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을 총애한 정조
정약용 생가 바로 옆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생가를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하긴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학박물관은 볼거리가 풍부했다. 이곳은 정약용 개인의 기록 외에 조선 후기 세상을 바꾸려 했던 이익, 박지원, 김정희, 유형원, 박제가, 박규수, 홍대용, 최한기, 안정복 등 실학자들의 고뇌와 열정을 담았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진지하게 전시를 살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왼쪽에 홍이포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홍이포는 1637년 중국 연안을 수비하기 위해 설치한 16기 중 하나를 복제한 것으로 실제 발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오른쪽 마당 벽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1층에는 <중국에서 그려 온 초상>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 특별전은 오는 3월 1일까지 계속된다.
조선시대 중국에서 그려온 초상(肖像)을 한자리에서 소개하는 전시로, 한 시대와 사회를 보여주는 기록물이자 신문물이었던 초상에 대하여 숨겨진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는 것이 본 전시회의 취지다. 초상화 등 총 70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잠깐 둘러보았는데 그림 솜씨가 대단했다.
실학박물관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천적 학문인 ‘실학’을 주제로 한 국내 유일한 박물관이다. 이곳은 실학자의 삶과 정신을 만날 수 있도록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실학의 형성과 탄생 과정, 실학자들의 저술, 실학과 과학을 주제로 3개의 상설전시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양한 기획전시를 매년 선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의 탄생과 형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중국, 일본으로부터 수용한 서양문물을 통해 농업, 상업, 공업의 발전으로 변화된 조선 사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실학의 선구 역할을 한 여러 실학자의 사상을 통해 18세기 실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소개한다.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중심으로 초기 실학자들의 사회, 경제 문제에 대한 개혁론을 조명하고 있다.
반계 유형원(1622~1673)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은 1670년(현종 11년)에 완성되어 1769년(영조 45년)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1가구당 1경을 경작하는 자작농 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토지제도, 노비세습제의 폐지, 상업의 진흥 등 국가 개혁안이 제시되어 있다.
총 26권으로 쓰였으며 유형원이 20년에 걸친 연구와 탐구를 토대로 49세에 집필을 완성했다. 그는 젊은 시절 지방을 자주 다니면서 직접 목격한 민생의 현실을 책으로 엮었다. '반계(磻溪)'는 유형원이 살던 우반동의 이름에서 따온 그의 호이며, '수록(隨錄)'이란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뜻인데 오늘날의 수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유형원이 살아있을 당시 <반계수록>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책이었다. 후일 양득중이라는 유생의 천거로 이 책을 읽은 영조가 극찬한 이후 널리 읽히게 되었다.
1전시실에서는 송하한유도(松下閒遊圖)가 인상 깊었다. 이 그림은 17세기에 중국인 화가 호방(胡炳)이 김육을 그린 것이다.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은 대동법을 주도하고 동전 유통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파견한 마지막 외교관이었다. 키가 큰 소나무 밑에서 한때의 여유로움을 그린 것인데 당시 김육의 나이는 56세였다. 이 그림은 명나라에 대한 김육의 절개를 소나무에 비유하였다는 해석도 있다. 명은 곧 청에 망하고 우리나라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김육은 163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자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조선은 특산품을 바치는 공납제도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커져 고통이 심각했다.
대동법은 특산품을 쌀로 단일화하고 땅의 소유 정도에 따라 세금을 매겼다. 당연히 땅을 많이 가진 부자들은 반발이 심했고 땅이 없는 백성들은 환호했다.
그는 "대동법은 50인에게는 악법이요, 100만 명에게는 좋은 법이다"라고 말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효종 2년 호서지방에 대동법이 실시되고 효종 9년 호남지역에도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김육은 13세 때 임진왜란을 겪었고 집안이 궁핍했기에 농사를 짓거나 숯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는 이런 경험으로 백성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김육이 79세로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은 마치 부모를 떠나보낸 것처럼 슬퍼했다고 전한다. 백성들은 돈을 모아 그의 공덕비를 세워주었다.
성호 이익에서 출발한 실학을 중농학파, 중상학파, 실사구시파로 나누고, 각 학파에 속하는 실학자의 저술을 소개하고 있다. 지루하지 않도록 그림과 애니메이션, 영상 등 보조자료를 활용하여 쉽게 실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
사실 실학자 이야기만 조금씩 해도 글이 넘쳐날 것이다. 그중 <열하일기>의 박지원, <금석과안록>의 김정희, <환재집(瓛齋集)>의 박규수, <성호사설>의 이익 등은 따로 소개해야 하나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루어 보기로 하고 정약용 이야기에 집중하려 한다.
실학의 특징 중에서도 ‘과학’이라는 주제를 부각했다. 서양 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실학자들이 천문학과 지구의 자전 문제, 지구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각종 천문도와 천문관측기구,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을 볼 수 있다.
실학 속의 과학은 기존의 성리학적 자연인식 체계를 비판적이고 자유분방하게 수정해 재정립한 새로운 체계였다. 또 17세기 이후 중국을 통해 수입한 서양과학의 새로운 지식정보도 빼놓을 수 없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전통적 자연지식과는 많이 다른 서양과학 지식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들이 새로이 정립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성리학적 인식체계에 기반해 선택적으로 수용했다.
정약용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영화관도 있었다. 좋은 점은 상영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 보고 싶은 관객이 버튼을 누르고 들어가면 언제든 관람할 수 있다.
정약용의 일대기를 누른 후 들어가서 영화를 보았다. 만화 영화처럼 되어 있어 이해를 돕기가 쉬웠고 상영시간도 길지 않아 볼만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1층 매점에서 관심 있는 실학자들의 책을 구입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 나오면 왼쪽에 다산정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꽤 넓은 부지에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측우기를 비롯해 혼천의 등이 전시되어 있고 태양으로 시간을 알 수 있는 실학 해시계도 있다. 날이 좋으면 이곳에서 가벼운 간식을 준비해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백성을 사랑하고 정치를 잘한, 뛰어난 왕이 몇 있는데 세종에 이어 손꼽히는 왕이 바로 정조다. 학문에 뛰어났던 정조는 모든 경서를 완벽하게 암기하는 똑똑한 왕이었다. 그는 책을 암송할 때까지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년)는 11살 때 아버지 장조(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양되어 왕통을 계승했다.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싸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친위부대 장용영을 만들어 왕권 강화에 힘썼다.
정조는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창덕궁 후원에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奎章閣)이라고 이름 지었다. 규(奎)는 28수 별자리 중에서 규수(奎宿: 안드로메다 근처의 별들)를 가리킨다. 규수는 예로부터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자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규(奎)는 학자 또는 잘 쓴 글씨를 비유하는 말로도 쓰였다. 따라서 규장(奎章)은 임금이 쓴 글씨, 혹은 걸출한 문장이나 글씨를 가리킨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도서관으로 중국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에 보관했다. 규장각은 어수문(魚水門)을 통해 올라가는데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출입이 금지된 곳 중 격하게 들어가서 보고 싶은 곳이라 매우 아쉬웠다.
1781년(정조 5년), 정조는 규장각을 내각과 외각으로 확대 개편하고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면서 남인을 중용했다. 이후 채제공은 우의정까지 오르며 정조의 최측근으로 일했다.
정약용은 22살이 되던 1783년(정조 7) 증광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정조는 정약용의 답안지를 보고 말했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인재가 나타났구나!”
정약용은 매달 치르는 시험과 열흘마다 치르는 순시(旬試)에 매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서 정조에게 책과 종이와 붓을 상으로 하사 받았다.
어느 날 우수 학생들을 모아 상을 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정조는 정약용을 처음 보았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
“네 얼굴이 낯이 익는구나, 나이가 몇이냐?”
“임오년생입니다.”
임오년이라는 말을 들은 정조는 임오화변으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떠올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정조는 정약용을 자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정조의 눈에 들었으나 최종 시험인 대과에는 6년 연속 떨어졌다. 그것도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성균관 시험에서 거의 1등을 도맡아 했는데 대과만 보면 떨어졌다.
이 대목에서는 정약용이 남인 계열이라 성적이 우수해도 뽑아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정약용은 채제공이 시험을 주관할 때에야 비로소 합격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정조가 정약용을 아꼈기에 오히려 더 엄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급제를 유보하게 했다는 말도 있다. 즉 정조가 정약용을 큰 재목으로 키우려고 어려운 과제를 내리고 공부에 전념하게 했다는 논리다. 아무튼 정약용은 6년 만에 대과에 합격했다.
정약용은 훗날 자신의 자서전인 <자찬묘비명>에서 “임금께서 나를 아껴 급제를 늦추신 것을 알고 감사했다”라고 회상했다.
오늘날의 정약용이 있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이가 바로 정조다. 개혁 군주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조는 정약용을 보호해 준 방패막이였으며 경전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잘못된 점을 비판하였던 학문적 스승이자 동지였다.
정조와 정약용과의 일화는 자서전 <자찬묘비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자찬묘비명>은 정약용이 환갑을 맞아 그가 직접 쓴 자서전이며 일종의 회고록이다.
이 자서전은 정약용이 죽은 지 100년이 지난 1930년 이후 세상에 알려졌다. 정약용과 그의 후손이 이 책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자서전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정조 임금인데 정약용은 임금이 자신을 얼마나 총애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개혁 성향이 강한 남인 계열의 정치인이었고 잘 키우면 자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초계문신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갔다.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는 세종 때부터 시행되었던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정조가 경연을 폐하고 독창적으로 만들었다. 정조는 "경연에서 경들에게 더는 배울 게 없으니 이제 내가 경들을 가르쳐야겠다"라고 말하며 직접 나섰다.
초계문신은 과거를 거친 문신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되어 추천된 당하관 이하 문신으로 37세 이하의 사람 중에서 선발하였고, 40세가 되면 졸업시켰다.
초계문신으로 뽑히면, 국왕의 도서관에서 재교육을 받으며 국왕 측근에서 정책을 충실하게 보좌할 수 있도록 실력을 쌓아가는 인재로 양성되었다.
초계문신은 본래의 직무를 면제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였으며 한 달에 두 번의 구술고사와 한 번의 필답고사로 성과를 평가했다. 정조가 직접 강론에 참여하거나 시험을 보았고 채점도 했다.
교육과 연구 내용은 유학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문장 형식이나 공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경전의 참뜻을 익히도록 하였다. 초계문신은 1781년에 시작해 정조 사망까지 10차에 걸쳐 138명을 배출했는데 이들 중 반 이상이 고위 관직에 진출했다.
정약용, 정약전 형제를 비롯하여 김조순, 채홍원, 서유구 등이 초계문신 출신으로 명단은 초계문신제명록(抄啓文臣題名錄)에 정리되어 있다.
정약용이 마음에 들었던 정조는 밤늦게까지 규장각에 정약용을 남게 하여 토론했다. 정조는 새로운 책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정약용에게 주었고 귀한 책들을 몰래 빌려주기도 했다. 정약용은 정조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전하의 사랑이 너무 뜨거워 타 죽을 것 같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하사한 물품도 꽤 많았다.
1795년-사슴가죽 하사
1796년-가을 진귀한 선물과 음식 하사(쌀, 꿩, 젓갈, 홍시, 귤)
1800년-6월 12일(정조사망 16일 전) <한서전> 10질 하사
정조는 수시로 성균관에 방문해서 쪽지 시험을 치렀다. 문제는 매번 너무 어려웠다. 한 번은 화가 난 유생들이 단체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다. 정조는 불같이 노해서 <정조어필-시국제입장제생(正祖御筆-示菊製入場諸生)>이란 글을 써서 걸어두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잘못 쓴 글자를 먹으로 그냥 쓱쓱 지우고 다시 썼는데 닥종이 3장을 이어 붙인 종이에 쓴 글자는 대충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겼다.
"대다수 선비의 실력이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바로 나의 수치이다. 그래서 이렇게 초기(草記)를 환급하여 특별히 그대들에게 유시하는 것이다."
성균관 유생이나 문신들은 부용지 근처에 돗자리를 깔고 시를 짓거나 시험을 치렀는데 정조는 정약용만 따로 불러 자신이 앉던 방석을 내어주기도 하고, 아예 탁자까지 주며 엎드려 쓰면 불편하니 편히 쓰라고 하여 정약용이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정조는 평소 술을 좋아했고 신하들과 술자리를 즐겼다. 반면 정약용은 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정조는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과의 연회에서 건배사를 외쳤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니 각자 양껏 마시라.”
정조는 술에 취하면 신하들에게 억지로 술을 먹였다. 한 번은 정약용에게 삼중소주(독주)를 옥필통에 가득히 부어주면서 다 마시라고 어명을 내렸다. 당시 옥필통의 크기는 현재 500CC 맥주잔 크기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삼중소주는 3번 증류한 증류식 소주라 알코올 도수가 높았다. 이걸 한 번에 다 마셔야 했으니 술을 못 먹는 사람은 고역이었다. 정약용은 임금의 명을 거역하지 못해 술을 마시면서 '오늘 죽었구나'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다.
정약용이 술을 못 먹어 곤혹스러워 하자 정조는 그를 곯려주면서도 나중에는 “술 대신 책을 요약해 오라”라고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
"시(詩) 짓기 시험을 내서 제 시간 내에 시를 짓지 못하는 관료를 창덕궁 부용지 한가운데의 둥근 섬으로 귀양 보내서 크게 망신을 주었다."
정조는 창덕궁 부용정에서 시를 짓게 하고 제시간에 시를 짓지 못하면 연못에 배를 띄워 섬처럼 만들어진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신하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면 배를 보내 구해주면서 그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또 부용지에서 신하들과 낚시를 하기도 했는데 물고기를 많이 잡지 못하면 벌주를 내렸다.
정약용은 정조 덕분에 활쏘기 연습도 해야 했다. 규장각 신하들은 왕의 명으로 모두 활쏘기를 배웠다. 문신들이라 10순(50발)을 쏘면 대부분 4발도 못 맞췄다. 정조는 활을 못 쏘면 북영(훈련도감의 본영)에 가둬두고 20순(100발) 중 최소 20발은 맞춰야 풀어주었다.
처음에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던 신하들이 나중에는 5발 중 3발을 맞출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어느 날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역인 현륭원의 식수를 마무리하고 논공행상을 하려고 하는데 정약용이 수레로 가득 싣고 온 문서뭉치를 표 하나로 정리했다는 일화가 있다. 따지고 보면 정약용은 엑셀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못하는 것이 없는 엄친아, 그가 바로 정약용이었다.
1789년 정조는 재위 13년 만에 경기도 양주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겨 대역죄인으로 죽은 아버지의 복권과 추존을 계획했다. 정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싶었으며 그것이 부모에 대한 효(孝)라 생각했다.
그러나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수천 명의 사람과 수백 필의 말이 건널 수 있는 배다리가 필요했다.
배다리는 한강 폭만큼 여러 배를 질서 정연하게 배열해 이어서 묶은 후 널빤지를 깔아 서로 다른 크기의 배를 연결해야 했는데 이는 수학적 계산능력이나 과학기술의 원리를 응용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정조는 배다리 건설을 주관하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고 묘당(廟堂)에서는 <주교절목(舟橋節目)>을 만들어 정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정조는 내용이 치밀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이라는 책을 써서 배다리를 놓는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정조는 과학적인 수학 원리와 재능이 뛰어난 정약용에게 한강 배다리 설치 임무를 맡겼다. 정약용이 벼슬에 나가던 첫해인 1789년(28세), 이처럼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그가 정조에게 얼마나 많은 총애와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배다리 제작 기록을 보면 연산군 때는 왕의 행차 때마다 배다리 제작에 고깃배 200~800여 척이 동원되어 어민들의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지형은 동호(東湖-동호대교) 이하에서부터 노량(露梁)이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동호는 물살이 느리고 강 언덕이 높은 것은 취할 만하나 강폭이 넓고 길을 돌게 되는 것이 불편하다. 빙호(冰湖-동빙고, 서빙고)는 강폭이 좁아 취할 만하나 남쪽 언덕이 평평하고 멀어서 물이 겨우 1척만 불어도 언덕은 10척이나 물러나가게 된다. 몇 가지 좋은 점을 갖추고 있으면서 몇 가지 결함이 없는 노량이 가장 좋다."
정조의 명을 받은 정약용은 <주교지남>을 바탕으로 조선 최고의 배다리 건설 기획안을 만들었다. 여러 지역이 물망에 올랐으나 정조가 선택한 장소는 지금의 용산에서 노량으로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노량은 양쪽 언덕이 높고 수심이 깊으며, 물의 흐름이 빠르지 않고 강 폭도 좁아서 배다리를 만들기에 조건이 좋았다.
1900년에 완성되어 현재까지 달리고 있는 한강철교의 구간이 바로 용산과 노량진인데 정조 시대에 강폭을 계산해 이곳을 선택했다는 것은 정조와 정약용의 머리가 상당히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2천여 명이 340m 되는 한강을 안전하게 지나갈 배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어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대형 조세 운반선, 훈련도감에 소속된 배, 한강을 드나드는 경강선(京江船)을 이용했다. 이런 결정은 백성의 삶을 먼저 살핀 정약용의 애민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배는 가로로 엇갈린 형태로 배치한 다음 배를 막대기로 연결하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게 했다. 배다리는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제작되었다. 가운데 큰 배를 설치하고 남과 북쪽에 작은 배들을 설치한 후 소나무 판자를 이용하여 횡판(橫板-배를 가로지르는 판자)을 만들었고, 송판 위에는 잔디를 깔았다. 배다리의 폭은 무려 24척(약 7.2m)이었다.
마침내 한강에 배다리가 완성되자 정조는 수원으로 출발했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백성들은 한강으로 몰려나와 장엄한 광경을 구경했다.
1790년(29세) 정약용은 우의정 채제공의 천거로 예문관 검열(정9품)에 임명되었으나 노론 벽파의 반발에 부딪히자 사직상소를 올렸다.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정조는 정약용이 공격받을 때마다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정약용을 파직하라는 상소가 빗발치자 정조는 정약용을 곡산 부사로 내려보냈다. 잠시 중앙의 비난을 피해 쉬게 하면서 지방행정 경험을 쌓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정약용이 곡산 부사로 부임하기 전, 곡산에서는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다. 이계심의 난은 황해도 곡산에서 포보포(군포-베) 착취에 항의해 농민 1천여 명이 관아에 몰려든 사건이다.
전임 수령이 포보포(砲保布-포군에게 내는 군포) 대금을 200전에서 900전으로 걷어 착취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커졌다. 이에 이계심이 대표가 되어 1천여 명을 모아 관아에 들어가 호소했으나, 사또는 오히려 군사를 동원해 무리를 해산시켰다. 이계심은 곧 도주했고 수배명령이 내려졌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곡산부사는 마치 백성들이 난을 일으킨 것처럼 보고했고, 조정에서는 이를 민란으로 여겨 주동자를 죽이고 기강을 바로잡으라 명령했다. 이계심은 잡히면 사형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이 부임하자 곡산 농민들은 이계심을 앞세워 찾아왔다. 억울한 이계심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였다.
정약용은 농민들의 말을 다 들은 뒤 관리의 부정부패를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천금을 주어야 한다며 이계심을 풀어주었다.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지 않고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다.
정약용을 괴롭히고 유배 생활을 길어지게 만든 인물은 바로 서용보(徐龍輔, 1757~1824) 때문이라는 기록도 있다. 두 사람의 질긴 악연은 정약용의 암행어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794년 11월, 정약용은 33세 때 정조의 명을 받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당시 경기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정조는 경기도 지방을 순찰할 암행어사들을 선발하여 다음과 같이 일렀다.
"수령의 잘잘못을 규찰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살피는 것이 어사의 직임이다. 비단옷을 입는 것은 그 은총을 드러내는 것이요, 도끼를 지니는 것은 그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다. 근래 혹 각도에 보낸 사람들이 그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 어찌 전적으로 그 사람들만을 책할 수 있겠는가. 조정이 사람을 제대로 뽑지 못한 것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중략) 너희들은 맡은 바 직분을 삼가하여 관부와 시장, 촌락을 드나들면서 세세히 조사해 모아서 조정에 돌아올 때에 일일이 조목별로 나열해 아뢰도록 하라."<정조실록 41권, 정조 18년 11월 16일 기사>
정약용은 경기도의 적성, 마전, 연천, 삭녕 지방을 맡아서 내려갔다. 막상 현지에 내려가서 본 백성들의 현실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연천 현감 서용보가 백성들의 재물을 가렴주구 하고 비리를 저지른 사실을 적발했다.
정약용은 한양으로 돌아와 정조에게 서용보의 죄상을 낱낱이 보고했고 서용보는 파직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사건은 자존심 강한 명문가 출신이었던 서용보에게 평생 잊지 못할 치욕과 앙심을 심어주었다.
이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서용보는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하여 영의정 자리까지 오르며 권력을 장악했다. 반면 정약용은 정조라는 거대한 버팀목을 잃고 천주교 박해(신유박해)에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약용의 유배 기간이 길어지자 조정에서는 그를 풀어주자는 논의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실권자인 서용보의 입김이 작용했다.
“정약용은 위험한 인물이다, 절대 그를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
서용보의 방해로 정약용은 결국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서용보가 관직에서 물러나고 힘이 약해진 뒤에야 정약용은 겨우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의 시는 암행어사 시절 정약용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적은 것이다. 좀 길기는 하지만 전면 게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시냇가 헌 집 한 채 뚝배기 같고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쳇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 드네.
집 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팔아도 칠팔 푼이 안 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같이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 새는 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
무너 앉은 선반대는 새끼줄로 얽었도다.
구리 수저 이정(里正)에게 빼앗긴 지 오래인데
엊그젠 옆집 부자 무쇠솥 앗아 갔네.
닳아 해진 무명 이불 오직 한 채뿐이라서
부부유별 이 집엔 가당치 않네.
어린것 해진 옷은 어깨 팔뚝 다 나왔고
날 때부터 바지, 버선 걸쳐 보지 못하였네.
큰아이 다섯 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
세 살 난 작은놈도 군적에 올라 있어
두 아들 세공(歲貢)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빨리 죽기 바라는데 옷이 다 무엇이랴.
강아지 세 마리가 새로 태어나
아이들과 한 방에서 잠을 자는데
호랑이는 밤마다 울 밖에서 울어 댄다.
남편은 나무하러 산으로 가고
아내는 이웃에 방아품 팔러 가
대낮에도 사립 닫힌 그 모습 참담하다.
점심밥은 거르고 밤에 와서 밥을 짓고,
여름에는 갖옷 한 벌, 겨울엔 삼베 적삼.
땅이나 녹아야 들냉이 싹 날 테고
이웃집 술 익어야 찌끼라도 얻어먹지.
지난봄에 꾸어 온 환자미가 닷 말인데
금년도 이 꼴이니 무슨 수로 산단 말가.
나졸 놈들 오는 것만 겁날 뿐이지
관가 곤장 맞을 일 두려워 않네.
오호라, 이런 집이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멀어 어찌 다 살펴보랴.
한(漢) 나라 벼슬인 직지사자(直指使者)는
이천석(二千石) 관리라도 마음대로 처분했네.
폐단과 어지러움 근원이 혼란하니
공수, 황패 다시 온들 바로잡기 어려우리.
정협의 유민도를 넌지시 본받아서
시 한 편에 그려 내어 임금님께 바치리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한*
디지털남양주문화대전
<정조실록(正祖實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자찬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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