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천주교에 빠지다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는 마재성지가 있다. 정약용 생가인 여유당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다. 다산 생가와 실학박물관을 방문할 때 빼놓지 말고 들리기를 바란다.
사실 나는 이 성지가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쳤다가 글을 쓰면서 다시 가야 하는 수고를 했다. 정약용유적지로 가기 약 700m 전에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을 하면 된다. 유적지를 둘러보기 전이나 나올 때 잠깐 들르면 좋을 것 같다.
마재성지에는 대문이 없다. 그냥 잘 꾸며진 정원이 있는 대저택 같다. 그러나 들어가면 아담한 한옥 성당과 함께 한복 입은 마리아상, 한복 입은 예수상을 볼 수 있다.
마재성지는 가족 모두가 순교로 신앙을 증거 한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의 성가정 성지다. 성가정은 부모와 자녀가 모두 가톨릭신자로써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을 말한다고 한다. 마재성지에서 추모하는 성가정은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복자 정철상 가를로, 성 정하상 바오로, 성녀 정정혜 옐리사벳,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 일가족 다섯 명이다.
정약종은 1786년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굳건하게 믿음을 지켰다. 1799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자 중국 평신도 단체를 모방한 명도회(明道會)를 만들어 회장을 맡아 이끌며 교리를 깊이 연구했다.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난 후 서대문 밖 형장에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함께 순교했다.
설화에 따르면 정약종은 처형당할 때 하늘을 보고 죽겠다며 누워서 망나니의 칼을 받았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첫 칼질이 잘못되어 목이 반만 잘리자 일어나 앉아서 성호를 긋고 두 번째 칼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처참(處斬)형을 당했다. 능지처참(陵遲處斬)이란 죄인의 뼈와 살을 발라내는 능지형과 신체를 토막 내는 처참형을 말한다. 그의 첫째 아들 정철상도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다 뒤따라 순교했다.
정약종의 남은 가족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둘째 아들 정하상은 천주교 확산을 위해 중국으로 들어가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 요청이 로마 교황청에 전해져 조선 교구가 만들어졌다. 목숨을 걸고 한 일이었다. 정하상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참형당했다.
정하상의 세례명은 바오로인데 지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정약종 아내 유조이는 79세의 고령으로 문초를 받다 감옥에서 순교했다. 딸 정정혜도 가족들의 뒤를 따라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끝내 배교하지 않고 명예롭게 순교했다.
도마성전 바로 옆에는 명례방이 있다. 명례방은 역관이었던 중인 김범우의 집을 말하는데 숨어서 교리를 공부하고 예배를 드리던 장소였다. 이름이 같은 이곳의 명례방은 기념품을 살 수 있고 가볍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쉼터로 되어있다. 정약종 가족 개개인의 초상화와 가족의 초상화, 주문모 신부의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마재성지 뒤쪽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는데 조용히 생각하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과 연결이 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면 ‘잘린 발목’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보인다. 못 자국이 있어 예수의 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방문한 날은 너무 춥고 바람이 몹시 불었다. 사진만 몇 장 찍고 곧 돌아오려고 갔는데 의외로 볼 것이 많아 시간이 지체되었다. 처음에 입구를 찾지 못해 차를 아래쪽에 주차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마재성지는 약간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한다. 들어와 보니 마당에도 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었다. 입구가 양쪽으로 되어 있어 자칫하면 한쪽을 못 볼 수도 있으니 꼼꼼히 보아야 한다.
처음 내가 올라와서 보았던 곳은 '성가정'이 쓰인 곳이었고 나중에 발견한 곳이 '마재성지'라 쓰인 입구였다. 휘 둘러보고 다시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면 반대쪽에 있는 대문 사진을 찍지 못할 뻔했다.
추운 날씨에 사진을 오래 찍으니 손이 시렸다. 도마성전을 보고 마지막으로 명례방에 들어가니 뜨거운 물이 나오는 정수기와 스틱 커피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커피를 타서 한 잔 마셨다. 커피값은 알아서 통에 넣으면 된다. 안에 비싼 물건도 많았는데 돈을 넣는 통만 있고 사람은 없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사무실로 들리거나 계좌이체를 하라는 메모가 보였다.
역시 천주교 성지답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성지를 찾는 사람이 양심 없이 물건을 훔쳐가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종이컵에 따라 마시는 스틱 커피 한 잔이었으나 내게는 그 어떤 커피보다 달콤하고 따뜻했다.
정약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주교와 이벽을 빼놓을 수 없다. 정약용은 이벽을 통해 서학(천주교)을 접하게 되었는데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서양의 과학기술에 곧 빠져들었다.
1754년 경기도 포천 기호학파 남인 집안에서 태어난 광암(曠庵) 이벽(李蘗)은 무과에 합격해 황해병마절도사와 좌포장의 직책을 맡았다. 이벽은 신체가 건장하고 키가 8척에 이르며 힘은 장사였다.
이벽은 언변이 좋았는데 누이가 정약현과 혼인하자 그의 동생인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어울려 학문을 익혔다. 나이는 이벽이 정약용 보다 8살 많았으나 정약용이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이사를 오면서 부쩍 가깝게 지냈다.
이벽이 천주교를 접한 것은 6대조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천주교 서적을 통해서였다. 6대조 이경상은 병자호란 때 인질로 심양에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셨으며 귀국할 때 선교사 아담 샬에게 선물 받은 천주교 서적을 가져왔다.
이벽은 <천주실의>를 독학으로 접한 후 상인이나 사신들을 통해 서양 학문과 천주학 책을 더 구해서 읽었다.
이벽 역시 천재였다. 후일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중용강의보>를 쓸 수 없었다고 적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에게 ‘중용’에 대한 70가지 질문을 내렸다. 이때 학문이 높았던 이벽은 정약용의 안내자 역할을 맡았다. 두 사람은 70가지 질문을 하나하나 토론하며 답을 적어나갔다.
이벽의 높은 학문에 정약용은 놀랐다. 정약용이 작성한 답을 읽고 정조는 크게 칭찬했다. 이후 정약용은 이벽을 더욱 신뢰했다.
뜻한 바가 있었던 이벽은 과거의 뜻을 일찍 접고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꿈꾸었다. 그리고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깨우친 후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였다.
조선 사회는 처음 천주교를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 받아들였고 유학자들 사이에서 거부감 없이 연구되었다. 18세기말 천주학은 주로 관직 사회에서 소외된 남인 소장파들이 탐구한 학문이었다.
1770년 이벽은 천진암에 들어가 약 15년간 서학과 천주 교리 연구에 매진했다.
1779년 그의 나이 25세 되던 겨울, 이벽은 이름난 학자 권철신(權哲身)이 정약전, 권상학 등 여러 선비와 더불어 천진암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시대 강학은 주로 서원에서 열렸는데 경전 독서, 문답, 토론, 의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강학은 학파별로 교재와 토론 내용도 달랐다. 선비들은 강학에 참석해 도덕적 수양과 사회적 관계 형성, 유교적 가치 실현의 장으로 삼았다.
이벽은 눈이 덮인 1백 리 길을 걸어서 이 모임에 참석하여 천주교 교리를 전파했다. 10여 일 동안 계속된 이 강학회에서 참석자들은 천주교가 참되고 올바른 가르침임을 깨달았다
1783년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여비를 마련해 주며 사절단에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중국에 가면 북경에 있는 천주당을 찾아가서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배우고 세례를 받으라고 종용했다. 또 올 때 천주교 서적을 구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1783년 11월, 중국에 도착한 이승훈은 이벽이 일러준 대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책을 구해 1784년 귀국했다.
이벽은 곧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인이 되었으며 서울 수표교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교리를 깊이 연구했다. 이벽의 집에 갑자기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천주교를 공부하게 되자 이를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조금 넓은 집으로 옮겼는데 그 장소는 명동에 있는 중인 김범우의 집이었다.
정약용이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직접 듣게 된 것은 1784년 4월, 남양주 마재마을 두미협(斗尾峽. 지금의 팔당댐 근처) 배 안에서였다. 당시 정약용은 소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서 대과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고향에 내려와 큰형수(정약현의 처)의 제사를 마친 후 배를 타고 함께 서울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이벽에게 서학(西學)과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천주교 교리는 정약용에게 새로운 진리이자 깨달음이었다.
정약용은 처음 천주교를 대할 때는 서양의 학문으로 생각했으나, 매형 이승훈에게 ‘요한’이란 세례명을 받을 즈음에는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정약용 형제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과 모여 천주교에 대해 강학을 열고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토론했다.
1785년 이들은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이벽에게 천주교 교설을 듣다가 도박을 단속하기 위해 순라를 돌던 포졸들에게 발각되었다. 포졸은 이 이상한 모임을 곧 상관에게 알렸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이 바로 천주교도의 비밀 집회를 적발한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다. 형조는 곧 이들을 전원 체포했다. 그러나 형조판서 김화진은 양반출신들은 모두 훈방하고 모임장소를 제공한 중인신분의 김범우 만을 투옥했다.
조정은 이 사건을 통해 풍문으로 떠돌던 천주교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유생들은 곧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 이들을 처벌하라고 연일 상소를 올렸다. 처음 정조는 이 사안을 그리 문제 삼지 않았다.
“서학(천주교)은 한때의 유행일 뿐이니 성리학자들이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천주교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김범우는 고문으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귀양지 밀양에서 사망했다. 후일 김범우가 제공한 명례방 집터에는 1898년 명동성당이 들어섰다.
뒤이어 진산사건(珍山事件)이 터지자 정약용은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다.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 지금의 충남 금산)에서 윤지충(尹持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즈음 조상의 제사를 불허하는 교황 바오로 6세의 교서가 내려졌다. 윤지충은 어머니의 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에서 이 행동은 곧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 짓게 만들었다.
조정은 윤지충을 잡아들여 전주 감영에서 참수하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진산사건은 신해박해 혹은 신해사옥이라 부른다. 그런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었다.
이 일이 터지자 정약용의 아버지가 몸져누웠다. 아버지는 집안에 닥칠 화를 염려하여 아들들에게 천주교에서 발을 빼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당시 양반 자제들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대부분 배교를 선언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신뢰했던 정조에게 폐를 끼칠 수 없었던 정약용은 천주교를 배교(背敎)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1797년 정약용은 정조에게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배교 사실을 알렸다.
정조실록에는 정약용이 올린 상소문이 있다.
승지 정약용(丁若鏞)이 상소하기를,
“신이 이른바 서양의 사설(邪說)에 대하여 일찍이 그 글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모하였고 거론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였으니 (중략) 그런데 불행하게도 신해년의 변고가 발생했으니, 신은 이때부터 화가 나고 서글퍼 마음속으로 맹서하여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였으며 성토하기를 흉악한 역적같이 하였습니다. (중략) 애당초 그것에 물이 들었던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조금 성장해서는 문득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이미 분명하게 하고 분변 하기를 더욱 엄중히 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나무람을 당하여 입신한 것이 한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왓장처럼 깨졌으니, 살아서 무엇을 하겠으며 죽어서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고 이어서 내쫓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선(善)의 싹이 봄바람에 만물이 싹트듯하고 종이에 가득 열거한 말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직하지 말라.”하였다.(정조 21년 1797년 6월 21일)
정약용은 이 상소문을 씀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논쟁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문제는 1800년 정조가 갑자가 승하하면서 터졌다.
조정은 그간 느슨하게 대했던 천주교인들을 강경하게 대처하기 시작했고 정순왕후를 앞세워 천주교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신해박해(辛亥迫害)다. 신해박해는 천주교인을 향한 박해라기보다 당시 남인이 천주교를 많이 믿었기에 남인을 내치려는 정치적 탄압이기도 했다.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은 성상(聖像), 교리서적,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을 고리짝에 넣어 임대인(任大仁)에게 옮기게 하였다. 그런데 이 임대인이 숨길곳을 찾다가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1801년 2월 11일, 정약용 형제들은 곧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정약용은 이미 배교를 선언했으나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약용 형제들과 천주교의 인연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고 맏형 정약현 부인의 동생이 이벽이었다. 결국 정약용은 고초를 겪다가 장기(포항)로 유배를 갔다.
가장 믿음이 좋았던 셋째 형 정약종(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은 끝내 순교했다. 그는 고리짝의 내용물이 모두 자기의 것이라 시인했으나 주문모 신부에 관한 일은 끝까지 함구했고 천주교를 금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하다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졌다.
정약종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정리한 천주교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했다.
이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졌는데 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였다. 그는 천주교를 공부하여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1801년 백서를 작성했다.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 事件)은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 알렉시오가 조선이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자 청나라에 종주권 행사를 요청하다 발각된 사건이다.
신해박해 전까지만 해도 조선은 천주교를 사대부가 깊게 믿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그리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데 신유박해로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일어나자 도망치던 황사영은 제천 배론(排論)의 산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 황사영은 청나라에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막기 위해 침략해 달라는 과격한 내용의 서신을 썼다.
황사영은 가지고 있는 명주천에 외세의 침략을 유도할 1만 3,311자의 글을 완성했다. 그는 이 글을 청나라 북경에 머물고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다.
편지에는 당시 조선의 가톨릭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활동과 순교 사실, 신유박해 때 죽은 순교자들의 간단한 전기를 기록했으며 조선 국내의 실정과 포교(침략)의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황사영은 이 편지를 보내지 못하고 곧 체포되어 죽음을 맞았다. 그의 아내 정 마리아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서 자랐다. 이 일로 장기(포항)로 유배를 갔던 정약용은 다시 불려 와 고초를 당했다. 정약용 역시 사형선고를 면할 수 없었다. 그가 겨우 목숨을 건진 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순교한 형의 집에서 발견된 편지 때문이었다.
정약종의 집에서 발견된 편지에서 ‘정약용이 모르게 해야 한다’, ‘형제가 함께 서학(천주교)을 할 수 없으니 내 죄다.’라고 적힌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이 편지로 정약용은 겨우 사형을 면했다.
그런데 이 편지가 발견되기 전 정약용은 살기 위해 천주교 신자를 찾아내는 데 협력했다. 즉 믿음이 약하고 사리 분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노비나 어린이를 중점적으로 심문하여,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정약용의 배신에 이승훈은 분노하여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라고 분노했고, 다른 신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문 반면 정약용은 자진해서 자신이 세례성사를 주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형 정약종의 편지 덕에 두 형제는 목숨을 건졌다.
정약용은 배교에 이어 자신이 살기 위해 고발까지 한 행동을 평생 괴로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정약용이 겉으로만 배교했지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다산독본-파란>을 쓴 정민 한양대 교수다. 그는 정약용이 천주교 초기 신부(神父) 중 한 사람이었으며 겉으로 배교했으나 속으로는 평생 천주를 믿고 의지했다는 것을 여러 자료를 통해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약용 연구의 권위자인 박석무는 "정약용은 배교한 뒤로 천주교와 완전히 관계를 끊었고 이후의 생은 천주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며 정약용의 배교를 인정하고 있다. 특별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이 설전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에게 천주교를 전파했던 이벽 역시 명례방 모임에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 사건 이후 성균관 유생들이 천주교 배척을 요구하는 통문을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돌렸다. 큰 처벌을 받지 않고 석방은 되었으나 이벽은 문중의 거센 추궁을 받았다.
아버지 이부만은 경주 이씨 문중회의에 수차례 불려 가 문책을 당했다. 아들을 배교시키지 못하면 족보에서 제명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후 아버지는 아들을 압박했다. 만약 족보에서 삭제되면 패가망신은 물론 이벽의 형과 아우가 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격노한 아버지는 아들을 별당에 가두었다. 아버지는 심지어 이벽 앞에서 자살시도를 하며 아들을 압박했다. 이벽은 감금당한 채 지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역병에 걸렸다. 안 그래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약했던 그는 역병을 이기기 힘들었다. 가족들은 이벽에게 땀을 내게 하려고 이불을 뒤집어 씌웠는데 이벽은 그만 질식하여 죽고 말았다. 병을 앓은 지 8일 만의 일이었고 허망한 죽음이었다. 1786년 그의 나이 33세였다. 이벽의 죽음으로 천주교는 최고의 천주교 이론가를 잃게 되었다.
당시 전염병은 조정에 보고해야 했으나 이벽에 관한 문건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후일 역사가들은 그가 전염병이 아닌 약물 중독, 즉 타살로 죽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벽은 고향인 포천 화현리 선산에 묻혔다가 1979년에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조성된 천진암성지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이벽 등 한국천주교회 초기 5명의 인물들이 모두 이장되었다.
이벽이 쓴 책으로 알려진 <숭례의설(崇禮義說)>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814년 7월 말, 정약용은 이벽과 젊은 시절 함께 작성했던 ‘중용강의’를 새로 정리해 ‘중용강의보’를 엮어냈다. 그는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위로 이벽과 토론하던 해를 헤아려보니 어느새 30년이 되었다. 그가 여태 살아 있었다면 덕에 나아가고 학문에 해박함을 어찌 나와 견주겠는가? 옛 글과 지금 글을 합쳐서 본다면 틀림없이 놀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살아남았고 한 사람은 죽었으니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랴.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한다.
2023년 5월 20일 이벽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그의 고향인 포천에 '광암 이벽 유적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이곳은 이벽의 생가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천주교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천주교 공식 문서상으로 한국 최초 순교자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벽 세례자 요한은 끝내 배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인정되어 현재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만약 이 내용이 인정된다면 최초 순교자인 윤지충 보다 6년 먼저 순교한 이벽이 천주교 최초 순교자로 새 역사를 쓰게 된다. 누가 뭐라 해도 이벽은 이승훈, 권일신 등과 함께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 천주교를 창설한 주역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천주교인은 아니지만 천주교가 어떻게 이 땅에 들어오고 전파되었는지를 정리하고 마재성지를 둘러보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종교에 대한 탄압, 목숨을 걸고 지키는 신앙, 과연 나라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반문해 보았다. 어쩌면 살기 위해 배교를 택한 정약용이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느꼈을 그 자책감은 너무 큰 마음의 십자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부 학자는 정약용의 배교는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으나 그의 자서전이자 회고록인 <자찬묘지명>에는 끝내 아무런 변명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우리는 다만 기록에 의존할 뿐이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디지털남양주문화대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정조실록(正祖實錄)>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광암 이벽>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포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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