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길을 걷다
조선시대 남산 인근에는 주로 가난한 선비와 중인, 하급 관리들이 거주했고 남촌이라 불렀다. 한강을 기점으로 강남과 강북이 갈렸듯 청계천을 기점으로 남촌과 북촌이 나누어졌는데 궁궐이 가까웠던 북촌에는 권세가와 고위 관료들이 많이 살았다.
조선시대 말기는 풍양조씨나 안동김씨가 판을 치던 시기였다. 학문이 높아도 돈이 없으면 과거급제는 물론 출셋길이 막혔다. 그래서 수십 년 책만 읽고 관직을 얻지 못한 선비들은 남촌에 모여 살면서 신세 한탄하며 술을 마셨다.
‘남촌은 술, 북촌은 떡’이라는 뜻의 ‘남주북병(南酒北餠)’이 생겨난 것도 그 이유다. 남촌 사람들은 세상 시름을 잊으려 술을 마셨기에 술과 친했고 북촌 사람들은 늘 경사스러운 일이 많아 떡을 자주 해 먹었다. 지금 유명한 ‘종로떡집’이나 ‘낙원떡집’이 북촌 근처에 몰려 있는 것도 설명이 된다.
실제로 남촌에는 <허생전>의 허생처럼 몰락한 가난한 양반, 하급 관리들이 살았고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도 남촌에 살았다. ‘남산골샌님’이나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려 ‘남산골 딸깍발이’라며 선비를 비하해 불렀던 말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유행했다. 그러나 실제로 남촌은 풍수지리적으로 볕이 잘 들고 배수가 잘되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남산은 풍수지리상 서울 도성의 안산(案山)이자 주작(朱雀)에 해당하며, 도성의 주요 능선을 따라 성곽이 축성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남산에는 다양한 역사 유적과 기념물이 산재해 있다. 오늘은 남산의 뒷길에 숨은 역사 현장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주중에 날이 추워진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날이 비교적 따뜻했던 11월 30일 남산 탐방길에 나섰다. 교회를 다녀오느라 1시쯤 늦은 출발을 했다. 4호선을 타고 충무로에서 내려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남산골 한옥마을이다.
남산 북쪽 기슭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筆洞)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서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유명했다. 이곳은 청학이 노닐었다고 하여 청학동으로도 불렸다. 청학동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불릴 만큼 경관이 아름다워 한양에서 가장 경치 좋은 삼청동(三淸洞), 인왕동(仁王洞), 쌍계동(雙溪洞), 백운동(白雲洞)과 더불어 한양 5동(漢陽五洞)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1989년 ‘남산 제모습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서울시가 옛 수도방위사령부의 터를 인수하여 조성하였고, 1998년 4월 18일 공식 개장했다.
원래 남산골 한옥마을이 있던 자리는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가 있었다. 수방사의 주요 임무는 수도 서울을 방위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대통령 경호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수방사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정변 세력의 보호를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에 참여한 부대를 모아 수도경비사령부를 만들어 이곳에 진지를 삼았다.
이후 1979년 12.12 군사 반란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육군 본부 지휘관들의 지휘부 역할도 이곳에서 맡았다.
12.12 군사 반란 때는 전투 병력 대부분을 지휘하던 장세동(30 경비단장), 김진영(33 경비단장), 조홍(헌병단장) 등이 직속상관인 장태완 사령관을 배신하고 반란의 주축을 이루기도 했다. 장태완이 쫓겨난 이후 사령관직은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가 맡았다. 수방사는 1991년 3월까지 이곳에 주둔하다가 남태령으로 이전했다.
수도방위사령부가 들어서기 전인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이곳에 일본군 헌병대를 주둔시켰고 해방 후에는 한국군 헌병대가 사용했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이처럼 숱한 사연을 안고 1989년부터 시작된 ‘남산 제모습 찾기 운동’에 의해 겨우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수방사가 이전한 뒤 1998년까지 공사를 마치고 드디어 ‘남산골 한옥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충무로역 4번 출구로 나와 천천히 5분 정도 걸으면 남산골 한옥마을에 갈 수 있다. 입구 사진을 찍고 들어가기 전 오른쪽을 보니 단풍이 아직도 화려했다.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어 건물 안으로 무조건 들어갔다. 그동안 남산골 한옥마을에 여러 번 왔었는데 늘 그냥 지나치던 곳이었다.
이름은 목멱산 충정사, 한옥마을과 붙어 있기는 하나 엄연히 소속이 다른 절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차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자료는 집으로 돌아와 찾아보았다.
목멱산 충정사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0년 12월 수도방위사령관을 지낼 때 건립된 사찰로, 1990년부터 육군, 해군, 공군 예비역장성 불자들로 구성된 성불회가 운영했다. 원래는 남산 1호 터널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1991년 수도방위사령부가 이전하고, 서울시가 군부대 부지를 사들였는데 충정사는 이전하지 않고 예비역 장성들의 신행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1993년 남산 1호 터널이 확장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고 한다.
지금은 조계사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서울시와 임대 계약에 문제가 생겨 어쩌면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있었다.
충정사를 둘러본 후 한옥마을로 들어섰다. 정문을 기점으로 왼쪽에는 민속문화유산인 한옥 다섯 채를 이전, 복원하고 해당 가옥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분 성격에 걸맞은 가구 등을 배치해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섯 채의 한옥은 서울시 민속문화유산 제20호인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李承業, 경복궁 중건) 가옥, 서울시 민속문화유산 제8호인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金春營) 가옥, 서울시 민속문화유산 제18호 관훈동 민영휘 가옥, 서울시 민속문화유산 제24호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尹澤榮) 재실, 옥인동 윤씨(尹氏) 가옥이다. 이 가옥들은 내부까지 모두 둘러볼 수 있다.
평소 이곳은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학습을 온 가족들이 넘쳐난다. 한옥 다섯 채를 둘러본 후 한복 입기, 규방공예, 전래 공연, 매사냥 등의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또 원두막에서는 짚공예 시연이 이루어지고 천우각 무대에서는 태권도 시범 공연을 볼 수 있다.
먼저 국악당 안에 있는 카페 달강에 들러 전통차를 한잔 마셨다. 이곳은 여름에 오면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데 자리를 잘 잡으면 남산타워를 보면서 차를 마실 수 있다. 지금은 겨울이라 창문은 모두 닫혀 있고 그날은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았다. 국악당 역시 마당에서 공연이 자주 열린다.
차를 마신 뒤 타임캡슐 광장으로 향했다. 1994년 11월 29일,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이해 만든 타임캡슐을 보기 위해서였다. 보신각종을 본뜬 모양의 타임캡슐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1994년의 시민 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담아 원형 판석 지하 15미터 지점에 묻었다.
타임캡슐은 400년 후인 2394년 11월 29일(서울 정도 1000년) 후손들에게 공개된다. 과연 400년 후 후손들은 우리가 쓰던 물건들을 보고 무엇을 느낄지 매우 궁금하다. 설마 그전에 인류가 멸망(?)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다가 도리질했다.
타임캡슐 안에는 의식주를 비롯한 600개의 물건과 문화가 담겨있다. 몇 개의 물건만 나열해 본다.
한복, 유아복, 기저귀, 스카프, 식기 세트, 찻잔 세트, 한식, 중식, 양식, 일식, 분식 현미효소, 알로에, 담배, 은단, 돌 반지, 결혼 청첩장, 수의, 부고장 및 언론, 의료, 의학, 경제, 치안, 복지, 교육, 각종 씨앗, 도시, 교통, 문화재, 전자, 전기, 통신, 토목, 건축, 도시 정비, 외교, 문학, 연극, 영화, 체육, 종교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반에 관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한옥 다섯 채 외에도 전통공예관, 천우각, 전통 정원, 서울남산국악당, 새천년 타임캡슐 광장 등이 있다. 주말에는 여러 공연이 있어 차분하게 둘러보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골짜기를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고 전통 조경을 되살렸다. 한옥마을 안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서울타워가 눈에 들어온다. 특히 정원은 그동안 훼손되었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남산의 전통 나무를 심었으며, 계곡과 정자, 연못 등을 만들었다. 여름에는 계곡에 물이 졸졸 흘렀는데 지금은 바짝 말라 있었다.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은 연간 150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정문을 닫지 않고 24시간 개방되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
강화도조약 이후 서울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남산 아래 필동 일대에 모여 살면서 점점 영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남산 자락에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여러 시설이 들어섰다.
나라의 치욕을 뜻하는 ‘국치(國恥)길’은 서울시가 남산 일대에 조성한 약 1.7km의 역사 탐방로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탄(경술국치(庚戌國恥)) 등 아픈 역사를 담은 이 구간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의미를 담아 지난 2018년에 만들었다.
국치길은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된 한국통감관저 터가 있었던 남산예장공원에서 시작해 ㄱ자 모양의 바닥 로고를 따라 연결된다. 한국통감부 터(왜성대 조선총독부 터)와 노기신사 터(리라초교 내 남산원), 경성신사 터(숭의여대), 한양공원(한양공원 표석) 터, 조선신궁(한양도성 발굴지) 터로 이어진다. 바닥의 ‘ㄱ’ 자 로고는 ‘기억’의 의미를 담고 있다.
타임캡슐을 둘러본 후 한옥마을 후문으로 나왔다. 남산 1호 터널이 보이고 삼일대로 위에 아담한 육교가 있었다. 남산의 그늘을 만나는 인권길과 국치길을 가려면 육교를 건너야 한다.
육교를 건너니 중앙정보부 시절 체육관으로 사용되었던 남산 XR 스튜디오가 보였다. 원래 뮤지컬, 오페라 등의 대형 공연 연습실로 활용되던 남산창작센터를 재구조화하여 첨단시설을 갖춘 스튜디오로 재탄생한 것이 현재의 남산 XR 스튜디오다.
스튜디오 옆은 한적한 2차선 도로다. 나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 휴대전화에 기억의 터를 입력시킨 후 안내를 받아 걸었다.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에 단풍은 거의 다 떨어졌는데 아직 키 작은 아기단풍이 “나를 좀 봐주세요”라고 손을 내밀었다. 앙증맞은 작은 단풍이 기특하고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보다 걸음을 재촉했다.
옛 중앙정보부 본관은 현재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남산의 많은 곳이 민간인에게 개방되지 않았는데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그나마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
1995년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서초구로 이전하고, 일부 건물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수리해서 사용하고 있다.
중앙정보부 지하 조사실이 있던 6 별관은 서울시 남산 별관, 학원 사찰을 담당했던 5 별관은 도시안전본부, 정보부장 관사는 ‘문학의 집-서울’로 만들어졌다. 또 중앙정보부 사무동 겸 유치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현재 소방재난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2017년 서울시는 ‘지하실’이 있던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을 해체하면서 부끄러운 역사를 외면하지 말고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기억 6’으로 남겨두었다. 이곳에서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 교수,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감시, 사찰, 취조를 당했다.
유스호스텔을 지나 코너를 돌자 ‘세계인권선언문’이 벽에 붙어 있었다. 이 길은 남산 민주 인권길로도 불린다. 왜 이 길이 ‘인권길’인지 그 의미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듯했다. 조금 더 걸으니 기억의 터가 나타났다.
기억의 터는 옛 일제 통감관저가 있던 장소로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이곳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최근 들어 표석을 세웠다. 일제는 ‘왜성대(倭城臺)’라 불린 이곳 통감관저에서 이완용을 상대로 경술늑약을 체결했다.
지난 2016년 8월, 이곳에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기억의 터’가 만들어졌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계속 불거져왔으나 서울 시내에 아픔을 기릴만한 공간이 없었다.
기억의 터는 경술국치의 현장에 세워져 그 의미가 깊다. 이 터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학생, 시민단체 등 1만 9,755명이 ‘기억의 터 디딤돌 쌓기’ 모금 운동을 통해 기금을 마련했다.
마치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보라색 막대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을 시기별로 새겼다.
중앙에는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상을 거꾸로 박아 놓은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다. 하야시 곤스케는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겁박하여 을사늑약을 강요한 장본인이다. 일제는 그 공으로 그에게 남작 작위를 내리고 이곳에 동상을 세웠다. 그런데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곤스케의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웠다. 동상 이름은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다.
통감관저는 1960년대 초까지 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남산에 자리를 잡으면서 철거했다.
보라색 막대와 갈대, 그리고 아직 시들지 않은 단풍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길옆에는 400년 된 은행나무 보호수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다 안다는 듯 웅장하게 서서 지켜보고 있다. 왠지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산 드라마센터를 지나 조선총독부 터를 지났다. 조선총독부 터는 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를 짓느라 공사 중이다. 조금 더 걸으니 리라초등학교와 숭의여자대학교 사잇길에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이 나왔다. 이곳은 옛 ‘노기신사[乃木神社]’ 터다. 노기신사는 일본군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를 수호신으로 받들던 신사다. 이곳은 사유지라 미리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이어 바로 옆에 있는 숭의여자대학교 본관은 1925년 일제의 조선신궁 건립 이전까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최고의 신사 시설이던 ‘경성신사(京城神社)’ 터다.
어지간히 걸어 다리가 아플 만도 한데 아직 남은 단풍이 피로를 잊게 해 주었다. 11월 30일 현재 남산의 단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학교를 지나 한양공원비까지 가는 길에는 돈가스 식당이 늘어서 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가게가 있었다. 한때는 남산의 명물 '남산돈까스'를 둘러싸고 '원조' 공방이 치열했다. 기존에 원조라고 알려진 '101번지 남산돈까스'가 원조가 아니고 진짜 원조는 소파로 23번지에 있는 '남산돈까스'라고 두 가게가 법정 공방까지 벌였다.
지나면서 보니 다른 돈가스 가게는 한산한데 비해 '101번지 남산돈까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맛있는 집은 고객들이 가장 잘 아는 법, 무조건 줄을 길게 선 곳에서 먹으면 실패할 확률이 낮다. 진짜 원조 '남산돈까스'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백범광장 근처에 있다.
한양공원(漢陽公園)은 1897년 일제가 처음 남산에 만든 왜성대공원을 서울 거주 일본인들을 위하여 확장하여 만들었다. 현재 이곳에 있는 한양공원비는 1910년 5월 29일 개원한 한양공원의 입구를 알렸던 비석으로 2002년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인근 풀숲에서 발견되었다.
한양공원은 당시 남산 기슭 30만 평을 무상으로 임대해 만들었다. 비석 뒷면은 훼손되었고 앞면의 ‘한양공원’ 글자는 고종의 친필로 알려졌다. 고종은 칙사를 보내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한양공원 터에서 마지막으로 조선신궁 터를 가기 위해 남산 계단을 올랐다.
한양공원비에서 계단을 올라 조선신궁터를 다녀왔는데 쓸 내용이 많아 다음 화로 넘긴다. 이날 일정은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시작해 국치길을 걸었고 마지막으로 조선신궁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둘러본 후 백범광장으로 내려와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에서 칼국수를 먹었다. 1시에 출발했는데 집에 오니 6시였다. 걸음 수는 14,752보, 생각보다 많이 걸었다.
"삼촌 여기 자리 있어요."
"여기로 오세요, 이 손님 다 먹었어요. 금방 자리 납니다."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은 가끔 가는데 식사시간에 가면 붐비는 사람들과 아주머니들의 호객 소리 때문에 칼국수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바로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서 있기라도 하면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기분이 들어서 복잡할 때는 이용하지 않는다.
내가 방문한 시간은 4시 40분경, 점심 장사는 끝났고 저녁은 약간 이른 시간이라 자리가 많이 비어있었다. 이곳은 냉면을 시키면 칼국수를, 칼국수를 시키면 냉면을 덤으로 준다. 식사 시간을 피해 가면 들러볼 만하다. 마치 중국집에서 자장면과 짬뽕을 다 먹는 기분이다.
칼국수 골목은 4호선 회현역 5번 출구로 나와 시장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왼쪽에 있다. 골목이 워낙 좁아 '칼국수 골목'이라는 간판을 잘 살펴봐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서울시 서울역사 아카이브
서울시 포털
서울역사박물관
국가기록원-나라기록포털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