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유배길에 오르다
다산생태공원은 실학박물관에서 약 5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다산생태공원에서 보이는 강은 남한강이 아니라 팔당댐이다. 팔당호를 따라 조성된 공원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운치로 가득했다. 먼저 물가로 다가가 한참 호수를 바라보았다. 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속 복잡한 생각들이 맑게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정약용이 평소 자주 올랐던 운길산과 수종사가 저 멀리 펼쳐져 있었다.
다산생태공원은 지난 2012년 한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훼손된 팔당호 수변부를 정약용유적지와 어우러지게 친환경적인 공간으로 조성했다.
이곳은 생태습지, 정화습지, 조류생태습지 등을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와 수생식물원, 쉼터, 야생화 꽃밭, 팔당호와 생태공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시간이 되면 나루 전망대, 숲 속 놀이터, 다산 유아숲체험원, 수월정, 푸른 물센터, 소내 나루터, 잔디마당, 수변 쉼터, 정화 습지, 연꽃단지 등을 모두 돌아보면 좋다.
특히 공원 곳곳에 팔당호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벤치와 테이블이 많아 호젓한 자연과 물을 동시에 즐기며 가족 단위로 소풍 와서 힐링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실은 나도 시간이 부족하여 다산생태공원 구석구석을 다 살펴보지 못했다. 입구를 중심으로 내가 돌아본 곳은 주로 왼쪽이었는데 오른쪽은 둘러보지 못했다. 그러나 수국정원과 연못이 있어서 수국이 피는 6월이나 연꽃이 피는 계절에 찾으면 훨씬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공원이 한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올 때는 중앙으로 가지 않고 공원 왼쪽으로 나왔는데 그곳은 실학박물관의 다산정원과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음식점과 찻집이 많았고 딸기 체험농장도 있어서 온종일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
*다산생태공원 안내*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67
문의 및 안내 : 031-590-8634
정약용은 여러 천주교 사건에 휘말려 사직 상소를 올리고 마재마을로 돌아왔다. 정약용을 파직하라는 상소가 매일 빗발쳤고 정조에게 더는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1800년, 정조는 정약용을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다.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 주자소의 벽을 새로 발랐다. 아직 덜 말라 정결하지 못하니 그믐깨쯤에 궁에 들어오거라.” <자찬묘지명>
정조는 편지와 함께 <한서전> 10권을 보냈다. <한서(漢書)>는 한나라가 수도를 옮기기 전인 서한(기원전 206년∼기원후 25년)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사기(史記)>와 함께 동양의 대표적인 역사서로 꼽힌다. 아버지 반표(班彪)가 기초를 마련했고 아들 반고(班固)가 대부분의 글을 썼으며 여동생 반소(班昭)가 나머지를 마무리했는데 2대 80여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정조가 보낸 <한서전>의 다섯 권은 제목이 있었고 다섯 권은 제목이 없었는데 나머지 다섯 권의 제목을 적어 보내라는 어명이었다. 정약용은 책의 제목을 지어 먼저 정조에게 보냈다.
약속했던 하루 전날, 정약용은 궁궐 앞에 당도했다. 그런데 궁궐 앞에는 백성들이 상복을 입고 나와 엎드려 울고 있었다. 전날 밤 정조가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정약용은 “나를 알아주던 유일한 분이 떠났다”라며 엎드려 통곡했다.
이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은 곧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탄압으로 번져나갔다.
포항 장기와 신지도로 유배길에 올랐던 정약용과 정약전은 9개월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한양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정약용의 나이는 40세였다.
두 형제는 나주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각자의 귀양지로 향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죽게 된다.
유배(流配) 또는 귀양(歸養)은 죄인을 먼 곳으로 격리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멀리 갈수록 무거운 형벌이다.
유배는 대부분 정치범이 받는 형벌이었다. 유배형이 내리면 먼저 곤장 100대를 맞아야 했다. 매를 맞다가 죽기도 하고 후유증으로 유배길을 가는 도중이거나 도착해서 곧 숨을 거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배로 형을 정해놓고 일부러 때려서 죽이는 일도 있었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속전(돈)을 내면 장형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장형이 집행된 다음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2,000리(900km)에서 3,000리(1,350km)로 정해진 유배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명나라 제도를 그대로 따랐는데 조선은 영토가 좁아 도성에서 2,000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려면 나라 밖으로 나가야 했다.
거리를 채우기 위해서 여러 지역을 경유하여 돌아가기도 했다. 세종 때 조선의 실정에 맞게 2,000리는 600리, 2,500리는 750리, 3,000리는 900리로 대폭 수정했고 이후 이 거리에 따랐다.
유배지까지는 직접 걸어서 갔다. 나라에서 소달구지를 태워주는 것은 거열형이나 참수형이 확정된 사형수를 형장으로 호송하는 경우였다.
유배지에 도착한 후에는 정해진 집과 주변 지역 이외에는 관리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유배된 죄인에게 해주는 지원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활비도 죄인이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유배지에서 벌어먹어야 했다. 그러나 낯선 땅으로 유배를 온 사람은 사실 자급자족이 어려웠고 동네 사람들에게 구걸로 연명하거나 제대로 된 의식주를 챙기지 못했다. 집에 재산이 많으면 뒷바라지를 하거나 먹거리를 보내주기도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 보니 음식은 쉬거나 썩기 일쑤여서 젓갈 정도만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정약용은 한양을 떠난 지 20여 일 만에 강진에 도착했다. 그런데 하필 강진 현감은 노론 벽파의 이안묵이었다. 금평군의 후손인 이안묵은 남인인 정약용을 냉혹하게 대했다.
정약용은 이안묵이 강진 현감에서 물러나기까지 3년 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보통 지방 관리가 죄인에게 일정한 숙소를 지정해 주어야 했지만 이안묵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은 눈치가 보여 정약용을 더 냉대했다. 더군다나 천주교를 믿으면 곧 죽음이라는 소문이 지방까지 퍼진 상태라 마을 사람들은 전염병 환자 대하듯 아무도 정약용을 도와주지 않았다.
혹시 정약용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면 쫓아가서 문을 부수고 담을 허물 것처럼 험악한 분위기였다. 3년 후 이안묵이 토색질한 것이 들통나 탄핵당하고 난 후 그나마 조금 편해졌다.
정약용은 처음 몇 달 동안 마을을 돌며 끼니를 구걸해야 했다. 그는 제대로 먹지 못해 대나무 가지처럼 바짝 말라갔다. 강진에 도착한 지 석 달 동안은 옷도 갈아입지 못했다고 한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강진의 한 주막 주인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정약용이 안쓰러웠는지 뒷방 하나를 내어주었다. 방은 너무 작아서 두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로 비좁았으나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정약용은 할머니가 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몇 달을 지냈다.
“세상 꼴 보기 싫어 방문은 늦게 열고 찾는 손님 없을 줄 알아 이불도 늦게 개지.” <새해에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고향 가족들의 삶 역시 피폐했다. 등 돌린 친구들에게 낙심해서 공부를 멀리한다는 아들들, 앓아누웠다는 아내, 정약용은 심신이 나약해져 밤이면 울었다.
당시 두 아들은 19세, 16세였고 막내딸은 8세였다. 역적 죄인을 둔 집안이니 가진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고 남편 없이 집안을 이끌어가는 홍씨 부인의 고초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배지에 있는 남편을 돌볼 여유는 물론 없었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아내는 가재도구를 내다 팔거나 양잠 등을 했고 두 아들도 농사를 지었다. 큰아들은 수확한 마늘을 팔아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다. 정약용은 아이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였다.
그는 늘 편지로 아이들을 훈계했다. 그중 특이한 것은 아들들에게 가능한 한 서울 도성 안에서 살라는 조언이었다.
“(중략)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도성 문에서 수십 리만 떨어져도 이미 미개한 곳이니 더구나 먼 지방은 말해 무엇하겠느냐. (중략) 만약 벼슬길이 끊기게 되면 속히 서울에 거처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금 죄인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기에 너희들을 우선 시골집에 은둔하게 하였지만, 후일의 계책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서울의 10리 안에 거처할 생각이다. 만약 집안의 재력이 떨어져서 서울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부디 잠시 근교에 머물면서 과일을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도모하다가 재산이 넉넉해지거든 곧장 도성 가운데로 들어가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정약용은 또 한탄하기도 했다.
“누가 만약 채마밭을 빌려준다면 그 은혜 참으로 잊기 어려우련만.” <소장공 동파 시에 화답하다> 중
“죽지 못해 이어가는 구차한 하루하루,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탄핵문과 재판 기록을 근거로 나를 평가하겠지.” <서(書) 두 아들에게 부침> 중
어느 날 방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며 소리를 질렀다.
“불쌍해서 머물게 해 줬으면 살길을 찾아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누워서 지내려면 당장 나가시오. 그래도 나라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아이들이라도 좀 가르치던지.”
할머니의 말에 정약용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할머니는 붓과 종이를 방에 던져주었다. 정약용은 그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책을 잡았다.
그는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이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지었다. 사의재는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하겠다는 뜻이다.
정약용이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던 이 주막은 현재 정약용을 기억하고 찾는 관광객들의 인기 명소가 되었다.
정약용은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던 어느 날, 윤단이라는 선비가 정약용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정약용은 사양했다. 자신보다 죄인에게 글을 배우는 윤단에게 쏟아질 비난을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윤단은 상관없다고 했다. 윤단은 총명하여 배움이 빨랐다.
1805년에는 윤규조라는 양반이 찾아와 산 중턱 암자를 하나 내주었다.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寶恩山房)이었다. 정약용은 주막을 벗어나 드디어 조용한 곳에서 혼자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배우겠다는 제자들이 계속 찾아왔다.
다시 3년 뒤인 1808년 윤단의 형인 윤종진이 귤동 만덕산에 방 두 개가 있는 초가를 지어주었다. 그곳이 바로 다산초당(茶山草堂)이다.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하고 주석 학문인 경학(經學)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 제자를 가르쳤다.
정약용은 백련사 주지로 있던 승려 혜장(惠藏) 선사를 만나 인연을 맺으며 가르침을 받았다. 두 사람은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오가며 밤새워 <주역>과 <역경>을 토론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혜장은 39살에 요절했다. 혜장이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이청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고 외가인 해남 윤씨도 찾아와 정약용을 격려했다.
현재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오솔길은 두 사람을 추억하는 사색의 길이 되었다. 백련사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은 본격적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책을 쓸 때 필요한 자료를 제자들에게 맡기는 등 제자들의 도움도 받았다. 사실 그 많은 책을 혼자서 쓰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자찬묘지명>에 따르면, 정약용의 저작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으로 모두 499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해배 이후 15년 동안 그는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을 개정하거나, <상서고훈>과 <상서지원록>을 개수하고 합편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서경을 풀이한 주석서)으로 정리하는 등 온 힘을 기울여 182책 503권의 <여유당집>을 완성했다.
정약용은 책을 쓰느라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왼쪽 어깨는 마비증상을 보였고 쌓인 울화 탓에 자주 체했다. 또한 먹는 것이 부실하여 영양실조에 학질을 달고 살았고 말년에는 빈혈에 중풍까지 왔다고 한다.
유배지의 험한 환경에서 정약용이 저술한 500여 권의 책들은 임금(정조)에게 배운 가르침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기록이었다.
큰아들 정학연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여유당집>의 교열을 부탁했고 1883년(고종 20)에는 왕명에 따라 <여유당집>이 전사되어 내각에 수장되었다.
정약용이 쓴 503권의 책 중에 대표작은 지방관의 올바른 자세와 부패 방지에 관해 쓴 <목민심서>, 국가 체제 개혁안인 <경세유표>, 공정한 형벌 집행과 수사 지침서인 <흠흠신서>를 꼽는다.
이 세 권의 책을 정리하여 쓰려했으나 원고가 너무 길어져 생략한다. 무엇보다 이 세 권의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아동용으로 나온 것도 많다. 혹 관심이 있으면 서점에서 구입하거나 도서실에서 빌려서라도 읽어보길 권한다.
무엇보다 정약용은 이상적인 관료였다. 배다리와 거중기를 설계하면서도 그는 사람을 가장 중히 여겼다. 즉 그의 책에서 엿보이는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민본(民本)이었다.
사실 정약용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배다리를 만든 것보다 수원화성을 설계한 것이다. 이 내용은 다음 호에 수원화성-정조의 큰 그림 편에 쓸 예정이다.
정약용이 학문과 저술 활동에 몰두하고 있을 때 큰아들 정학연은 아버지의 해배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정학연은 1810년부터 북을 울려 국왕에서 호소하는 상언을 수차례 올렸다.
“부친의 억울한 죄형을 선처해 주십시오.”
“억울합니다.”
“폐하, 저희 아버지를 선처해 주십시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약용은 아들에게 자신의 해배를 구걸하지 말라며 엄하게 꾸짖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구명 활동을 계속했다.
아사 정후상(정학연의 어린 시절 이름)이 찾아왔는데 전 승지 약용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가 사옥에 걸려 숱한 세월을 귀양살이로 보냈는데 후상이 의술에 정통하여 권세를 잡은 사람과 사귀어 마침내 죄에서 풀려 돌아오게 하였으니 진정한 효자라고 할 수 있다. 신현 <성도일록> 중
큰아들의 효심으로 임금의 사면 결정은 나왔으나 정약용은 곧바로 해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문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집으로 돌아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친구 김이교(金履喬)였다. 김이교 역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당했다. 1806년 유배 생활을 마친 김이교는 다산초당을 방문했다.
“자네, 나에게 부탁할 것이 없는가?”
김이교가 묻자 정약용은 아무 말 없이 친구를 보내는 섭섭한 마음을 담아 부채에 시 한 수를 써서 선물로 주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 고향으로 돌아가는 지인을 보내는 마당에, 외딴곳에 홀로 남겨져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김이교는 한양으로 올라와 정약용이 준 부채를 사계절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어느 날 당시 재상이던 김조순을 만났는데, 김조순은 매우 당황해하며 물었다.
“아니 한겨울인데, 무슨 부채를 들고 다니나? 괴이해 보이는구먼!”
“이 부채를 누가 준 것인지 아십니까?”
“누가 준 것이기에 그리 귀중하게 들고 다니는가?”
“나의 벗 정약용이 지어준 시입니다. 제가 감동하여 늘 몸에 품고 다니고 있습니다.”
김조순은 김이교에게 전후 사정을 자세히 들었다.
“아직도 정약용이 유배지에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네!”
김조순은 곧바로 정약용의 석방을 순조에게 건의했다. 순조는 진작 해배 명령을 내렸는데 아직도 정약용이 유배지에 있다고 놀라며 다시 어명을 내렸다. 이처럼 정약용의 해배는 사방에서 그를 도왔던 사람들로 인해 겨우 이루어졌다.
정약전은 형이라기보다 단짝 친구였다. 정약용은 여러 형들 가운데 둘째 형인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을 가장 잘 따랐다.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이 영향으로 정약용 역시 이벽, 이승훈 등 여러 남인 인사들과 두루 어울리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정약용이 1790년 문과에 먼저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형 정약전도 뒤이어 합격하면서 두 형제는 나란히 초계문신에 등재되었다.
신해박해와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었던 두 사람은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고 형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두 사람은 유배지에 발이 묶였지만, 편지로 안부를 물으며 서로를 격려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 서식하는 해양생물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자산어보(玆山魚譜)> 책을 집필했다. 저술 시기는 1814년(순조 14)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산(玆山)’은 유배지인 흑산(黑山)을 말한다. 정약전은 이 지명이 마치 귀양살이하는 자신처럼 음침하고 어둡다고 생각해 ‘자산’이라고 바꾸어 썼다.
<자산어보>는 총 3권으로 되어 있는데 1권은 인류(鱗類-비늘이 있는 물고기), 2권은 무린류(無鱗類-비늘이 없는 물고기) 및 개류(介類-갑각류), 3권은 잡류(雜類)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흑산도의 해양생물을 총 55류 226종으로 분류하여 기록했다. 즉 이름, 크기, 형태, 습성, 맛, 포획 방법, 이용법 등이 다루어져 있는 물고기 백과사전이다.
흑산도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들은 이름이 틀리거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정약전은 흑산도 주민들을 찾아가 일일이 물었으나 어떤 물고기는 알고 있는 이름이 각각 달랐다. 결국 정약전은 주민들과 함께 물고기 이름을 통일시키고 이름이 없는 물고기는 이름을 짓기도 했다.
정약전 역시 흑산도에서 사촌서실(沙村書室)이라는 서당을 지어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다. 또한 소나무 정책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담은 <송정사의(松政私議)>, 흑산도 어민 문순득의 표류담을 적은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했다.
2021년 정약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산어보(玆山魚譜)>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이 책은 하마터면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정약전이 책은 완성했으나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는 바람에 원고가 유실될 뻔했다. 그동안 형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정약용은 급히 제자 이청을 흑산도로 보내 원고를 수습해 왔다.
<자산어보>를 책으로 만든 것은 결국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제자 이청에게 글의 수정을 맡겼고 전체 글의 40%가 넘는 분량을 첨언했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그는 이곳에서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학문을 마무리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정약용은 자신이 지은 책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도록 하는 바람이었다. 조정에서는 가끔 정약용을 불러서 다시 써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끝내 관직에 다시 진출하지는 못했다.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정약용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저술한 책을 널리 소개하여 읽히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정약용은 자신의 호를 다음 세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사암(俟菴)’으로 썼다.
해배 이후 학문적 교제를 했던 대상은 신작(申綽), 김매순(金邁淳), 홍석주(洪奭周), 홍길주(洪吉周), 김정희(金正喜) 등 당시 저명한 노·소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정약용은 정권을 잡은 노·소론계 중 고정된 정론이나 학설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 토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펼쳤다.
해배된 이후 정약용은 양반 제자 18명과 중인 제자 6명을 그의 아들들과 함께 각각 경영하는 전답을 기본재산으로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했다. 또 초의(草衣) 선사를 비롯한 만덕사 스님들은 전등계(傳燈契)를 조직하여 우의를 다졌다.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836년 2월 22일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하루 전날 그는 아내에게 주는 시를 썼는데 그것이 정약용이 쓴 마지막 글이었다.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나고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사람 늙기를 재촉하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고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정약용이 사망한 날은 60주년 결혼기념일(회혼일)이었다. 회혼례를 축하하러 온 손님들은 장례식 손님이 되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정약용이 죽은 2년 후 부인 홍씨도 사망했다.
"고 승지(承旨) 정약용(丁若鏞)은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재주가 일세에 탁월하였다. 응당 조정에서 포양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니 모두 정2품 규장각 제학에 추증하며,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라."<순종실록 4권, 순종 3년 8월 19일>
위와 같이 순종의 어명에 따라 1910년 8월 20일 정약용(丁若鏞)에게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인걸(人傑)은 간데없으나 정약용이라는 이름만은 길이 남겨졌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한*
디지털남양주문화대전
<정조실록(正祖實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자찬묘지명>
나무위키
향토문화전자대전
다산생태공원
<자산어보>
강진군청