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기념관 & 정약용 선생 묘
12월의 끝자락, 매서웠던 한파가 잠시 숨을 고르는 일요일 오후, 영하 10도를 밑돌던 추위가 물러가고 모처럼 영상의 온화한 햇살이 내리쬐는 날,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다산 정약용 생가를 방문했다.
월요일 휴관을 피해 휴일에 나섰기에 정체를 걱정했으나 다행히 길은 그리 막히지 않았다. 남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가 정겨웠다. 정약용 생가는 양평으로 넘어가는 새로 난 길이 아닌 옛길로 들어서면 된다. 예전에 이 길을 운전해서 다닐 때는 춘천까지 구불구불한 도로가 이어졌는데 지금은 새길이 생겨 훨씬 편해졌다. 그러나 감성 한 스푼이 빠진 것 같아 조금 아쉽긴 하다.
내비게이션에 정약용 생가 주차장을 입력한 후 안내하는 대로 상당히 넓은 공용 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차된 차가 한 대도 없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일단 주차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생가가 보이지 않았다. 내려서 이정표를 보니 왼쪽으로 다산생태공원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정약용 생가가 어딘가요?"
산책을 나온 듯한 모습의 두 부부는 주차장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유적지입니다. 여기는 돈 내야 하고 유적지 앞은 무료예요."
친절한 설명에 다시 차를 몰고 나오니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주차 요금 600원이 찍혔다. 그나마 시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요금이 싼 편이었다. 길 건너로 직진했다. 그곳에 꽤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이미 주차된 차가 많았다.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가자 주차장 바로 옆에 건물들이 보이고 유적지를 알리는 입간판도 서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다산문화관으로 들어갔다. 먼저 안내 팸플릿을 챙겨 갈 곳을 체크했다. 이곳은 오래전에 와본 적이 있는데 그새 훨씬 넓어지고 많이 바뀌어서 꼭 처음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화관 앞마당에 커다란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이었다.
다산문화관은 정약용 선생의 삶과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해 놓은 곳이다. 이곳은 ‘여유당 상상마루’라는 공간이 있는데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수원화성과 거중기가 그려져 있는 여유당 엽서에 색칠을 할 수도 있다. 어린이들이 앉아서 진지하게 색칠을 하고 엽서를 예쁘게 꾸몄다. 다양한 체험이 가능해서 아이들이 좋아할 공간이었다. 입구 ‘여유당 상점’ 자판기에서는 마음에 드는 정약용 굿즈를 살 수 있다.
다산문화관을 나오면 바로 옆에 다산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정약용 선생의 업적과 발자취를 전시한 곳으로 그가 발명한 거중기와 농로, 친필 서찰, 산수도,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총 59종 308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을 나오면 너른 마당에 정약용 동상이 서 있고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문도사와 묘지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문도사는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갈 수 없었다. 이곳은 1980년대 묘역정화사업으로 고택과 함께 복원되었다. ‘문도(文度)’는 순종이 1910년, 정약용 선생을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며 내린 시호(諡號)다.
문도는 ‘학문의 길’ 또는 ‘학자의 도리’를 뜻하는 한자어로, 정약용이 학문과 인격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내린 시호다. 박지원,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받았다.
문도사는 평상시에는 개방하지 않고 매년 이곳에서 존경의 의미로 정약용 선생에게 차를 올리는 헌다례를 봉행하면서 ‘다산 정약용 문화제’의 시작을 알린다.
언덕에 자리한 선생의 묘소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묘소는 정약용 선생과 부인 홍혜완의 합장묘로 만들어졌다.
선생은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일 아침에 일흔다섯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회혼식 손님이 장례식 손님이 된 셈이다. 따로 지관을 부르지 말고 뒷산에 묻어달라는 선생의 유언에 따라 집 뒤 언덕에 묘를 썼다.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인 풍경 아래로 생가인 여유당과 실학박물관이 보이고 멀리 팔당호가 아련하게 눈에 들어왔다. 겨울 정취가 묻어나는 고즈넉한 묘역에서 내려다보이는 생가와 나무들, 팔당호가 어우러져 멋진 경치를 만들어냈다.
묘지에서 내려와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으로 들어갔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18년간의 유배 생활 후에 다시 생가로 돌아와 말년을 보냈다.
여유당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대홍수로 인해 모두 떠내려가는 바람에 1980년대에 이르러 옛 사진을 토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사랑채에는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 15장에 도를 터득한 선비에 대해 “신중하도다.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與兮若冬涉川), 조심스럽도다. 사방에서 엿봄을 두려워하는 듯하다(猶兮若畏四隣)”라는 구절에서 두 글자를 따왔다. 즉 겨울날 살얼음 위를 건너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처신하겠다는 경계의 뜻이 담겨있다.
이 편액은 정약용의 나이 39세 때 정조가 사망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내걸었다. 그동안 노론과 남인 공서파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정조가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지만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 위험에 노출된 자신을 염려하고 경계하는 심경을 느낄 수 있다.
소박한 안채 마루에 잠시 걸터앉았다. 방과 마루에서 책을 읽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당을 분주히 오가는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마당 한쪽에 있는 마구간과 창고, 그리고 뒷마당의 굴뚝과 장독대 모두 햇빛을 가득 받고 있었다.
이곳은 유적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벗 삼아 독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정약용 선생은 “독서야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이라고 말하며 두 아들에게 늘 책을 가까이하라고 가르쳤다. 이 도서관은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작은 도서관 역시 문을 열지 않았다. 안이 보이지 않아 유리창에 눈을 바짝 대고 보니 6명 정도 앉을 책상과 의자, 책장에 꽂힌 책들이 보였다.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때 잠시 들러 마음에 드는 책을 꺼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작은 도서관에서 나오면 바로 건너편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여유당 권역과 박물관 사이 거리에 볼거리가 많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중기다. 수원화성을 지을 때 1등 공신 역할을 했던 거중기는 정약용 선생이 만들어낸 조선의 과학 작품이다. 이 거중기로 10년을 계획했던 수원화성 건설 기간이 2년 9개월로 단축되었다고 한다.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영조 38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마을(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 저술가이며 시인이었다.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號)는 꽤 많은데 삼미자(三眉子), 다산(茶山), 사암(俟菴), 탁옹(籜翁), 태수(苔叟),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문암일인(門巖逸人) 등을 썼다.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다.
‘삼미자(三眉子)’는 정약용이 가장 먼저 만들어 쓴 호(號)다. 그의 아버지는 10세 이전에 지은 정약용의 시를 모아 첫 시집을 묶어 주었는데 시집 이름이 바로 삼미자집(三眉子集)이었다. 삼미자집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정약용은 호를 많이 썼는데 그중 가장 널리 쓰이는 호는 다산(茶山)과 사암(俟菴)이다. 다산은 유배지 강진의 만덕사 서쪽에 있는 산으로, 차나무가 많다 하여 다산이라 불렀다. 정약용은 유배 8년 후인 1808년 봄, 거처를 윤단(尹慱) 산정으로 옮긴 후 호를 다산으로 짓고 머무는 집을 다산초당이라 불렀다.
정약용은 평소 당송 8대가 중 한 명인 동파(東坡) 소식(蘇軾 1037~1101)을 가장 좋아했고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도 존경했다.
정약용이 쓴 시에는 소동파의 시에 화답하는 시도 20수에 달한다. 소식의 호 동파(東坡)는 그가 유배 가서 머물던 황주 땅 동쪽 언덕(東坡)을 말한다. 다산이라는 호도 동파와 비슷한 느낌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초당 옆에 동암과 서암 두 암자를 만들고 <다산문답>을 남겼으며 <다산8경사> <다산화사> 등 다산의 풍경과 산속에서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러나 다산은 자신의 자서전이자 회고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는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으로,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으로 적었다.
‘기다릴 사(俟)’자는 중용 제29장의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온 것으로,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자신의 책은 백 년 후 누가 보더라도 한 점 의혹이 없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정약용은 당시 자신의 책이 아무리 좋아도 누구 하나 읽어줄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기도 했다. 실제로 해배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사간원 정언(正言) 한익상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저술한 책들을 가지고 왔건만, 3년이 지나도 누구 하나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
정약용은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끝내 정계에 등용되지 못했다. 그는 용문산, 청평산을 유람하거나 열수(한강) 남북을 오르내리며 세월을 보냈다. 이때 정약용은 ‘철마산초(鐵馬山樵)’ ‘열수노옹’ ‘열초’ ‘자하도인(紫霞道人)’ ‘탁옹(籜翁)’ ‘태수(苔鬚)’ ‘문암일인(門巖逸人)’ 등 여러 개의 호를 사용했다. 열수를 비롯한 철마산과 문암은 고향 마을 인근에 있는 산이나 동네 이름이다.
아버지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서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 윤씨에게서 약전, 약종, 약용 3형제를 낳았다.
정약용의 친어머니 윤씨는 고산 윤선도의 5대 손녀인 해남 윤씨 윤소온으로 조부가 윤두서, 부친이 윤덕렬이다. 정약용의 친어머니 윤씨가 9살 때 사망하자 아버지는 셋째 부인 김씨와 결혼했다.
정약용은 4남 2녀 중 네 번째 아들이다. 공교롭게도 정약용이 태어난 해에는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있었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노론과 남인으로 갈라져 있었고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사도세자를 지지했던 남인은 사도세자가 죽자 세력이 더욱 축소되었다.
남인이었던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고 그해 6월에 태어난 정약용의 아호를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이 아호는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약용의 가문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록에 오른 명문가였다. 그러나 아버지 정재원은 출세에 욕심이 없어서 생원시에 합격한 후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뒤늦게 벼슬에 나가 호조좌랑, 울산부사, 진주목사(정 3품)를 지낸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 영특했던 정약용은 4살 때 천자문을 뗐고 7살 때 한시를 지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정약용은 그 나이에 착시 현상을 이해하고 원근법을 꿰뚫고 있었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다며 감탄했다.
아버지는 정약용이 열 살이 되자 그동안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첫 문집을 내주었다.
삼미(三眉)는 정약용이 어렸을 때 천연두에 걸렸다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로 눈썹이 세 개가 되었다 하여 지어진 별명이다. 당시 죽을 뻔한 그를 왕족 출신의 사가 명의였던 이헌길이 고쳐주었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더 발전된 홍역 치료서인 <마과회통>을 집필하였고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다.
열 살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한 정약용은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고문(古文)을 열심히 읽어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았다. 당시 경서와 사서를 모방해서 작문한 글이 정약용의 키만큼 쌓였다고 한다.
정약용은 15살이 되던 1776년에 풍산홍씨 홍혜완과 결혼했다. 다산의 유배 시절 홍씨는 그리움을 담아 혼례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남편에게 보냈고 다산은 아내의 치마를 잘라 가족에게 전하는 애틋한 편지를 썼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피첩(霞帔帖)이다. 아내의 빛바랜 치마에 가족을 향한 다산의 사랑이 가득 담겨있다.
하피첩은 붉은 치마를 뜻하는 ‘홍군(紅裙)’ 대신 노을 하(霞), 치마 피(帔)를 사용해 ‘노을빛 붉은 치마’라는 이름을 지었다. 원래 총 네 개의 서첩이 쓰였는데 현재 발견된 것은 세 개뿐이다. 붉은 치마 앞에 '노을빛'을 붙였을 뿐인데 꽤 감성적인 느낌이 든다.
첫 번째 서첩에는 ‘가족공동체와 결속하며 소양을 기르라’라고 적고 있다. 또 효제(孝悌)가 인을 실행하는 근본임을 강조하고 부모 형제간 화목을 당부했다.
두 번째 서첩에는 ‘자아 확립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으며 근검하게 살아라’라고 적었다. 비록 집안은 풍비박산 났지만, 실망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닦아 부지런히 살아가라는 당부다.
세 번째 서첩에는 ‘학문과 처세술을 익혀 훗날에 대비하라’라고 썼다. 온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글을 연구하여 통달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이는 효를 가장 우선으로 하고, 나를 세우며 학문에 정진해야 한다는 정약용 선생의 가치관과도 맞닿아 있다.
정약용은 시집간 딸에게 보낸 <매화병제도>에도 아내의 치마를 잘라 그림과 글을 담았다. 화폭에 담긴 새 두 마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피첩은 지난 2004년 수원에서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 수레에 담겨 있는 것을 인근 공사장 인부가 발견했다. 정약용 선생의 후손이 보존하고 있다가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고, 여기저기 세상을 떠돌다가 드디어 발견된 것이다.
하피첩은 2006년, KBS 진품명품에 나와 진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당시 최고가인 1억 원의 평가를 받았다. 이후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소장 중인 <매화병제도>와 비교하여 같은 치마 천인 것이 확인되었다.
이 서첩은 부산저축은행 대표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파산과 함께 경매에 나왔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7억 5천만 원에 매입했다. 당시 박물관 1년 유물 구입 예산의 1/3 가량을 들인 금액이었다고 한다. 하피첩은 조선시대 결혼 생활과 자식 교육 등에 대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홍씨 부인은 10번 임신하여 첫 아이를 유산한 후 모두 6남 3녀를 낳았다. 그러나 6명의 자녀가 홍역과 천연두로 죽고 2남 1녀만 살았다. 정약용이 <마과회통>을 지은 이유도 아이들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1777년 16살 때 정약용은 자신의 학문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 성호 이익을 만나게 되었다. 이익은 정약용이 두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익의 학문을 접하고 그의 사상을 계승한 ‘사숙(私淑)’이 되었다. 사숙이란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평소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학문이나 덕성을 배우고 따르는 제자를 말한다.
정약용은 아버지가 임지인 화순에서 돌아와 서울에 머물던 중 이익의 유고집인 <성호사설(星湖僿說)>에 푹 빠져들었다.
<성호사설>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평소 기록해 둔 글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정리한 책으로 천문, 지리, 역사, 제도, 군사, 풍속, 문학 등 넓고 깊은 학식이 집대성되어 있는 실학의 대저술서다. 이익이 40세 전후부터 독서하다가 느낀 점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기록해 두었던 것을 그의 나이 80세 되던 해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해 편찬했다. 총 30권 3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학문은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이 주류였다. 그런데 정약용은 이익의 글에서 천문, 지리, 경제, 국방, 제도 등 현실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전혀 새로운 학풍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정약용은 이익의 제자였던 이가환, 이승훈 등과 교류하며 성호의 학문을 깊이 파고들었고, 스스로 “성호 선생의 학문을 계승하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성호사설>은 정약용의 학문 세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설계도 역할을 했다. 그는 학문이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정약용의 평생 신념이 되었다. 정약용은 훗날 이익의 학문을 정리하여 <성호선생문집>의 편찬을 돕기도 했다.
이익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정신인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돕는 데 쓰여야 한다”라는 가르침은 정약용의 3대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중 토지 제도 개혁(정전제 등)에 대한 고민은 이익의 한전론에서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이익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교리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정약용 역시 이러한 영향을 받아 초기에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수용하고, 나아가 거중기 설계와 같은 실용적인 기술 발전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 정약용은 자신을 이익의 학통을 잇는 적자로 여겼다. 정약용은 이익의 사상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집대성하여 조선 실학의 완성자가 된 것이다.
정약용은 훗날 “내가 성호 선생의 글을 보지 못했다면 참다운 공부가 무엇인지 모를 뻔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정신적 지주이자 학문적 출발점을 이익에게 두고 있었다.
정약용은 22살(1783년)에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는 암기 위주의 공부보다 경전의 근본 뜻을 파헤치는 깊이 있는 공부에 매진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시절, 정약용은 운명적인 조력자 정조를 만나게 되지만, 동시에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접하며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이덕일
다산학술문화재단
나무위키
남양주시
강진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