 조선의 정신적 지주였던 남산은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조선왕조의 상징인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졌고, 남산 일대에는 일제의 정신적 지주인 조선신궁과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인 박문사가 장충단에 들어섰다.
무엇보다 남산을 가장 많이 훼손시켰던 것은 조선신궁이었다. 숭례문에서 조선신궁까지 참배로를 내기 위해 한양도성 성곽을 허물어 찻길을 만들었고, 통감부, 통감 관저, 헌병대 사령부 등 통치기관과 일본인 집단거류지가 남산 기슭에 자리 잡았다.
현재 서울교육청 과학전시관으로 향하는 높은 계단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朝鮮神宮)의 계단 일부였다. 이곳을 오르면 일제 말기 ‘천황제’ 주입을 위한 신사참배 강요의 상징적 구심점이었던 조선신궁이 있었다.
일제 총독부는 1912년부터 신사 설립 계획을 세웠고, 기초 조사와 준비를 거쳐 1919년 서울 남산 한양공원에 조선신궁을 짓기로 결정했다.
조선신궁은 일본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한국을 병탄 한 메이지 천황(明治 天皇)을 제신(祭神)으로 모셨다.
3·1 운동 1년 후인 1920년 5월 27일 착공하여, 1925년 10월 15일 준공된 조선신궁은 총 부지 약 127,900평으로, 현재 백범광장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식물원 터까지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건축은 일본의 신사 건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 배전(拜殿), 신고(神庫), 참배소(參拜所) 등 15개의 건물과 380여 개의 돌계단, 참배의 길(參道)이 조성되었다.
1925년 준공 후 조선신궁으로 이름 지었으며, 등급(社格)은 최고 등급인 칙제사(勅祭社)로 예우받았다. 칙제사는 천황의 이름으로 칙사를 파견해 폐백을 바치는 신사로, 조선신궁은 식민지 조선의 총 진수(総鎮守)로서 조선 전체의 일본 신사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이렇게 만든 조선신궁에 일제는 조선인의 참배를 강요했다. 시내에서도 전차가 신궁 밑을 지나갈 때는 모든 승객이 일어나 묵념해야 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신사는 전국적으로 만들어져 1945년 8월 해방 무렵 전국의 신사는 1.141개에 달했다.
건물터는 현재 15개 건물 중 배전(拜殿)의 기초 구조물만 남아 있다. 배전은 일반인들의 참배를 위한 장소였으며 가로 18.9m, 세로 14.9m 크기의 콘크리트 기초 위에 16개의 기둥이 세워진 건물이었다.
조선신궁 근처에는 일제가 중일전쟁(1937년) 이후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방공호가 있다. 내부에는 1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방이 있으며, 현재 내부 관람은 금지되어 있다.
조선신궁은 1945년 일제 패망 직후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 철거되었고, 본전은 소각되었다. 일본인들은 도망을 가면서도 자기들 손으로 신전을 없앴다. 그들은 신물로 둔 거울만 비행기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해방 이후 미 군정기에는 이곳이 대규모 정치집회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1956년 신궁이 있던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건립되었다가 4·19 혁명 때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1968년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면서 그 자리에 남산식물원과 남산동물원이 들어섰으나, 2006년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이 시행되면서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 조선신궁 옛터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들어섰다. 한양도성 유적과 조선신궁, 방공호의 흔적을 두루 보면서 남산이 겪었던 조선왕조의 흔적, 조선 멸망 후 일본의 흔적, 전쟁 준비의 흔적 등 수많은 사건을 읽을 수 있었다.
조선신궁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한양도성 성벽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현재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은 남산 팔각정에서 서쪽 사면으로 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만날 수 있다.
한양도성(사적 10호)은 조선왕조의 수도 성곽으로 1396년 태조 이성계가 전국에서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한양을 둘러싼 4개의 산을 연결하여 쌓았다. 현재 전체 구간의 73.6%, 약 13.7km 구간이 남아있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은 지난 2009년부터 ‘남산 되살리기 프로젝트’에 따라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2013~2014년에 땅속에서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전시된 성벽에는 5세기에 걸친 조선왕조 축성 기술의 변천을 볼 수 있다. 맨 아래 14세기 태조 때의 성돌부터, 15세기 세종 때, 가장 위쪽 18세기 숙종 때, 그리고 19세기 60cm로 커진 성돌까지 다양하다.
발굴 과정에서 일제가 조선신궁을 조성하며 한양도성 일부 구간을 허물고 한쪽에 치워 두었던 돌무더기도 발견되었다. 현재 성벽은 발굴 상태 그대로 볼 수 있으며, 함께 발견된 조선신궁 건물터, 방공호, 분수대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해방 후 일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조선신궁과 박문사, 통감부 등을 철거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국회의사당을 건축하려고 했으나 5.16 군사반란으로 인해 중지됐다.
1968년에는 조선신궁 터에 남산식물원을 만들었다. 또 남산어린이회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이 개관됐다. 남산어린이회관은 이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사용하다가 서초동으로 이전하고 현재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이 쓰고 있다.
조선신궁 터 위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들어선 것은 민족정기 회복의 상징적 의미를 극대화했다. 일제 침략의 상징 위에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을 기리는 공간을 세움으로써 역사의 단절과 극복을 명확히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 1879년~1910년)는 일제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의 영웅이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는 의거를 단행하여 대한의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세계에 알렸다. 최근 들어 일부 학설에는 고종의 밀명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의거 후 그는 일제의 부당한 판결을 받고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순국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며 일본과 한국, 중국이 협력하여 평화를 이룰 것을 역설했다.
기념관은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와 국민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전시관 안에는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가 잘 정리되어 있으며, 하얼빈 의거 현장 모형도, 안중근 의사 좌상, 각종 휘호 등이 전시되어 있다.
1956년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배경은 자유당 정권의 우상화 및 독재화와 맞물려 있다. 이 동상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는 독재 권력의 상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확립하려 했던 시민들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철거된 자리에 이를 대체할 동상을 세우는 것도 다양한 논의를 거쳤다. 처음에는 시조 단군, 4·19 혁명에서 의거한 학생들 등이 후보에 올랐다. 결국 이 자리를 차지한 것은 백범 김구의 동상이었다. 김구 선생 서거 20주년을 기념하여 선생의 93회 생일인 1969년 8월 23일 동상을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이후 김구의 동상을 중심으로 백범광장이 조성되었다. 이는 권력자의 동상 대신,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민족 지도자와 민주 인사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남산의 의미를 재정립하려는 역사적 맥락이 담겨 있다.
백범 김구 동상 왼쪽에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의 동상이 세워졌다.
현재 남산 곳곳에는 김유신 장군, 퇴계 이황, 유관순 열사,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 방정환, 백범 김구, 성재 이시영 등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남산에 유난히 동상이 많은 이유는 일제의 잔재를 애국으로 덮으려는 노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남산의 경관을 훼손했던 또 하나의 상징적인 건축물은 남산 외인아파트였다. 외인아파트는 1960년대 한국 경제 급성장 시기 때 장기 체류 외국인 전문가와 주한미군 등의 주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건설되었다.
1970년 착공하여 1972년 완공된 외인아파트는 1980년대 후반부터 “남산 중턱을 가로막는 고층 건물”이라는 비판이 거세지면서, 남산을 공원화하고 경관을 복원하려는 시민사회의 요구가 커졌다. 이에 서울시는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외인아파트 철거를 결정했다.
1994년 11월 30일, 남산 외인아파트 2개 동이 폭파 공법으로 해체되었다. 폭파가 예고된 시각에는 한강 건너까지 수많은 구경꾼이 몰려 숨죽인 채 지켜보는 가운데, 불과 15초 만에 거대한 고층 건물이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먼지 속에 주저앉았다.
남산의 남쪽 사면을 22년 동안 가로막았던 거부감의 대상이 사라지는 순간, 수만 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외인아파트의 해체는 민족의 아픈 역사를 걷어내고 남산의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는 치유의 의지가 폭발적으로 실현되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지난주 국치길과 인권길을 걸으면서 들러보지 못한 중앙정보부 6국 자리를 다시 찾았다. 날씨가 영하의 날씨로 첫눈이 내리고 춥더니 다음 날에는 비가 내리는 등 일기가 좋지 않았다. 다행히 12월 7일은 한낮의 기온이 12도를 웃도는 따스한 날씨였다. 어딘가를 방문하려면 평일이 좋지만 날이 따스해지기를 기다렸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주말에 집을 나섰다.
춥지는 않았으나 햇볕이 그리 강하지 않고 그늘이 진, 약간 음침한 기운이 도는 날이었다. 명동에서 내려 예장공원을 찾아갔다. 1번 출구에서 예장공원 가는 길로 들어서니 기억의 터를 알리는 벽화가 반겼다. 이 길을 따라가도 기억의 터로 갈 수 있다.
예장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올라가는 계단 옆에 갈대들이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며 나를 반겨주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오른쪽에는 빨간 우체통처럼 보이는 건물이 서 있었다.
먼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오솔길을 걸었다. 이곳에 애국가 2절에 있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의 주인공 소나무가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런 표식은 보이지 않았다.
오솔길은 구불구불 예쁘게 만들어졌는데 끝부분까지 가니 기억의 터로 넘어가는 길이라 빨간 우체통 건물로 가려면 다시 뒤돌아 가야 했다.
마당에는 과거 중앙정보부가 있던 곳을 알리는 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빨간 기억 6 건물 앞에 섰는데 아쉽게도 문을 닫았다. 서울시의 곤돌라 추진 사업에 한국삭도 측의 소송으로 문을 닫은 것이다. 이 사건의 전말은 아래에서 다뤄보겠다.
남산 예장자락은 과거 중앙정보부(중정) 6국 건물이 자리했던 곳으로, 군사독재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이 행사되었으며, 특히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라는 공포와 혹독한 고문이 자행되었던 어둠의 장소였다.
서울시는 5년간의 ‘남산 예장자락 재생사업’을 통해 이 공간을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성찰하는 역사공원 ‘기억 6’으로 조성했다. ‘기억 6’이라는 이름은 ‘중앙정보부 6국’의 ‘6’과 부끄러운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 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은 국내 정치 사찰 및 수사를 담당했던 곳이며, 고문이 혹독하게 자행되어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육국(肉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때는 술을 먹다가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친구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술좌석에서 한 말을 옆에서 듣고 있다가 잡아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찰은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이루어졌다.
특히 이곳은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이 고문을 받고 ‘법적 살인’을 당했던 비극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33년 만인 2007년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억 6’은 역사적 상처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의지를 담아 옛 건물을 해체 후 재구성한 공간이다. 메모리얼 홀(빨간 우체통 모양 전시실)은 거대 권력에 의한 고통의 공간을 소통의 공간으로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빨간색 우체통 모양으로 건립되었다.
1층에는 자료 검색이 가능한 아카이브 시설과 국내외 작가들의 다큐멘터리 등 영상을 상영하는 프로젝터가 설치되어 당시의 기록과 자료를 접할 수 있다.
지하 1층에는 과거 인혁당 사건 등에서 고문이 이뤄졌던 실제 취조실(고문실)이 정밀 해체 후 재구성되어 만들어졌다. 이곳은 1층 전시실의 유리 바닥을 통해 지하의 취조실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로, 고통의 현장을 시각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전시관의 홍보 동영상을 보고 정리한 내용이다.
기억력 전시관에 들어서면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 걸어오다 곧 철문이 닫힙니다.
왼쪽 벽면에서는 한 남성이 등만 보인 채 6국 이야기를 설명하는 모놀로그 연극이 시작됩니다.
동시에 정면 벽면에는 고문 피해자가 증언한 글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전시관 오른쪽 벽면에는 기억력 조성 취지와 6국 건물 관련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지하 공간은 실제 6국 지하 취조실 벽면을 떼어내어 재설치하였습니다.
책상과 조명등은 피해자 증언을 바탕으로 취조실을 재현해서 전시공간을 구성했습니다.
6국 건물을 해체하면서 생긴 잔해로 조성된 전시관 앞 광장에는 6개의 빨간 걸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6국 벽체 일부입니다.
기억 6 건물을 돌아가면 옆면에 시멘트 층계가 누워 있습니다. 이는 6국 지하 취조실로 내려가던 그 층계입니다.
광장에는 6개의 기둥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조형물은 걸상이다. 이곳은 지난 2016년 8월에 해체한 중앙정보부 6국 건물(옛 서울시청 제2청사)의 콘크리트, 벽돌 등 잔해 일부를 활용하여 광장의 바닥과 기둥 등으로 재활용했다.
예장공원은 군사시설로 인해 고립되었던 남산 예장자락 2만 2,833㎡의 옛 경관을 회복하고 시민에게 돌려주기 위한 녹지공원(1만 3,036㎡)이다. 이 공원을 출발지점으로 인권의 길(약 930m), 국치의 길(약 2km)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남산의 아픈 역사를 되짚어보는 과정에서, 현재 진행형인 또 하나의 갈등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서울시의 남산 곤돌라 설치 계획과 기존 케이블카 운영사인 한국삭도공업 사이의 법적 분쟁이다.
이 소송의 핵심은 케이블카 운영의 독점 구조 해소와 공공성 확보를 원하는 서울시와 영업권 침해를 주장하는 기존 사업자 간의 이해관계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남산 케이블카는 정부의 사업이 아니다. 1962년부터 민간(한국삭도공업)이 케이블카를 60년 넘게 사실상 독점 운영하며, 남산 정상 접근의 공공성이 제한되어 왔다. 이 업체가 독점해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설립 시기의 시대적 특성과 미흡했던 법적 제도라는 두 가지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남산 케이블카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객용 케이블카로, 1962년 5월에 영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권을 획득한 시기는 5·16 군사 쿠데타 직후의 혼란한 시기였다. 한국삭도공업은 당시 국내 대기업 중 하나였던 대한제분 사장을 지낸 고(故) 한석진 씨가 설립한 회사다.
1961년 8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불과 석 달 만에 당시 교통부(현재 국토교통부)로부터 삭도(케이블카) 면허를 받았다. 당시 서울시의회 행정사무조사 특위 등에서는 “1960년대 초 군사정권에 의해 어마어마한 특혜로 사업권을 땄다”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특히 이 사업권은 설립자 일가에 의해 3대에 걸쳐 세습되어 오며, 남산이라는 공공 자산을 이용한 수익이 철저히 사유화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특정 기업의 장기 독점을 가능하게 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제도적 허점에 있었다. 케이블카 운영을 규정하는 과거 궤도운송법에는 민간사업자가 영업 허가(궤도업 면허)를 받을 때 사업의 종료 기간을 명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국삭도공업은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영구적으로 영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한국삭도공업은 연간 수백억 원의 매출과 수십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면서도, 국유지 사용료로 정부에 납부하는 금액은 영업이익의 1%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재 서울시가 남산 곤돌라 사업을 재추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60년 넘은 독점 구조를 깨고 남산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이에 지난 2018년과 2021년, 국회에서는 민간사업자의 사업 연한을 30년 이내로 제한하는 내용의 궤도운송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으나, 이해관계자의 반발 등으로 인해 아직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는 법 개정이 지연되자 곤돌라 설치라는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으며, 곤돌라 운영 수익을 남산 생태 복원 등에 활용하여 공공성을 높이겠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결국 남산 케이블카의 독점은 군사정권 시기의 특혜성 사업권 부여와 사업 기간을 제한하지 않은 과거 법률의 미비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특수성이 낳은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소송의 경과(2025년 12월 현재)는 다음과 같다.
법적 다툼으로 인해 현재 곤돌라 사업은 중단된 상태다. 한국삭도공업은 서울시의 도시계획시설 변경 결정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는 내용의 행정소송 및 공사 집행정지 신청을 법원에 제기했다.
법원은 한국삭도공업 측의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공사에 제동을 걸었다. 이는 법원이 “신청인(케이블카 운영사)들에게 손해를 예방하기 위해 효력을 정지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된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법원의 결정으로 인해 서울시는 2024년 9월 착공한 곤돌라 사업을 공정률 약 15% 상태에서 중단했다.
현재 1심 판결 선고일이 2025년 12월 19일로 예정되어 있어, 서울시와 케이블카 운영사 모두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시는 판결에서 승소할 경우 즉시 곤돌라 공사를 재개하여 2027년 상반기 개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만약 패소하더라도, 공원녹지법 시행령 개정 등 입법적 대응을 통해 곤돌라 사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소송의 결과와 앞으로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백범광장을 시작으로 한 달 여 동안 남산을 4번 찾았다. 남산의 뒤안길을 둘러보면서 마치 파노라마처럼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남산은 조선의 안위와 풍류를 담았던 숲이 일제의 신사와 독재 권력의 철장으로 변했다가, 국민의 손으로 그 억압의 상징을 걷어내고 독립과 민주화의 정신을 기리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조선신궁 돌계단 옆에 선 안중근 의사 기념관, 독재자의 동상이 무너진 자리에 선 백범 김구 선생 동상, 그리고 고문이 자행되던 중정 6국의 터에 새겨진 ‘기억 6’의 빨간 우체통까지. 남산은 우리에게 국력을 기르고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준엄한 역사적 교훈을 조용히 되새겨주고 있다.
숭고한 정신과 치열한 투쟁으로 지켜낸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역사를 덮어두면 오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맙니다. 마음이 아프더라도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겨서 그것이 확실하게 기억되도록 합시다. 그러면 거기서 화해라는 것이 나옵니다. 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뼈아픔을 절대로 피해서는 안 됩니다. – 리하트르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 1985년 국회 연설에서 –
남산을 다시 찾은 김에 남산돈까스 식당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다. 남산의 명물인 왕돈가스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2021년 한 유튜버의 폭로로 수면 위로 떠오르며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고, 결국 법정 공방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원조(元祖)’를 둘러싼 상표권 및 임대차 관계의 복잡한 이면을 드러내고 있다.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진짜 원조’ 박씨 가족이 건물주(현 101번지 남산돈까스 대표의 시어머니 일가)의 부당한 행위로 인해 영업을 중단하고 쫓겨났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박씨는 1992년부터 남산 인근(소파로 103-1번지)에서 최초로 돈가스 식당을 운영했다. 그런데 2011년경 건물주 일가가 업무방해와 폭행, 재물손괴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며 당시 임대차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은 자신들을 권리금과 보증금도 돌려주지 않은 채 불법과 무력으로 내쫓았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쫓겨난 후, 건물주가 점유한 가게(현 101번지)는 박씨가 돈가스 가게를 시작한 연도인 ‘Since 1992’ 문구를 그대로 사용하여 원조 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101번지 남산돈까스 측은 적법한 운영을 주장했다. 진짜 원조 박씨가 운영을 위탁받았던 적은 있으나, 계약 종료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일 뿐 부당한 퇴출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또한 유튜버와 박씨를 상대로 허위 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등을 주장하며 법적 대응을 시작했다.
결국 ‘Since 1992’ 표기 논란이 커지자 ‘Since 1992’ 사용이 운영대행자와의 계약 해지 후 창업주 가족들이 연도 표기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라며 사과하고 해당 표기를 수정하였다.
법정 공방에서 법원은 ‘진짜 원조’ 측의 손을 들어주며, 유튜버와 박씨의 주장이 허위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소송은 '101번지 남산돈까스' 측이 유튜버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및 영상금지 가처분 신청 등에서 1심, 2심, 대법원 모두 패소하며 기각되었다. 법원은 유튜버의 영상 내용(갑질 의혹 등)을 허위 사실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건물주 일가(현 101번지 측)가 과거 업무방해, 폭행, 재물손괴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질러 ’진짜 원조‘ 임차인을 내쫓았다는 내용도 확인되었다.
결론적으로 2년 반에 걸친 이 법적공방은 101번지 측이 제기한 소송들이 줄줄이 패소하면서 '진짜 원조' 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돈가스 가게가 죽 늘어선 길을 따라 남산 길을 천천히 걸었다. 진짜 원조 남산돈까스는 케이블카 타는 곳 앞에서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큰길을 따라가면 나온다. 단풍이 다 시들어서인지 날이 음침해서인지 남산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101번지 돈까스 집 앞에는 오늘 두어 명 정도가 줄을 서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10여분 걸어가자 남산돈까스 집이 나왔다. 이곳도 역시 줄을 선 사람은 없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좌석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기다리지 않고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두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식당 내부는 비좁고 그리 깔끔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빈자리는 거의 없었다. 식사는 시키자마자 1분도 지나지 않아 바로 나왔다. 옛날에 먹었을 때는 돈가스가 엄청 컸는데 그리 커 보이지 않고 썰어보니 두께도 얇았다. 맛도 그냥저냥 내 입맛에는 보통이었다. 그리고 약간 짠 것 같은데 일행은 짜지 않다고 했다.
유명 돈가스에 비하면 맛과 퀄리티는 떨어지지만 가격 대비 괜찮으니 사람들이 찾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맛이 아니라 추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이하게 커다란 락앤락 통에 고추와 잘게 썰은 깍두기를 가득 담아 식탁 위에 하나씩 놓아두었다. 손님이 마음껏 꺼내 먹을 수 있는데 돈가스와 고추와의 조합이 좋은지 의외로 여러 사람들이 고추를 곁들여 먹었다.
식사 후 남대문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 건너 백범광장을 올라가는 입구가 보였다.
이번에 남산을 4번이나 왔는데 장충단 공원을 가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장충단 공원과 박문사 등 쓸 이야기가 한 보따리지만 남산 이야기는 이만 맺기로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서울시 서울역사 아카이브
서울시 포털
서울역사박물관
국가기록원-나라기록포털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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